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기생 라합의 믿음-제대로 믿은 여자 (히 11:31)

첨부 1


오늘 저희가 믿음을 배우고자 하는 대상은 기생 라합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기생이라는 비교적 고상한 표현으로 나와 있지만, 원문 히브리어 단어, '쪼나'나 헬라어 '포르네'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창녀라는 한 가지 뜻만을 갖고 있습니다. 여성으로는 사회에서 제일 비천(卑賤)한 신분이지요. 이 창녀 라합을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모본으로서 우리 앞에 제시합니다. 이 사람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더욱이 마태복음 1장의 유명한 예수님의 족보에 보면, 이 라합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정통성을 따지기 좋아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사도 마태는, 예수님이 탄생하기까지 믿음의 한 고리 역할을 한,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이 창녀 라합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소위 사회적 신분으로 차별하지 않으심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라합이 구원을 받은 후에도 창녀로 살지 않았음은 기억해야 합니다. 아직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지 못하였을 때, 무슨 사연인지 모르지만, 창녀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그녀의 인생이었지만, 그가 구원을 받은 후에는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어떤 신분, 어떤 실패의 삶을 살아왔다 할지라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누구에게라도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후에도 예전의 죄악과 오만의 부끄러운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구원의 비밀이 이것입니다. 어떤 지경의 사람도 은혜로 구원받았지만, 구원받은 이후 그의 삶은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라합의 믿음을 기억할 때 우선적으로 이 사실은 다시 확인하여 봅시다. 인생 전력(前歷)이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라합도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고, 믿음의 모본, 존귀한 자로 세우셨음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의 지금까지의 삶은 어떻게 초라한 모습이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능히 존귀하게, 아름답게 하십니다. 그러면 라합의 믿음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제일 천대받던 여자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일 존귀함을 받는 여인 중의 한 사람이 되게 한 비밀의 믿음이 무엇인지를 추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라합의 믿음의 비밀을 추적하려면, 여호수아 2장을 봐야지요? 라합의 스토리 이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의 세월을 이제 거의 다 마치고 드디어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의 첫 성, 그 성이 여리고입니다.

이스라엘이 침공해 온다는 소식에 여리고성 사람들은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초긴장의 경계태세를 들어갑니다. 이스라엘은 여리고 땅의 지형과 정황을 살피기 위하여 두 사람의 정탐꾼을 보내고 이들은 들키지 않기 위하여, 아무나 잘 수 있는 창녀 라합의 집에 머뭅니다. 그러나 수상한 사람이 들어왔다는 첩보를 들은 여리고성 안기부에서 요원을 보내어 체포하려고 하였지만, 라합이 이미 이들을 지붕 위에 널어 놓은 삼대(=아마) 속에 숨겨 놓았습니다.

여리고 수색대가 못찾고 돌아가자 라합이 지붕 위에 있는 이 두 정탐꾼에게 올라가 이야기합니다. 바로 이 장면,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군 2명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라합의 믿음이 나타납니다. 잘 주목하여 보십시오.
<수2:8-11>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은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그렇게 주목하여 보시니 라합의 믿음의 마음이 무엇인지 보이십니까? 우리나라 말은 1인칭 단수를 종종 복수로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나의 집'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 집'이라고 하고 '내 교회'라고 하지 않고 '우리 교회'라고 하고 심지어 '내 마누라'라고 하지 않고 '우리 마누라'라고도 표현하지요. 그래서 우리 나라 사람들은 '우리가'라고 표현해도 '내가'라는 의미로 거시기 상황에 따라서 다 이해합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 언어는 그렇지 않습니다. 단수 '나'와 복수 '우리'를 뚜렷하게 구분합니다. 오늘 라합의 고백의 본문도 '우리'는 복수로서 '우리 여리고 사람들'이고 라합이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할 때는 '나는' 이라고 표현되었습니다.

생략된 주어를 넣어서 읽고 '나'와 '우리'를 혼동되지 않고 구분하여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수2:8-11>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 여리고 사람들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 여리고 사람들은) 들었음이라 (우리 여리고 사람들이)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우리 여리고 사람들이) 정신을 잃었나니 / (내가 판단하기로) 너희 하나님은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읽으니까 라합의 믿음의 마음이 보이십니까?

