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믿음과 사랑으로 삽시다 (벧전 01:18-25)

첨부 1


베드로전서는 고난을 어떻게 이길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첫 시간에는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에게 살아 있는 소망을 가지게 하셨으므로 고난 속에서도 우리가 산 소망을 누리는 삶을 살게 하신 것을 생각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이 고난 속에서 주께서 우리의 인격을 만드시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신 주님을 닮은 거룩한 삶을 살아 가기를 기대하신다고 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은 이 고난 속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은 우리 주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
믿음의 삶은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입은 사건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 교회 의식에 참여할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을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을 맡음으로 믿음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체험할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속함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 18절을 보세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구속되었다고요?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 ‘망령’이란 말은 본래 달성할 수 없는 것을 성취하려는 헛된 행위를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 베드로는 이 망령된 행실을 가리켜서 우리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본래의 삶의 모습은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성취하려는 공허한 행위, 다시 말하면 인간의 무의미한 행동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망령된 행실입니다. 세속적인 행복의 추구가 그런 것입니다. 잡히지 않는 행복, 얻을 수 없는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해서 그 행복을 찾아 헤매는 모든 것은 한마디로 망령된 행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므로 이 망령된 행실에서부터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런 행위를 거듭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삶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 참된 목표를 향해서 주 안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가면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허무한 것, 우리를 정말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못할 것을 마치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노예된 상태에서부터 풀려났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 ‘구속’이라는 말이 몇 가지 다른 의미로 쓰여졌습니다.
우선 ‘노예를 사려고 시장에 들어간다’는 뜻이 있습니다. 옛날 로마에는 노예가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살고 있었던 이 시대에 로마에 무려 5천만 명의 노예가 있었습니다. 이 숫자는 엄청난 숫자였습니다. 이 노예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잔인한 학대와 고문을 받으면서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노예들이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예를 자유케 해주기 위해서는 먼저 노예를 매매하는 노예 시장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구속’이란 말 속에는 ‘대가를 치르고 노예를 시장에서 끌어낸다’는 뜻이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주신 말씀에서 사용된 ‘구속’이라는 말은 이 비싼 값을 주고 산 ‘노예에게 새 주인이 자유를 선언한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노예를 자유케 하기 위하여 대가를 지불하고 산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있는 곳은 곧 노예 시장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요한복음 8장 34절에서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유를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께는 모든 인간이 죄의 종으로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했으면 죄의 노예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말을 구체적으로 디도서 3장 3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예수 믿기 전의 우리의 상태, 그리스도 이전의 우리의 죄인 되었던 상태를 얼마나 신랄하게 묘사했습니까? 우리도 전에는 그랬었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정욕이나 행락에 종노릇했습니다. 잘못된 방법으로 잘못된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온갖 부도덕한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욕심에 매여 있었습니다. 종노릇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부자유보다 훨씬 더 심각한 부자유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가장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바로 이 죄악의 노예였던 자리에서 구속함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속을 하려면 반드시 값을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무엇으로 값을 치르셨습니까? 금이나 은으로 지불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 은이나 금은 화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실 때 돈보다 훨씬 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인데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였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9절을 보세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보배롭다’는 말은 아주 값이 비싼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보다 더 비싼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값없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다 보면 자칫 오해하기 쉽습니다.
물론 우리는 값없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을 보세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사야 55장 1절을 보세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값없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값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값을 지불했습니까? 우리가 값없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값없다’는 말과 ‘값싸다’는 말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비싼 대가를 지불하셨습니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의 생명을 지불하셨습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지불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창세기 22장 13절에 보면 이삭 한 개인을 위해서 양 한 마리가 죽었습니다. 그 양이 희생의 제물로 바쳐짐으로 이삭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개인을 위해서 한 마리의 양이 죽었습니다.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유월절에 한 가족을 위해서 양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이삭의 경우에는 한 사람을 위해서 양 한 마리가 희생되었지만 이번에는 한 가정을 위해서 양 한 마리가 죽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대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한 민족을 위해서 양을 잡았습니다.
이처럼 속죄양의 범위가 성경에서 점진적으로 넓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 마리의 양이 개인을 위해서, 그 다음에는 가정을 위해서, 그 다음에는 민족을 위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역사를 시작하기 위해서 요단강 저편에 나타나셨을 때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향해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온세상의 죄를 위한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온세상을 위한 어린양이 되시기까지 성경은 그 진리를 우리의 깨달음을 따라 점진적으로 계시합니다. 한 마리의 양이 개인을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그리고 한 민족을 위해서, 그 다음에는 온세상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희생이 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몸을 마지막 제물로 바침으로, 그분이 흘리신 그 보혈의 그 귀한 대가로 우리를 사 주셨습니다. 죄의 노예된 자리에서 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유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왜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저주를 다 짊어지시고 대가를 다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20절을 보십시오.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구원의 영광스러운 계획은 어느 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궤도수정을 해서 갑자기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창세 이전부터 세워졌던 계획입니다.
