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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절한 만큼 상이 크다 (히 11: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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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을 잘 받은 영리한 개는 모르는 사람이 맛있는 고깃덩어리를 던져줘도 주인의 허락이 없이는 먹지 않고 고개를 돌립니다. 왜냐하면 도둑이나 보신탕감 도둑놈들은 고깃덩어리에 독약을 넣어 죽이고 훔쳐가기 때문입니다. 영리한 개도 먹고 싶다고 아무것이나 집어먹지 않고 먹기를 거부하는데 하물며 사람이, 더욱이 영으로 살아야 하는 크리스천들이 육신의 소욕대로 절제나 거부하는 것이 없이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올림픽 게임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금메달, 은메달을 딴 사람들은 예외 없이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들임을 느끼게 됩니다. 먹고 싶을 때 먹지 않고 마시고 싶을 때 마시지 않고 쉬고 싶을 때 쉬지 않고 육신안일을 거절하고 육신의 소욕을 거부하고 맹훈련을 쌓았기 때문에 메달을 딴 것입니다. 어떤 선수는 영 점 몇 초 차이로 금메달을 못 따고 은메달, 동메달을 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레슬링 선수들을 보면 예외 없이 전부 귀들이 비정상이 되고 불구자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훈련할 때 하도 짓뭉개고 짓찧고 비벼댔기 때문입니다. 그 분야에서 세계 제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를 이기고 육신의 안일과 쾌락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1. 거절한 만큼 상이 크다
세상에서 금메달을 따고 일인자 되는 데도 먼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쾌락과 안일을 거절한 만큼 큰상을 받는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귀하게 쓰임받고 궁창의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나는 인물이 된 사람들은 더욱 자기를 절제하고 본능과 욕심을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모세가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본문, 히브리서 11장 24-26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라고 했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편안히 살았으면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고 잘하면 대애굽의 황제가 될 수도 있었지만 모세는 이 큰 기회를 거절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잠시 죄악의 날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긴 것은 장차 더 크고 영원한 상을 바라보기 때문이었습니다.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을 거절하고 잠시 있는 나그네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영원히 빛나는 인물이 되고 천국에서 영원한 상급과 면류관을 받은 것입니다. 모세가 부름을 받았을 때 자기는 말도 잘 못하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망설일 때 하나님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던지라고 해서 던졌더니 그것이 뱀이 되었습니다. 지팡이는 우리가 몸을 의지하는 것이고 허리 아프고 다리 아플 때 의지하고 도움을 받는 물건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세상의 사람이나 권력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면 그것이 뱀과 같이 마귀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고, 또 손으로 그 뱀의 꼬리를 잡으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는 것은 마귀 같은 원수라도 바로 잡으면 지팡이같이 우리를 돕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이나 권력이나 물질을 하나님보다 의지했다가 그것이 마귀로 변하여 여러 해 동안 고통당한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또 한편 거짓말로라도 거금을 헌금하겠다고 한 것 때문에 큰 예배당 지을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뱀 같은 마귀도 결국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일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4장에 귀중한 나드향 옥합을 몽땅 깨뜨려 예수님께 부어드렸는데 그것은 일 년 동안 일해서 번 돈에 해당한 금액이요, 더욱 귀한 것은 여자들이 결혼 밑천으로 저축해 둔 결혼저금통장이나 마찬가지인데 그 모든 욕심과 애착심을 거절하고 예수님께 부어드린 것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아깝게 허비한다고 마리아를 책망하는 가룟 유다를 도리어 책망하셨고 마리아에게는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막14:9)라고 엄청난 칭찬과 축복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념하다”(momorialize)라는 말은 신약에 꼭 두 번 나오는데 또 하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성만찬을 행하시고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19절에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마리아에게 하신 칭찬과 축복이 얼마나 무게가 있고 영구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거절하기 어려운 것을 거절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할 때 그 상이 얼마나 큰 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4-25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거절”의 극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 신앙의 극치를 말씀하신 것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본문,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잠깐 살다가 안개와 같이 사라지는 세상에서 월계관을 쓰고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도 절제하고 거절하는데, 하늘의 영원한 상을 얻는 데야 얼마나 육신의 욕망을 거절하고 절제해야 되겠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27절에서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라고 했습니다.

거부하고 절제하고 죽어야 큰 상을 받는데 사람들은 거부나 절제는 하지 않고 큰 상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영적 깊이 있는 위대한 고백을 고린도후서 4장 10-12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 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 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 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부인과 거절의 극치는 죽는 것인데 죽어지는 만큼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합니다. 내가 죽는 만큼 남도 살릴 수가 있습니다. 전에 국방대학원 교회에서 목회하다가 은퇴한 김홍태 목사님은 고등학교 때 기도하다가 평생 결혼하지 않고 바울처럼 온전히 주님께 헌신하겠다고 서원했는데 어떤 때는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아주 믿음도 좋고 인물도 예쁘고 인격도 훌륭한 여자를 누가 중매했는데 꼭 결혼하고 싶더랍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 서원을 파기하지 않기 위해 강단 앞에 엎드려 기도하기를 “주님, 제가 주님 앞에 서원한 것을 파계하고 결혼할 바에는 이제 내 생명을 불러가시고 그렇지 않으면 이 욕망이 사라지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더니 그 마음이 없어지고 결국 무사히 은퇴하시고 지금 실버타운에 살고 계십니다. 그의 자기부인과 욕망거절로 장군과 영관장교들 중에서 그의 신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계급장 별과 무궁화를 모으면 몇 바가지나 될 지 알 수 없습니다.