여리고성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들었습니다. 홍해 물을 마르게 하고 아모리 왕을 정복한 이야기를 듣고서. 이는 사람의 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그들도 들어서 알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굉장했는데, 그 하나님의 권능을 입은 이스라엘이 자기네 성, 여리고를 향하여 온다는 소식을 듣자 여리고성의 모든 사람이 어땠습니까? 여리고성 사람들 모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자신들을 심판하러 오신다고 하자,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습니까? 간이 콩알만해졌고 두렵고 무섭고 떨리고 오금이 져려왔고 그래서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실존적으로 직면하면, 제일 먼저 느끼는 정서가 두려움입니다. 하다못해 귀신이 나타난다거나, 헛것이 보인다거나 해도 사람의 마음은 금새 두려움에 사로잡히지요? 일상의 삶 속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에 직면하면, 사람이 제일 먼저 느끼는 정서가 두려움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한계 밖의 실재에 직면하면 두려움을 느낍니다.

예) 베드로의 고백, '나를 떠나소서!!'
선악과를 따 먹은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가 '네가 어디에 있느냐?'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하여 숨었듯이, 여리고성 사람들, 하나님의 소식을 듣고 두려워서 그 다음에 어떻게 했습니까? 성을 굳게 잠그고 극도의 경계 상태에 들어가지요?

사람의 마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보편적으로 보이는 현상은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도피합니다. 숨습니다. / 숨어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경계합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그 다음은 어떻게 행합니까? 두려움이 그 마음 바닥에 깔려 있을 때, 그 다음에 나오는 반응이 어떤지 이런 예를 들어서 깨달아 봅시다. 요새 최고의 인기 드라마가 '대장금'이라고 하지요? 여러분도 대장금 보십니까? 한상궁과 장금이가 모함을 받아 누명을 뒤집어쓰고 고문을 당하고 거짓 실토하는 치계전 주인 때문에 이제 처분을 기다리며 옥에 갇혀서 고문의 고통과 절망스러움으로 죽어가는 한상궁에게 최상궁이 찾아 옵니다.

'네가. 네가 그랬지?' 떨리는 목소리로 한상궁은 최상궁을 추궁합니다. '명이(장금이 어머니)도 나도 장금이도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너지, 너지!' 교활하고 능청맞은 최상궁, 한상궁의 시선을 마주 보지 못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냐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것이야, 명이도 자네도 장금이도 늘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 기회를 박탈한 것은 내가 아니라 너희 스스로야. 내게 몸을 맡기지 않은 죄! 권력에 몸을 숙이지 않은 죄! 제발 그냥 조용히 가 주게. 내가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도록 도와줘. '여기까지 듣고서 치를 떠는 한상궁에게 최상궁이 마지막으로 한 마디 남깁니다. '자네에게 명이가 아픔이면 나에게 명이는 두려움이야'

최상궁이 사람의 탈을 쓰고 천인공노할 악을 행하는, 요괴인간처럼 행하는 정서적 동기, 이유 무엇때문입니까?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을 죽여서라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뜻대로 관철시키려고, 자기를 지키려고 합니다.

여리고성 사람들도 그렇지요? 항거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껴서 처음에는 숨었다가 그 다음에 그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자기를 지키려고, 그래서 하나님을 이겨보려고 하나님의 뜻을 꺽어 보려고 하나님의 손길을 거부하려고 하나님과 싸우려고 합니다. 자신들의 속내에 분명히 두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손길과 화평하기보다는 성문을 굳게 잠그고 성안 단속을 든든히 하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아보려고. 하나님을 이겨보려고 하였습니다. 단 한 사람 라합을 빼고는 모든 여리고성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 줄 알고 그들 마음에 두려움이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화평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이기려고 합니다.

