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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음 너머의 소망 (히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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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주목하고 믿음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야곱의 열 한 번째 아들, 요셉입니다. 지금까지 저희가 보아왔던 믿음의 사람들, 모두가 구약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는 것처럼, 창세기는 율법서로서 '이렇게 살아라'는 인생지침서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니라'고 가르쳐 주는 성경인데, 주로 아담,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 다섯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믿음의 삶을 교훈해 줍니다. 창세기가 모두 50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야곱의 이야기가 27장에서 35장까지 9장, 요셉의 이야기가 37장에서 50장까지 14장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반절이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그 중에서도 요셉에 대한 기록이 제일 많은 것을 보면, 믿음의 삶에 대하여 제일 모본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이 요셉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야곱과 요셉 이 두 사람 중에 객관적으로 볼 때, 누가 더 고난을 많이 겪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만히 보면, 야곱은 삶의 환경에서 그렇게 고난을 많이 당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구덩이에 쳐 던져지기를 했었습니까, 노예로 팔려서 종노릇을 해 봤습니까, 옥고를 치러 본 적이 있습니까. 객관적 환경으로 보면, 야곱보다 요셉이 훨씬 더 고난의 환경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야곱과 요셉 이 두 사람 중에 살면서 마음 고생을 누가 더 많이 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좀 다르지요? 야곱이 그의 말년에 바로 임금 앞에 섰을 때, 바로가 묻습니다. '노인장의 춘추는 도대체 얼마나 되십니까?' 그러자 야곱이 유명한 대답을 하지요.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자신의 삶을 기억할 때, 참 험악하게 살았다고 기억합니다.

반면 요셉은 어떻습니까? 요셉이 보디세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습니다. 큰 애의 이름이 므낫세이고 작은 애의 이름이 에브라임입니다. 므낫세는 '잊어버렸다'는 뜻이고 에브라임은 '풍성하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참 고난의 과정을 많이 겪었지만, 그는 지나간 고난의 세월을 다 잊어버리고 그의 인생을 기억할 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풍성함으로 기억합니다. 야곱은 사실 환경적으로는 크게 고생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제일 불쌍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을 하는 반면, 요셉은 정말 고난의 환경을 많이 겪었지만 다 잊고서 자신의 삶이 풍요롭다고 느낍니다. 흥미롭지요?

여러분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이런 모습 똑같이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고난이 많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세상에 제일 불쌍한 사람인양, 자기가 당한 어려움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것인양 생각하여 험악한 기억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말 고난을 많이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밝게, 행복하게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선아 사랑해'의 이지선 자매처럼, 뇌성마비 장애인 송명희 자매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솔직히 당신은 어느 부류에 가까운 것같습니까? 야곱당 같습니까? 요셉당 같습니까? 그러면, 야곱과 요셉이 왜 이렇게 자신의 삶에 대한 인식이 달랐습니까? 무엇 때문에, 야곱은 자기 앞의 생을 험악한 세월이라고 기억하고 요셉은 왜 풍성한 삶이라고 기억합니까? ( 혹자는 결과론적으로 해석하여, 결말이 좋기 때문이라고 단정할지 모르지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보는 것도 이해가 가지만, 사실 야곱이나 요셉이나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들이 대통령되었을 때, 그 아버지를 향하여 '당신 아들은 대통령이나 되었는데, 당신은 여태 뭐했수?'한다면 그것이 말이 됩니까?야곱의 말년도 행복했습니다.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을 많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고난은 요셉이 훨씬 더 많이 겪었는데, 왜 야곱은 험악한 세월로 자신의 인생을 기억하고 있고 요셉은 풍요로움으로 기억합니까? ) 사실 야곱이나 요셉이나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런 큰 차이가 나는 이유, 야곱과 요셉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자기 앞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의 태도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달랐습니까? 야곱은 자기 일의 성공, 자신의 목표달성을 위하여 기를 쓰고 살아가는 사람이고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비전은 자신의 성공에 있었고 요셉의 비전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 외삼촌 집에서의 야곱 vs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거절하는 요셉, <창39:9> '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요?'

야곱은 사람들을 의식하며 살았고 요셉은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자기 지혜와 행위의 노력을 의지하였고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였습니다. 이 신앙의 태도의 차이가 삶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가져다 줍니다. 여러분, 당신의 삶을 생각하면, 당신은 험악한 삶을 사신 것같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기억되십니까? 야곱, 요셉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은 사람은 다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된 우리는 어디서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은혜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고 영생의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나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당신의 선하신 목적에 따라 인도하시는 은혜, 복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형제, 자매 여러분, 그러면 당신은 어떤 삶의 마음가짐으로 사시겠습니까? 젊을 때의 야곱처럼, 이리저리 상황판단하여 어떻게든 당신의 뜻과 생각을 관철시키려고 애쓰며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요셉처럼, 당신의 삶에 주어진 모든 것에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받아들이고 사시겠습니까?
야곱처럼 어떻게든, 다른 사람을 의지하든 이용하든 사람을 의식하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만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요셉처럼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서 사시겠습니까?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예레미야 선지자가 형통한 삶의 원리를 선명하게 깨우쳐 주었습니다.
<렘22:15> '네가 백향목으로 집짓기를 경쟁하므로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비가 먹으며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공평과 의리를 행치 아니하였느냐 그때에 그가 형통하였느니라. '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우위를 차지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를 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형통을 누리는 진정한 믿음의 길입니다.

