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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벧전 0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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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베드로전서 1장을 통해서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살펴봤습니다.
이제 베드로전서 2장에서는 고난의 모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의 모본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 속에 고난이 찾아 올 때 이 고난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모본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베드로전서 2장 1-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1-3절에 보면 그리스도인의 성숙한 삶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오늘 주신 말씀 2절을 보세요.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아마 신앙의 성숙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예수님의 제자 중에 가장 뼈저리게 체험했고 가장 실감나게 교훈할 수 있는 제자는 베드로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베드로처럼 자주 넘어지고, 베드로처럼 자주 실패하고 베드로처럼 자주 침체에 빠졌던 제자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신앙의 성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알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베드로서를 끝마치는 마지막 절인 베드로후서 3장 18절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사도 베드로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한 것은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라야 합니다. 신앙이 성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이 자라나지 못하는 성도를 보세요. 얼마나 답답합니까? 여러분, 신앙이 자라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면 신앙이 자라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 1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시말해 1-2절에서는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 세 가지를 말씀한 것입니다. “버리라. 사모하라. 그리고 자라나라.”

우리의 신앙이 자라기 위해서는 우선 버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들로 우리의 신앙이 자라는 것을 저해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악덕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입니다. 이런 것들을 버리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질 수가 없습니다.

악덕이 무엇입니까? 부당한 방법으로 성취하려는 욕구가 곧 악독입니다. 남을 해치려는 심사, 자기만 차지하려는 심사를 가리킵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악독한 사람의 전형이 나옵니다. 그는 성령의 권능을 돈을 주고 사고자 했습니다. 그가 바로 시몬이란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뭐라고 말했습니까? 사도행전 8장 22-23절에 보니까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시몬이란 사람은 잘못된 방법으로 자기 욕구를 성취하려 했고 자기가 독점하고, 남이 잘못되기를 원했습니다. 베드로는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악독이 가득하다.” 오늘 주신 말씀에도 같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모든 악독을 버리라” 했습니다.
그리고 궤휼이란 것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거짓되고 간사한 말을 하는 속임수를 말합니다. 이 말 속에는 남을 해치려는 동기가 숨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4절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의 ‘궤계’라는 말이 ‘궤휼’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 말속에는 남을 해치려는 동기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해치려고 그들이 궤계를 꾸민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러한 궤계를 버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외식입니다. 외식이라는 말은 본래 가면이란 말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가면을 쓴 배우들의 태도를 가리킬 때 외식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위장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외식을 버리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에서 외식이란 말은 특별히 진실한 동기나 의욕이 없이 말을 해서 실천이 안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삶의 태도에 빠져 있는 사람을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이였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서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외형적으로는 얼마나 잘 꾸미고 있었습니까? 거룩한 예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속은 썩었으면서도 겉만 꾸몄습니다. “회칠한 무덤 같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속에는 썩을 것, 냄새 나는 것이 가득 찼으면서도 겉은 위장하는 것을 가리켜 외식하는 사람들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이 외식을 버려야 성장한다고 사도 베드로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엔 시기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잘 되는 것에 대해서 배 아파하는 것을 시기라고 합니다. 고의적으로 진실을 왜곡해서 다른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생각,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축복을 보고 그 사람의 진실을 왜곡해서 그 사람을 곤란한 처지에 빠뜨리려는 발상, 거기에서 시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5장 10절에 보면 대제사장들이 자기들의 시기로 예수를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주었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전능과 예수님의 영광을 좇을 때, 대제사장들은 주님을 시기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시기를 버리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과 인격이 자랄 수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비방하는 말은 어떻습니까? 비방하는 말이란 뒤에서 중상하는 말을 의미합니다. ‘비방하는 말’이란 헬라어는 ‘-아래서’ 라는 말과 ‘말’ 이라는 두 낱말이 합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명예나 인격을 계속 손상시키는 말을 뒤에서 하는 것, 그것이 곧 비방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마지막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가족의 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러나 조금 전에 말씀드린 악독, 궤휼, 외식, 시기, 비방하는 말 같은 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의 아름다운 교제가 파괴되고 인격의 성숙이 저해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런 것들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사모하라는 말입니까?
2장 3절 말씀에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란 무엇입니까? 말씀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인격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젖을 먹어야 아이들이 자랍니다. 아이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기만 아는 이기심입니다. 그런데 우리 심령이 어린아이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자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만일에 어린애가 젖을 사모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아이에게 식욕이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아이가 병들면 식욕이 없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병이 들면 말씀에 대한 식욕이 없어집니다. 여러분, 말씀을 정말 사모하십니까? 어떤 교인은 말씀을 사모하지 않습니다. 성경책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모양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말씀에 대한 식욕이 없으면 내 심령이 병들었다고 해도 될 것입니다. 우리자신을 진단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다른 것을 먹기 때문에 식욕이 없어집니다. 사탕이 입에 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탕만 계속 먹으면 정상적인 식사가 잘 안됩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게 되면 반드시 동반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이 싫어지고 말씀을 가까이 하고 싶은 열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거듭났습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었습니다. 더욱이 우리의 새생명이 자라게 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버리고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그렇게 갈급한 마음으로 말씀을 찾고 계십니까?

