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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하게 살아야 할 이유 (벧전 01: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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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 우리는 산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삶에 대해서 함께 생각했습니다. 오늘 거룩한 삶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에 처할 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산 소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도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 15절을 보세요.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거룩하다’는 말에는 ‘따로 놓다, 구별되다, 분리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거룩하다’의 의미는 단순히 도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된 우리에게 구별되고 분리된 삶을 요구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믿음 없는 사람들과는 좀 다르게 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분명히 다른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모시고 있고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있다면 우리의 삶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꼭 같을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4절 말씀을 보세요. “이러므로 너희(그리스도인)가 저희(믿지 않는 사람들)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구별되는 두 가지 사람이 누굽니까? “너희”와 “저희”입니다. “너희”와 “저희”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와 믿지 않는 저희의 삶이 결코 같을 수 없고 같아서도 안됩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시면, 우리가 진실로 거듭나 새사람이 되었다면 어떻게 믿지 않던 때 살던 옛사람의 모습이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의 삶 속에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의 삶의 특성과 무슨 다른 것이 있습니까? “뭐, 예수 믿는다는 너나, 믿지 않고 사는 나 나 다를 게 없구나.” 이것이 우리를 바라보는 주변의 믿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이 아닙니까? 아니면 “역시 저 사람은 무엇인가 우리와 다른 데가 있어”라고, 우리의 삶이 확실히 다르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거룩한 삶의 본질인 것입니다.
여기서 “거룩하다”는 것은 도덕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광범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과 다른 삶을 살아가라고 하시는 명령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이방인과 달리 거룩해야 합니까?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할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3절을 보세요.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생각한 바 있는 8-12절에 어떤 말씀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복음을 통해서 구원함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구원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으므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닌 믿지 않는 사람과는 다르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할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통해서 정말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가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거룩한 삶을 살아야 마땅합니다.
사실 오늘날 가짜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교(邪敎)나 사이비 기독교인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에는 다닌다고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많습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을 맡았다고 해서 다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신앙고백이 없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미국 같은 데서는 범죄하고 형무소 안에 들어가면 형무소 안에 목사님이 계시면서 전도하거나 아니면 그 주변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이 시간에 따라 형무소 안의 예배실과 부대 시설에서 신앙 생활을 지도합니다. 그래서 책임진 목사님이 “이 사람은 형무소 안에서 모범적인 신앙 생활을 합니다”라는 추천을 하게 되면 형량이 줄어들고 빨리 출소하는 특혜를 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목사님 앞에서 진실한 모습을 보이고 신앙 활동을 열심히 하는 척하고 말끝마다 주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죄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의 속을 볼 수 없는 목사님이 이런 사람을 모범수라고 추천을 해서 미리 형무소에서 나오게 된다고 합니다.

많은 경우에 형무소 생활을 했다고 하면 그것도 절도, 사기, 살인, 강간 같은 죄를 범한 경우에는 사람들이 일단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되는데, 이런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찾고 거룩한 행세를 해서 자신을 신뢰하도록 한 후에 또 사기를 친다고 합니다.
거룩하게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은 겉모양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보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믿지 않는 사람과 구별되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13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앞으로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거룩하게 살아야 할 것을 명령받고 있습니다.
먼저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 했습니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우리 마음의 집중을 의미할 수도 있고 마음의 훈련된 상태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무엇보다도 ‘활동의 태세’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태세를 갖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허리띠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옷이 내려오기 때문에 편하게 활동할 수 없을 것이고, 힘든 일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옛날 옷은 특별히 길었기 때문에 땅까지 치렁치렁 내려와서 아주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옷을 입으려면 허리띠를 매야 했습니다. 또 사람들이 운동을 할 때나 혹은 먼길을 여행하려 할 때는 이 옷의 끝을 끌어올려서 띠를 단단히 매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허리띠를 동인다는 말은 활동 태세, 준비 완료의 태세를 갖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이 가까우므로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면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다시 말하면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보실 때, 마음에 들어 하실 수 있는 삶을 살려는 준비를 갖추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이 메시지가 더 실감이 났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그들은 유월절 식사를 할 때 허리에 띠를 띠고 급히 양고기를 먹고 밤중에 떠날 준비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허리띠를 맨다는 것은 중요한 일을 할 때, 위대한 과제를 앞에 놓고 삶을 준비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런 태도로 삶을 살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는 우리의 행동 양식을 결정합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삶의 태도를 갖고 사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 태도에 따라서 삶의 모습이 상당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가령 아브라함과 롯의 경우를 보세요. 여러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소망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히브리서를 쓴 이는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브라함의 소망은 하늘에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서11장10절을 보세요.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늘에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이 땅의 것에 별로 연연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롯이 땅을 택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 때에 아브라함은 그의 조카인 롯에게 먼저 땅의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창세기 13장 9절에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즉 아브라함에게는 이 세상에 대한 욕심이 없었습니다. 왜요? 그의 소망이 하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삶의 태도가 아브라함의 삶의 양식을 얼마나 분명하게 결정했습니까?