요셉이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인 것은, 그가 이처럼 자신의 삶의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서 정의를 사랑하고 인애를 베푼 모습이 그 증거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날마다 유혹할 때, 죄악의 즐거움의 생각이 그에게 안찾아왔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름을 지켰습니다. 억울하게 보복당하여 감옥에 갇혔을 때, 마음에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감옥 동료들에게 '사실은 나 이렇다' 나팔을 불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침묵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사랑을, 정직을 지켰습니다. 기껏 하는 한 마디 이야기가 옥을 나가는 술맡은 관원장에게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치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지 않았더라면, 집안 총무의 일이든, 옥중 총무의 일이든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자기 앞의 삶의 일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아름답게 사람들을 섬기며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보디발의 노예로 팔려가서 말단 하인으로 구박받으며 지낼 때, 옥에 갇혀서 옥중 총무로 지내던 때, 술맡은 관원장이 자신이 꿈 해석해 준 은혜를 까맣게 잊어 버리고 이 년을 지내야 하던 때. 그의 마음에 상처를 입고 원망과 한에 찌들려 폐인이 될 환경적 요인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러나 요셉은 내 삶의 과정이 하나님께서 주관하심을 언제나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쨍 하고 해뜰날' 주시겠지라는 막연한 소망이 아니라, 나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입니다.

물론 그의 마음에 이 모든 고초의 원인을 제공한 형들에 대한 미움, 원망을 포함하여 험난한 삶의 여정에서 지치도록 힘든 기억을, 숨죽여 울어야 하는 마음아픔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첫 아들을 낳았을 때, 그 첫 아들 므낫세의 이름을 지으며 '잊어버렸다'라고 지었지요. <창41:15>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 가만히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마침내 은혜의 날을 펼쳐 주시기 전까지는 요셉이 자신의 고난과 아비의 온 집 일, 형들에게 당한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이지요? 요셉의 기질이 천하태평이라, 그 자신의 삶이 어떻게 되어도 '헤헤'거리는 속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고난의 칼이 자신의 살을 에일 때마다 차가움과 아픔을 그는 시리도록 느끼고 있었으며. 또 새로운 고난이 자신의 삶의 실존에 노크할 때마다 형들로부터 당한 일부터 시작하여 아직도 아물지 않은 마음의 상처가 다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믿음의 승리는, 자신의 마음 안에 이 부정적 기억이, 한의 아픔이 오늘 하나님 앞에서 사랑의 삶에 발목잡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가정의 총무로서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섬겨야 하는 때, 옥중 총무로서 한많은 죄수들을 위로하며 잘 다루어야 하는 때, 그의 마음에 상처의 기억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의 마음아픔의 부정적 기억의 파도가 정의와 사랑의 삶을 살도록 지탱해주는 믿음의 둑을 넘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내면의 마음에서 날마다, 잊어버릴 수 없는, 잊어버려지지 않는 부정적 기억에 대하여, 이를 이기는 믿음의 승리가 있었기에 그의 삶에서 사랑과 정직의 아름다움이 꽃피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시달리게 하고 오늘의 사랑과 정직의 삶의 발목을 잡으려는 부정적 정서, 부정적 기억이 문신처럼 그의 마음에 새겨져 있지만,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이 삶의 모토로 믿음의 승리를 누렸습니다.

요셉의 믿음의 승리는 총리가 되었을 때가 아닙니다. 요셉의 믿음의 승리는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로 정직과 성실로 섬기며 살아갈 때, 옥중 총무로 사랑과 긍휼로 죄수들을 돌보며 살아갈 때, 그 때가 믿음의 승리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요셉의 삶의 믿음입니다. 당신도 이 믿음이 사모가 되십니까?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오늘 히브리서 기자가 요셉의 믿음을 이야기할 때, 그 놀라운 믿음의 삶의 승리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을 때의 유언하는 모습을 지목합니다. <히11: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의 유언하는 장면은 <창50:24, 25>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창15:13, 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이 약속이 아들 이삭, 야곱, 요셉을 거쳐서 계승되고 이 믿음의 사람들은 이 약속을 기억하였습니다.

요셉, 그의 임종이 가까워오면서, 자기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아버지의 온 가족이 이방 땅 애굽으로 오게된 것이 이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임을 그는 보았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지금은 자신이 총리로 있어서 그의 온 가족이 애굽에서 편한 삶을 살지만, 기한이 차면, 애굽에서 나와야만 하는 것임을 그는 보았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그 때에, 자신을 소외시키지 말고 반드시 참여시키도록 자신의 해골을 메고 올라가라고 신신당부하고 맹세를 받은 것입니다.

실제로 <출13:19>에 보면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며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메고 갔음을 가르쳐 줍니다.