그리고 3절을 보세요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셨습니까?
어린아이가 엄마의 젖을 처음 한번 맛보면 그 다음부터는 정신없이 빱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시편 34편 8절 말씀에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셨습니까? 그리고 주님의 말씀의 맛을 아십니까? 말씀의 맛을 아는 것으로 신앙의 성장도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도가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자기 신분을 알아야 그 신분에 합당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세 가지로 말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4절을 보세요. “사람에게는 버린 바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그런데 베드로는 우리가 산 돌이라는 것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이 산 돌이라는 사실을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택하심을 입은 산 돌이십니다.
그런데 5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도 산 돌같이.” 우리가 예수님처럼 모퉁이 돌이나 반석은 아니지만 신령한 집을 짓고 있는 하나의 돌이 된 것입니다. 거룩한 성령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거룩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본래 제사장이란 말에는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중보자’라는 말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이나 제사장들을 통하지 않고서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곧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중보자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제사장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들이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주장한 이론 중에 ‘만인 제사장설’이 바로 그것입니다. 제사장에게는 특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제사장에게는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따라서 제사장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무슨 책임이요? 제사를 드리는 책임입니다. 그러면 어떤 제사를 드려야 합니까? 우리가 잘 아는 로마서 12장 1절 말씀을 보세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 이하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고, 찬양을 드리고,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눠주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제사’라는 말에는 ‘드린다’는 의미가 있는데 몸을 드리고, 찬양을 드리고, 재산을 나눠주는 구제와 선행의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의 특권을 포기하지 맙시다. 9절을 말씀 보니까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거룩한 나라의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한 시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특권을 누렸습니까?
신약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은 “택하신 족속”이라는 성경 구절을 붙들고 “택하신 백성(chosen people)”이란 한국 백성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특정 민족을 지칭한 것은 아닙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시작되었던 이 택하심의 역사가,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까지 이르러 그들이 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성경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
여기에서는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장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만 제사장 나라라고 말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말합니다. 신약에 속한 모든 공동체,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또한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이 약속이 신약에 와서 누구에게 적용되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5절 이하의 말씀을 보세요.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계 1:5-6a).
여기서 말씀한 ‘우리’라는 말이 하나님 나라의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국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없는 나라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한 부분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거룩한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일곱 가지 거룩한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로, 거룩한 소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주심으로 또 이스라엘 민족을 불러 주심으로 그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그들을 거룩하게 부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에게는 거룩한 소명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 음성을 들으십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여러분은 이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을 듣고 나오셨습니까?
“다 내게로 오라.” 거룩한 부르심을 듣고 주님 앞에 와서 주님을 신뢰함으로 우리는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 거룩한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이곳까지 나오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거룩한 나라가 되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도 거룩한 나라, 영적인 이스라엘,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의 한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20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우리는 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국적을 가지고 있고 하늘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로, 거룩한 음식을 먹습니다.
하늘나라의 백성인 우리는 거룩한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구약 레위기 11장에 보면 “-은 먹지 말라”는, 음식에 대한 금기 사항이 세밀하게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거룩한 음식을 먹도록 요구하셨습니다. 왜요? 우리는 거룩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약적으로 적용시킨다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엇을 먹어야 합니까? 다름 아닌 “말씀”입니다. 말씀은 거룩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책이라고 아무 책이나 볼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도 천박하게 여기는 삼류 잡지만 붙들고 있으면 그런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거룩한 사람은 거룩한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넷째로, 백성은 거룩한 의복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이 거룩한 의복을 입도록 옷에 관해서 세밀하게 지시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민수기 15장 37-39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쫓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들이 특별한 의복을 입고 다님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시를 내도록 하셨습니다.

옷은 사람의 신분을 말합니다. 군인은 군복을 입습니다. 경찰은 경찰복을 입습니다. 간호사는 간호사의 제복을 입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예수 믿는 사람만 입는 옷을 입고 다닌다면 그 옷을 입고 죄짓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사실 의복이 우리를 보호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구약에서 외적인 성결을 강조하였던 하나님께서 신약 시대에 와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내적인 성결을 강조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의복을 통해서 그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의 방식을 가졌던 것처럼,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의 모습을 나타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예복, 빛의 갑옷,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고 살아가야 합니다.

다섯째로, 거룩한 혈통이 요구됩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하는 것 중에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이방인들과 결혼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거룩한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그의 백성의 성별된 삶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가령 우리가 인간 편에서 볼 때 상대방을 반드시 복음화시킬 수 있는 준비와 능력이 있다면 불신자와 결혼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멀리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가 영향을 주기보다 영향받을 가능성이 더 많아서 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의 특색을 잃어버릴 것을 주께서 염려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혈통을 요구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성별에 대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6. 거룩한 땅을 받았습니다.
하늘나라 백성인 우리는 거룩한 땅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거룩한 땅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러면 오늘 우리가 서 있어야 할 거룩한 땅은 어디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언제나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이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릅니다.

7. 거룩한 성전이 주어졌고, 거룩한 제사가 요구됩니다.
성전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 하나님 앞에 항상 제사를 드립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거룩한 삶의 예배가 우리 생활 한복판에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제사장으로 삼으시고 거룩한 나라의 시민으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를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내어 신기하고 영광스러운 빛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신 그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9절).
전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나를 어두움에서 빛 가운데로 옮겨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생명으로 옮겨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신 이유는 이 주님의 은혜와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벅찬 감동으로 10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감사합시다. 찬양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신분을 확인합시다. 그래서 우리 신분에 합당하게 사십시다. 말씀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에 대한 응답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이 말씀을 통해서 어떤 부분이 내 삶과 내 인격과 내 생활 속에 도전이 되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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