한편 대부흥사였다가 지옥 간 목사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옥은 반드시 있다”라는 책을 쓴 미국의 벡스터(Baxter) 여사는 40여 번 지옥의 참담한 광경을 보고 왔는데 한번은 대부흥사였다가 지옥에 떨어져 비탄과 고통 중에 비명을 지르며 좀 구원해달라고 울부짖는 목사님을 보고 예수님께 불쌍하니 좀 구원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고 하니까 “그는 세상에서 한 때 교회도 크게 부흥시켰고 성령을 받아 부흥회도 인도하며 많은 은혜를 끼쳤지만 후에 그는 타락하여 성령의 능력도 부인하고 교인들을 기만하고 헌금을 거두어서 쾌락을 누리는 데만 사용하고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단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낮이나 밤이나 그 고통을 당한다. 사탄에 의해서 여기 있게 되었고 그를 괴롭히는 것도 사탄이다”라고 하시더랍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라고 했습니다. 주님도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거절한 만큼 큰상을 받습니다.

2. 목표달성과 자기성취도 희생과 헌신에 있습니다
미국에서 일류대학을 나와 주지사가 되고 장관이 되고 대통령이 된 사람들은 대학에서 자신을 바쳐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을 배우고 섬기고 봉사하는 법을 배운다고 합니다.
영어로 공복(公僕)을 civil servant라고 하는데 이는 섬기고 봉사하는 직분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처럼 높은 공무원이 되면 세도나 부리고 으스대는 사람과는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헌신적 자세가 지식이나 지능지수보다 목표달성과 자기성취에 더 큰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지난 장애우 헌신예배 때 설교한 강영우 박사가 쓴 책에 의하면 10여 년 전 하버드 대학에 내신성적이 뛰어나 아시아계 사람들이 많이 입학을 했는데 그 해에 아시아 학생 10명이 낙제를 했고 그 중의 9명이 한국 학생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머리는 좋고 지능지수는 높아서 일류대학에 입학은 했지만 초일류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일 뿐 그 이상의 장기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일류대학을 나와서 출세하고 돈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살아보자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공통으로 추구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하고 헌신할 줄 모르는 사람은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없고 시대적 주류 물결에 합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일류대학교에서 교육받고 주지사 되고 상하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된 사람들은 자기가 출세하는 것이 최종목표가 아니라 전세계의 평화와 행복,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꿈이요 최종목표이기 때문에, 미국이 자기 나라만 평안하고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인터폴 즉 세계를 감시하고 지키는 일을 하고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나 북한의 김정일을 세계의 악의 축으로, 인류 공동의 적으 로 알고 싸우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밑에 깔려 있는 미국은 다른 나라들과 그 이념과 사상이 다른 것입니다. 한국도 지난 54년 동안 미국이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남한도 공산화 돼서 몇 년 동안에 수백만 명이 굶어죽고, 교회를 다 파괴시킨 북한과 같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친북, 친공분자들의 선동에 넘어가 북한이 주적이 아니라 미국이 주적이라고 하며 김정일을 숭배하고 부시는 죽여야 한다고 하니 큰일도 보통 큰일이 아닙니다.

자기의 욕망을 거절하고 희생과 헌신의 자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온인류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려는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요사이는 “섬기는 지도자”(servant leadership)라는 말이 유행이고 또 그런 책도 많이 나옵니다. 우리 목사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더 많은 영혼구원을 위해서 모세처럼, 바울처럼 자신의 욕망을 거절하고 날마다 죽는 자기부인의 자세가 먼저 있어야 교회도 부흥되고 진정한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창조주이며 메시아임에도 불구하고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즉 조물주가 피조물 인간을 섬기고 자기 목숨까지 우리 인류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사이 유행하는 말 가운데 웰빙(well being)이니, 하이리빙(high living)이니, 양질의 삶이니 하는 말은 한마디로 잘 먹고 잘 살자는 뜻입니다. 어찌 보면 좋은 말 같으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영광이나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자는 이념이 결여되어 있고 육신의 안일이나 쾌락 위주의 삶이 인생의 목표가 되는 느낌을 줍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도 “놀기 위해”, “즐기기 위해” 하는 것으 로 해석하는 목사,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순 교자들처럼 내세천국을 위해, 신앙을 고수하 기 위해, 현재의 삶을 포기하고 생명도 버리는 포기와 거절의 신앙은 점점 찾아볼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요사이는 한마디로 제멋대로 하는 세상인 것 같습니다. 조금만 더우면 콜라, 얼음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성한 옷도 무릎이 나오도록 찢어 입고, 나이 어린 여학생들까지도 담배 피고 술 마시고 마약도 합니다. 정숙해야 될 가정주부들도 걸핏하면 소주 마시고, ‘따분하게 한 남편만 바라보고 어떻게 살아 적당히 간식도 하면서 살아야지’ 합니다.

종교문제로 병역을 기피해도 판사가 합법 판결을 내리고 50여 년 동안 잔인무도한 공산당으로부터 지켜온 국가보안법도 폐지하자고 정부와 여당이 밀어붙이고 있으니 이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그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요, 메시아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라고 한 말씀과,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 25-27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라고 한 말씀과, 위대한 영도자 모세가 히브리서 11장 24-26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라고 한 말씀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세상 것, 육신의 것을 거절하고 포기하면 그만큼 큰상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됩니다. /김홍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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