가만히 묵상해 보면, 요셉의 유언 때에 나타나는 그의 믿음 이런 것입니다. 첫째는, 요셉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 자기 민족의 삶의 과정에 배어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선명히 보았습니다. 과거와 오늘의 삶에 배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내 욕망대로 안된다고, 내 뜻대로 안된다고 맨날 불평하고 원망하였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나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존재인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나에게 많은 은혜로 나를 깨우쳐 주고 나의 삶에 간섭해 오셨는지. 아는 것입니다. 예) 모래 위의 발자국

내 삶의 여정에 새겨진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깨닫는 것, 그것이 은혜의 각성이고 그것이 믿음입니다. 요셉은 임종 시에 자신뿐만이 아니라 자기 가족, 민족에게 새겨진 하나님의 손길을 선명히 보았습니다. 당신은 아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당신도 당신의 삶에 배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깨닫도록 마음 열고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둘째로, 요셉의 유언할 때의 모습에서 나타난 그의 놀라운 믿음은 애굽에서의 큰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그 풍요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드라마틱한 삶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큰 풍요의 은혜를 누렸지만, 그러나 그의 중심의 마음은 이 땅에서 하나님이 풍요롭게 하신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매여 있었습니다. 이 정도 놀라운 간증과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으면, 애굽에서 총리가 된 것, 더 이상 소원이 없어라. 하며 온통 마음이 그 즐거움과 감격에 사로잡혀 있기가 쉬웠겠지요.

그러나 요셉의 믿음의 위대함은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서 이처럼 놀라운 축복과 간증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기울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복에 마음이 기울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향한 하나님의 복에 목숨 건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에 목숨 건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돈 버는 것 자체에 마음이 매여 있는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마음이 매여 있습니까? 요셉은 극심한 고난의 한 복판에서도, 더할 수 없는 풍요로움의 한 가운데에서도 그의 중심은 하나님, 하나님의 비전에 매여 있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셋째로, 요셉이 이 놀라운 믿음의 탁월성을 갖게 되는 근거는 이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은 죽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짐을 알았습니다. 믿음의 제일 교과서적이고 명료한 정의는 하나님의 약속, 말씀이 성취됨을 아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큰 맥락에서 올바로 이해하는 모습이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그 언약의 제일 큰 맥락이 메시야 언약이고 그 메시야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11장에서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하면서도 큰 맥락으로 제시하는 것도 이것입니다. 이 믿음의 사람들, 믿음의 계승자들의 믿음의 응답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은 이어져 내려왔고 마침내 성취되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량의 구약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오늘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은,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가 그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자 하는 사실은,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약속, 신약,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끝이 있으며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자는 영생을 누리고 하나님의 천국의 영광과 은혜를 누린다는 이 놀라운 약속,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약속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죽음 너머의 소망, 약속을 믿으십니까? 오늘의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지나치게 현세적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환경의 변화에 따라 마음도 달라집니다. 고난이 오면 불평과 공격적이고 되고 조금 잘 살라치면 오만과 게으름을 여지없이 보이는. 그런 천박한 속을 유감없이 보이기 잘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본질, 진수는 죽음 너머의 소망입니다. 죽음 너머, 영원한 세계에 대한 소망, 내가 가난하게 살든, 부유하게 살든, 내가 살아있을 동안에든, 나는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완성된다는 이 하나님의 비전을 품은 사람들은 오늘의 삶의 환경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비로소 참으로 한결같이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섬기는 믿음의 능력, 비밀을 누립니다.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계승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사망권세를 깨고 죽음을 이기고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천국, 새 하늘과 새 땅의 은혜가 누려지는 것, 죽음 너머의 소망이 구원의 본질입니다.
요셉의 믿음의 하이라이트로 히브리서 기자가 그의 드라마틱한, 아름다운 너무도 아름다운 삶의 믿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유언의 모습을 손꼽은 것은, 요셉은 죽음 너머의 소망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드라마틱한 삶의 과정 가운데, 그의 중심의 마음이 와신상담, 권토중래하여 쨍하고 해뜨는 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매여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자신의 생애에서 그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그는 못봤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은 죽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됨을 보았습니다.

요셉의 아름다운 믿음의 삶이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언제나 죽음 너머의 소망, 나는 죽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된다는 소망에 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믿음과 죽음의 믿음은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당신의 믿음의 초점은 무엇에 있습니까? 요셉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요셉처럼 쨍하고 해뜰날 오겠지, 그 소망으로 열심히 믿어보려고 혹시 무지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요셉처럼, 그가 고난의 한복판에서도, 풍요의 정점에서도 변하지 않는 믿음의 마음, 경배를 드리도록. 하나님의 약속에 당신의 마음을 기울여 보십시오. 이 땅에서의 모습에만 온통 신경 다 빼앗기지 말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살아보십시오.

우리 시대에 예수님은 다시 오실 지도 모릅니다. 혹은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그 놀라운 영광을 못보고 우리는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때이든지 죽어 가는 때이든지, 고난의 한 복판에서든지, 풍요의 복판에서든지,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성취됨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나라의 비젼을 당신의 마음을 매고 살아가십시오. 그 삶이 요셉의 믿음을 닮은 삶입니다. /이덕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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