주께서는 우리 인간의 범죄를 아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어린양, 하나님 아들의 희생 사건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이 놀라운 계획을 작정하셨습니다. 때가 찬 것을 그분이 보셨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드리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로 이 말세에 우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말세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말세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시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를 기준으로 해서 성경 말씀을 뜯어 맞추려 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말세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말세의 현상들이 이 시대에 모두 다 이루어질 일로 잘못 생각하고 무리하게 성경 말씀을 조립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것은 바른 것은 아닙니다. 성경상의 ‘말세’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부터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이미 말세가 시작되었습니다. 만일에 우리 시대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이 시대가 말세지말(末世之末)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이 역사를 완성하시기 위해, 놀라운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행하시게 되신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21절에 뭐랬어요?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습니다. 그러면 참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바야흐로 고난과 박해가 찾아오고 있는 시대 속에서 살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베드로전서가 쓰여졌다는 것을, 그 역사적인 환경을 잊지 마시고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세요. 그렇게 되면 이 말씀의 의미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이 오지만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습니까? 그분의 목숨을 바치시고 그 보배로운 피를 흘려서 나를 구원해 주셨는데 그 예수님을 끝까지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둡시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함을 받고, 그 주님을 믿고, 그 주님을 통해서 나에게 계시된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이제 오늘 주신 22-25절까지의 말씀은 사랑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 22절을 보세요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우리는 이렇게 형제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형제가 되었습니까? 23절을 보세요.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적인 어머니는 누구입니까? 말씀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를 통해서 우리를 낳아 주신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자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23절) 했습니다.
성령이 산파 역할을 해서 우리를 낳을 수 있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이 말씀 없이는 우리가 거듭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시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성령이 내 마음을 두드리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는 말씀 앞에 마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신뢰했습니다. 그 순간에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에베소서 2장에 보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거듭나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거듭남’이란 것은 단순한 도덕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신분의 변화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에게는 어떤 증거가 나타납니까?
그 하나는, 진리를 순종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전부 순종하고 살지는 못하더라도 참으로 진리를 순종하며 살아가려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중생한 증거는 진리에 대한 순종입니다. 22절에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복음에 순종한 것입니다. 진리를 순종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그때부터 진리에 대한 순종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8절에 보면 야고보는 우리를 낳은 것, 우리를 거듭나게 한 것은 바로 진리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3-24절을 보세요.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했습니다. 새사람은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만들어져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진리를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또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에게는 형제를 사랑하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쓸 때 아주 탁월하게 사용했습니다. 22절을 보세요.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여기서 ‘사랑’이란 말이 두 번 나오는데 그 두 단어가 각각 다릅니다. 처음에 나온 사랑은 ‘필로스’이고 나중에 나온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형제를 사랑하는 필로스의 사랑으로부터 시작해서 마음으로 뜨겁게 아가페적인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은 발전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나 새사람으로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면 발전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헬라어에서 ‘사랑’이라는 말은 그 성격에 따라 몇 가지가 있습니다. ‘에로스’는 성적인 사랑이요. ‘스토르게’는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이요 ‘필로스’는 형제, 친구의 사랑이요. ‘아가페’는 성화된 사랑을 말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완전히 조건을 뛰어 넘습니다. 조건 없이 사랑하고 자신의 전부를 주고 상대방의 유익을 참으로 구하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은 끊임없이 아가페를 지향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주신 말씀을 다시 보세요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이 말씀 안에 사랑의 종류 몇 가지가 나옵니다. 처음에 나오는 사랑이 필로스, 우애적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처음부터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친구를 사랑하는 것, 우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 사랑이 성화되어 나가기 위해서는 오늘 주신 말씀처럼 거짓 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오는 사랑이 아가페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노력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가페적 사랑을 지향하고 추구하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읽다 보면 21절 하반에 ‘믿음과 소망’이란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22절에 ‘사랑’이란 말이 나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사도 베드로는 고난 속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아 가는 삶을 우리에게 격려하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 이 세 가지가 없으면 우리의 삶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4절 이하에도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했습니다.
히브리서에는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 하는 것이니라”(히 6:10-12) 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2-24절에도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에 보아도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했습니다. 또 데살로니가전서 5장 8절을 보세요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고 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곳곳에서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베드로전서 1장의 이 영광스러운 장을 통해서 고난을 이야기하고, 이 박해와 고난을 대비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교훈했습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무엇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어떤 고난이 기다리고 있느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러한 상황 중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고, 소망으로 살고, 그리고 성도들 간의 뜨거운 사랑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고난에 처한 시대를 향한 사도 베드로의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고 있던 위기와 박해, 그리고 고난을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형태를 달리한 고난, 박해, 위기가 오늘 우리 삶 속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합니까? 나 위해 보혈 흘려 구속해 주신 그 예수님을 믿고, 주께서 나 위해 하늘나라에 예비하신 영광스러운 소망을 바라보면서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믿음의 형제들끼리 뜨겁게 사랑하면서 살아 갈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고난 속에서도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루하루의 삶을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으로 살게 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