한 가지 더 캐내어 볼까요? 여리고성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자신들이 이길 수 없음을 알고) 두려움을 느꼈으면서도 하나님과 싸워서 이기려고 합니까? 대장금의 최상궁은, 자신의 실력이 모자라는 것을 알기에 두려움을 느끼면서 왜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거짓과 악을 행합니까? 아담, 사람은 왜 하나님을 향하여 두려워하여 숨었습니까? 자수하여 광명찾지 않고. 아담, 인류 최초의 인간이자, 모든 인간의 전형인 아담. 아담이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까?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가 무엇이었지요? 자기 기준의 선악의 잣대가 생긴 것, 자기중심성이 선악과의 의미입니다. 이 두려움을 없애고자 아담은 하나님을 도피하기는 하였어도 자기 중심성을 버리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여리고 사람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 알면서도, 그래서 두려움이 그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생각, 자기 입장, 자존심'를 지키려고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하였지, 자기 생각을 바꾸어 하나님과 화평하고 하나님께 항복하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왜 하나님을 향하여 두려움을 갖으면서도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습니까? 자기 생각, 자기 판단, 자기 입장, 근근이 이어지는 status quo를 바꾸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상궁, 그가 왜 두려움 때문에 살인까지 저지릅니까? 자신의 누리는 권력, 자신이 누리는 존경과 인기, 수랏간 일인자로서의 자존심.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왜 그렇게 예수님을 박해했다가 결국 죽이기까지 합니까? 예수님이 두려워서 그렇지요? 맹렬한 비난과 박해를 하는 내면의 동기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들이 왜 예수님을 두려워합니까? 자기 종교, 자기 권익, 자기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을 죽여서라도 자기 생각, 자기 판단, 자기 입장을 고집하고 싶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진리에 대하여 제가 글을 하나 읽어 드리겠습니다. 20세기 선지자라 일컫는 A. W. Tozer의 '하나님을 추구함'이라는 책에서 발췌해 온 글입니다. ' 우리 각자의 내면에는 우리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원수가 있는 것같다. 예수님은 그 원수를 '목숨(life)', '자기(salf)' 또는 자기 목숨(self-life)'이라고 부르셨다. 그것의 중요한 특성은 소유욕이 강한 것이다. 이 원수가 살도록 허락한다는 것이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그것을 거부하고 포기하는 것이 결국에는 아무 것도 잃지 않는 것이며 영생을 위해 모든 것을 보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여기 이 원수를 멸망시킬 효과적이고 유일한 방법이 주어져 있다. 그것은 십자가에 의한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우리 안에 있는 억센 노랑이는 가만히 누워서 우리의 명령에 복종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마치 흙에서 뽑혀 나오는 식물처럼 우리 마음에서 찢겨 나와져야 할 것이며 턱에서 뽑혀 나오는 이처럼 아픔과 피 속에서 뽑혀 나와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의 불쌍한 애걸에 대해 자신을 무감각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게 될 것이고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가장 꽤씸한 죄 중 하나인 자기 동정(self-pity)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모든 여리고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소식 앞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자기를 내려놓지 못하였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자기 연민, 자기 집착에 얽매여 하나님과 싸우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두려움. 여리고성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러나 아무도 자기 마음의 생각을 바꿀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라합을 제외하고는. 그러나/ 창녀 라합은, 그가 여리고 사회에서 누리고 있는, 붙들 수 있었던 기득권이 하나도 없어서 쉽게 자기를 포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사실은 라합은 똑같이 들은, 능력의 하나님의 소식 앞에 세상 사람과 다르게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지키려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여타의 사람들과 달리, 자기를 포기하고 육신의 죽음을 무릎쓰고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하나님 편에 서기를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믿음 아닙니까? 세상의 많은 사람, 아니 모든 사람과 달리, 자존심을 넘어서 자신의 영혼에 정직한 응답을 보인 것, 이것이 라합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라합을 구원했으며 이 믿음이 세상에서 처절하게 실패한 인생일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일 존귀한 여자로 높여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의 멧세지는 떨어져 있습니다. 이 세대는 분명히 끝이 있으며, '한번 죽는 것이 사람에게 정하신 것처럼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으리니' <히9:27> 명확히 가르쳐 줍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성경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인간의 죄에 대하여, 악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진리의 멧세지는 선포되고 있습니다.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다고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18:2-4>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14:12>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죄인임을 고발하는 성경의 멧세지 앞에서,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죄인됨을 인하여, 자기중심성의 죄를 벗지 못하면 반드시 죽게 되리라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멧세지 앞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당신은 여리고 사람처럼 하나님을 대적하고, '뭐 이 따위 소리가 다 있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며. 다시는 교회 오는가 봐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당신 생각, 판단으로 하나님을 이기려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라합처럼,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 편을 택하시겠습니까?

사실 심판의 멧세지는 사람의 귀에 기분좋은 멧세지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성경의 멧세지, 나의 죄인됨을 깨우치고 그 죄에 대하여 심판이 있음을 깨우쳐 주는 성경의 멧세지를 정직하게 직면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불꽃같은 안목으로 당신의 마음을 손바닥보듯이 들여다 보시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보이는 당신 자신의 모습을 훤하게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면, 당신에게도 그 두려움이 있지 않습니까?그 두려움을 당신은 어떻게 처리하고자 하십니까?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아의 목소리를 높여서 대응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양심에 들려오는 권고에 정직히 응답하여 하나님께 항복, 하나님과 화목하시겠습니까?