그러나 롯의 경우는 그와 아주 반대였습니다. 롯은 그의 소망을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롯은 이 땅에서 좋은 것을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어 살았습니다. 그래서 롯은 눈으로 보기에 좋은 곳, 푸르고 물이 많고 숲이 우거진 곳인 소돔땅을 택했습니다. 그는 보이는 것만을 택했습니다. 세상적인 것만을 택했습니다. 그러다가 무서운 유황불의 심판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볼 때 우리의 삶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가치관과 삶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 우리 삶의 양식이 얼마나 달라집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억하고 우리 삶의 태도를 가다듬어야만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십니까?
그것은 누구도 모릅니다. 안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예수님 자신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오십니다. 오늘 오실지도 모릅니다. 만일 우리 주님이 오늘 오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책망이 무서워서 숨어 버릴까요? 아니면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말하자면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어떤 이들처럼 목욕하고 흰옷으로 갈아입고 산골짜기에 가서 기도하는 중에 주님 다시 오실 날만 기다리고 있어야 할까요? 그렇게 기다리던 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를 다 회개하고, 형제와 화목하고, 내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이든지 그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면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시든지 부끄러움 없이 반가이 만나게 될 줄 믿습니다. 허리띠를 동이고 있다가 주님을 반가이 맞이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 맞을 준비하는 사람은 근신해야 합니다. ‘근신한다’는 말은 본래 ‘술 취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대개 술에 취하면 떠들썩합니다. 자제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술에 취하면 절제력을 상실합니다. 술에 취하면 균형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본인은 똑바로 서서 걷는다고 하지만 비틀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신하라’고 하는 말은 ‘조용하라, 절제하라, 균형을 맞추라’는 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근신하며 살아가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근신하는 삶은 조용한 삶입니다. 떠들거나 시끄러운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조용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점령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요단강을 건너게 되고 여리고성을 도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행진은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부과된 여호수아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드러내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왜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조용하라고 명령했을까요?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들에게 말하라고 내버려두면 그들은 성을 돌면서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요? 분명히 그 무리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부정적인 생각을 말로 표현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에 동요되어서 이 행진을 포기하고 이탈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조용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조용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중에 능력을 얻습니다. 마음이 들떠서 흥분하고 당황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무슨 일을 당하든지 조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바로 생각할 수가 있고 힘을 얻을 수가 있고 내 의무가 무엇인지 바로 깨달아서 그것을 꼭 실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조용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참으로 나의 삶의 주인이 되셔서 오늘 내 삶을 다스리시고 내 삶을 지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조용할 때 들려주시고 조용할 때 보여주십니다.

근신하는 삶은 절제하는 삶입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 입니다. 절제라는 말에는 자기 자신을 조정하고 다스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관리하는 것이 절제입니다. 우리의 몸 안에는 여러 가지 욕망과 본능이 있습니다. 이 욕망과 본능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육신을 근거로 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유혹과 시험이 있는데 이것을 잘 이겨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1장 5절 이하에 그리스도인의 품격을 말하면서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더하라”고 했습니다. 옛날 헬라인들이 아덴에 있는 청년들에게 늘 권면한 말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 하나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네 자신을 다스리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전에 플라톤은, 사람이 하는 말과 생활이란 “검은 말과 흰 말이 끄는 수레와 같다”라고 했습니다. 흰 말은 사람의 이성을 의미하고 검은 말은 사람의 욕망이나 본능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이 인생의 수레가 넘어지지 않고 바로 가도록 하려면 흰 말에게 수레를 맡겨 나아가게 해야지 검은 말에게 맡기게 되면 그만 그 수레가 외딴 데로 떨어져 부서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우리 동양의 유명한 성현 공자도 군자유삼계라고해서 군자는 세 가지 경계할 것이 있다고 우리에게 교훈했습니다.
1. 젊어서 혈기 왕성할 때 색을 경계하라.
2. 장년 되어 혈기 강한 때 싸움을 경계하라.
3. 노인 되어 혈기가 쇠할 때 욕심을 경계하라.

그리고 생활에 균형이 있습니다. 근신하는 삶은 은혜를 온전히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은혜를 ‘온전히’ 계속하되, ‘끝까지, 일관성 있게, 인내심을 가지고 온전히 바라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에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주님이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면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할 세 번째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4-15절을 보세요.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성품을 심어주십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 말씀을 보세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아버지께 순종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순종하는 자들입니까?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며 죄사함을 받도록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구체적인 증거는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순종하는 것이 곧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에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했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닮은 모든 자녀들에게 거룩함을 요구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할 네 번째 이유는 그것이 말씀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6절을 보세요.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이 말씀이 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임을 이 구절은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결정하는 최고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에 기록되어 있으면 거기서 우리의 모든 이론이 끝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이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성경에서 “거룩하라”고 했으면 거룩해야 합니다. 다른 이론이 필요 없습니다. 말씀이 최고의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말씀의 권위 앞에 순종해야 합니다. 목사도 이 말씀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 말씀만이 최고, 최후의 권위입니다. 교회의 법이나 규칙, 신도도 모두 하나님의 말씀 앞에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기록하였으되.” 사람들의 모든 주장과 철학은 여기서 끝납니다.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그러면 우리는 거룩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습니까?
바로 이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7절에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시편 119편 9절을 보세요.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할 다섯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7절을 보세요.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우리의 아버지는 외모가 아니라 행위를 따라 정확하고 진실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동안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의 삶은 나그네의 삶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그렇게도 사랑했던 사람들이 훌쩍 떠나가는 것을 보세요.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 나그네의 삶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두려움’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공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경건한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의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모든 것을 계산하고 모든 것을 셈해야 할 판단의 날이 반드시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외모로 판단합니다. 심지어 어느 회사에서는 신입 사원을 모집할 때 그의 출신 학교나 성적은 말할 것 없고 가정의 형편을 다 조사해서 적격 심사를 하고, 면접을 할 때는 생김새까지 뜯어보기 때문에 남자가 성형수술을 한다는 말도 들립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어떤 칭찬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외모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상당한 호평을 받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사는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굉장히 좋게 비쳤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숨은 동기를 보십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 말씀을 보세요.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산 소망이 있습니까?
또한 우리는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왜요? 우리는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디시 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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