성경의 멧세지가 복음인 것은, 오늘 우리에게는 심판의 멧세지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실존적 죄인인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크게, 더 선명하고 더 분명하게 사랑의 멧세지를, 용서의 멧세지를 들려 주십니다. '아들아! 너의 마음이 두려움에 쫓기고 있음을, 그 두려움을 나도 안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고, 별 수 없이 이기적일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죄책감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 연약함을 나도 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아가 '내게 나아 오렴. 그래도 반항하고 싶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싶고 너의 생각, 너의 길 고집하고픈 그 마음까지도 안다. 아직도 자아를 내세워 하나님과 싸우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 있을지라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기꺼이 너를 용서하며 넉넉히 너를 사랑하여. 네 마음을 몹시도 시달리게 하는 죄책감과 두려움에서 자유케 해 주기 원한다. '

'사랑하는 아들아, 네 생각을 버리고 내게 나아오렴. 네 고집, 프라이드를 버리고 내게 나아와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렴. 사랑하는 딸아, 네 안에 죄가 용서받음으로 말미암은 진정한 평안과 생명을 위하여, 죄책감과 두려움에서 벗어난 참된 자유를 위하여, 심판과 형벌의 공포에서의 영원한 해방을 넘어 너로 살맛나게 하고 꺼지지 않는 소망을 주는 생명과 영생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았느냐? '
'사랑하는 아들아,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네 생각을 고집하고 네 느낌을 고집하고 네 길을 고집함이,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처럼, 네게 고역이지 않더냐? 더 이상 두려움에 쫓겨서 분노와 반항과 싸움으로 살려고 하지 말고. 내가 너를 위하여 너를 대신하여 수치와 고통의 십자가를 지어 죄값을 다 치루었으니, 내 사랑을 신뢰하고 내 안에 거하라.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사랑으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당신은 이 사랑의 복음에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의 복음 앞에서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오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사랑의 복음마저도 거부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내 길, 내 판단, 내 생각을 고집하여. 두려움을 위장하며 사시겠습니까?

라합은 심판의 멧세지 앞에서도 마음의 생각을 바꾸어,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과 화목했습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의 멧세지 앞에서도 '자아'를 포기하고 하나님 편에 섰는데, 어째 너희는 하나님께서 정의의 심판의 멧세지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의 복음을 들려 주는데도 '자기'를 고집하려고 하느냐?' 그 믿음의 여인 라합이 하늘에서 우리들 중의 머뭇거리는 어떤 사람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마음의 두려움을 해결하셨습니까? 더욱 내 길을 고집하며, 내 생각을 집착하며, 내 판단에 매달려 혹시 두려움을 마음 바닥으로 자꾸 밀어넣고 강해 보이는 모습으로 뚜껑을 덮으려고 하지는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만큼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우리에게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반항의 마음, 대적의 마음이 출몰되고 있음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마음의 두려움을 온전히 치유하사 자유케 해 주시기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죽음, 운명, 심판, 내세, 양심. 이런 것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두려움을 애써 누르려고 하지 말고, 자아를 강화시켜서 애써 아닌 척하려고 하지 말고, 라합처럼 하나님께 나아와 보십시오. 하나님 편에 서 보십시오. 하나님께 항복하여 하나님과 화목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멧세지 앞에서, '자아'를 버리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마다 구원을 경험합니다. 그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던 두려움에서 해방을 경험합니다. 마침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것같은, 성령께서 내주하시고 임재하심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한, 사도 요한의 이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요일4:18> 당신도 이 사랑의 체험을 고백드리고 싶지 않습니까?예수님의 사랑을 신뢰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참 신앙의 길로 향하여 보십시오. 예수님의 사랑을 신뢰하여 이제는 예수님의 멍에를 매고, 예수님께 당신의 인생을 온전히 의탁하여 예수님을 배우고 따르는 믿음의 삶을 드려 보십시오.

당신도 라합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혹시 아무리 패배한 인생을 살아왔다 할지라도, 아무리 죄악으로 범벅이 된 삶을 지금까지 살아왔다 할지라도, 당신을 존귀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풍성하게 누릴 것입니다
/이덕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