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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벧전 0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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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2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 생각한 1-10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오늘 생각하게 되는 11-25절은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세 가지 중요한 생활 양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11-12절 말씀을 보세요.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우리의 복음 전하는 생활은 곧 나그네와 행인 의식을 갖고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 나그네와 행인 같은 삶에 대해서는 히브리서 11장에 더 잘 나타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 이하에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신앙의 삶의 모습을 말하면서 나그네와 행인 같은 성도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받을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신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히 11:8-13).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순서를 자세히 주의해 보세요. 먼저가 외국인이고 그 다음이 나그네입니다. 먼저 외국인이 되어야 그 다음에 나그네가 됩니다.
그 다음을 계속해 보세요.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을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 11:14-16)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순간 하늘나라의 시민이 됩니다. 이 땅의 삶이 전부인 것으로만 알고 살아가는 믿음 없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가 아닙니다. 이 땅의 삶이 그들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갖고 영생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는 순간부터 이 땅에서 나그네가 됩니다. 그리고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나그네가 나그네다운 삶을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세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1. 육체의 정욕을 버려야 합니다.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우리 속에는 우리 영혼의 거룩한 욕망과 대적하고 있는 부패한 욕망이 있습니다. 이 부패한 욕망을 어떻게 다스려서 우리 영혼이 찾고 있는 그 거룩한 본향을 향해서 계속 나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에 나그네 생활의 성패가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대적은 사실 우리 안에 있습니다. 무디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바로 이 무디입니다.” 옳은 자기 발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영혼의 거룩한 행진을 방해하고 있는 우리의 내적인 욕망을 다스리고, 마땅히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면서 주께서 우리를 향해 보여주신 그 영광스러운 삶의 목표를 향해서 계속 발걸음을 옮겨 나갈 수가 있습니까?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성패가 달려 있습니다.

2. 선한 행실에 힘써야 합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여기서 ‘선한’이라는 말은 ‘보기 좋은, 가치 있는, 덕스러운’이란 뜻을 가진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하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올바른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방인들이 내 삶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항상 의식해야 합니다.
요사이는 어디 가나 외국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런 일이 없지만, 예전에는 외국인 한 사람이 지나가면 그 사람을 얼마나 주목했었습니까?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목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이웃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3.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별되게 살면 그들의 눈동자는 계속 우리에게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데 따라서 그들이 주님 앞에 올 수도 있고, 주님에게서 멀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의 삶을 지켜보면서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나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이끌림을 받고자 하는 열망을 보입니까? 아니면 나 때문에 그리스도로부터 아예 돌아서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삶의 간증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여러분, 불신자들의 웬만한 실수는 실수로 여겨지지 않지만 신자들의 실수는 얼마나 크게 부각시킵니까? 그러므로 항상 선한 일에 힘써, 불신자들이 보고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는 날에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권고하시는 날”이란 문자대로 말하면 “하나님이 방문하시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심방하시는 날, 이 날은 어떤 날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긍휼과 사랑으로 사람들을 방문하실 수도 있고 정의의 칼을 가지고 사람들을 방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 “권고하시는 날”에 대해 성경학자들 사이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불신자들이 구원받는 날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해석이 다 타당성이 있습니다. 이 “권고하시는 날”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두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시편 106편 4절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하사.” 여기서의 “권고”는 구원의 문제와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불신자의 영혼을 권고하십니다. 그래서 그가 구원받는 날은 하나님이 방문하신 날입니다.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날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러니까 불신자 한 사람이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참 아름다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것이 은연중 그 사람에게 영향을 끼쳐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다면 그는 누구를 생각하겠습니까? 나를 생각할 것입니다. “저 사람 때문에 내가 구원받아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선한 삶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권고하시는 날”이란 이처럼 하나님이 긍휼하심과 사랑으로 어떤 영혼을 권고해서 구원받게 하시는 날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44절을 보세요.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말하는 “권고받는 날”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서는 ‘심판의 날’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의를 가지시고 인간을 방문하시는 그날,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를 시행하시기 위해서 역사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그날, 심판의 그날,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는 날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이루어지는 그날에도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구원받아서 저 무서운 심판을 받지 않게 된 것은 어느 그리스도인의 선행 때문이지. 그 선행에 내가 감동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고 주님 앞으로 나오게 되었지.”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선행의 삶은 심판의 그날에도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2절을 다시 보세요.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직장에서 가정에서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간증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말로 아무리 전도해도 우리의 삶이 그 말을 뒷받침해주지 못하면 우리가 전하는 그 메시지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삶이 우리가 말로 하는 전도에 얼마나 큰 능력을 부여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여기서 사도 베드로는 새로워진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도하기에 합당한 생활, 믿지 않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복음 전도의 생활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3-18절은 그리스도인의 순종하는 생활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두 가지 사회제도에 대해서 말씀하는데 하나는 정부 또는 국가이고, 또 하나는 직장입니다.
18절 말씀을 보세요.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 당시의 사환과 주인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이것을 오늘의 상황으로 말하면 고용인과 고용주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순복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말씀에 동의하거나 안하거나 성경은 이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순종해야 되냐구요? 13절에서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순종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동기는 어떤 지도자에게 아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주를 위해서”입니다. 어떤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입니다.

말씀을 계속해서 보세요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13b-14절)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정치적인 지도자들과 정부라는 제도를 인간에게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서 보면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고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훌륭한 정부, 훌륭한 정권은 얼마나 악을 징벌하고 의를 세우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렇게 하는 정부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정부입니다. 그런 정부가 바람직한 것이고 우리는 그런 정부가 세워지도록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과거 30여년 간의 군사 독재 정권과 같은 민족의 암흑기가 되풀이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이 말씀은 우리가 정치 지도자에게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권위에 순복하는 삶을 배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 순복의 삶의 모습을 배우지 못할 때 우리 사회의 모든 질서와 제도는 파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어디까지나 질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사회 질서의 구원도 결국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직면하는 문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은 권력이나 권위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 권력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이 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에게 권력자들이 “전도하지 말라”고 명했을 때 전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오히려 당당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그리고 그는 하나님 말씀 순종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처럼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될 때는 언제나 더 높은 권위이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위에 있는 지도자들이나 권세자들을 향해서 때로 명확하게 “그것이 아니오”라고 선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제도 자체를 거부하거나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옥에 수감되는 판결을 받았을 때에 그 판결에 말없이 그대로 따랐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어떤 사실 앞에 “아니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사실 지도자에 대한 불복종이 아니라 더 높으신 하나님의 권위 앞에 복종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상황 속에서도 순복하는 자세만은 흐트러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부모가 나에게 도무지 몰상식한 요구를 했을 때 그대로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해치게 되므로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만은 제가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부모님의 말씀을 언제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십시오”라는 순종의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가 나에게 어떤 처벌을 내리든지 그대로 받아들일 때 나는 불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도 그 자체를 부인하지 않고 우리의 신앙 양심을 지키면서도 언제나 순복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변함없는 진리인 것입니다.
다니엘서 3장을 보세요.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에게 우상 숭배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상 숭배를 강요하는 느브갓네살 왕 앞에서 “아니오”라고 분명히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그들을 풀무 속에 집어넣을 때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누가 지켜 주었습니까? 하나님이 지켜 주셨습니다. 모든 역사의 처리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설 줄 아는 삶의 태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정부가 잘못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로서 예언자적 양심의 발언이 우리에게 마땅히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제도나 체제를 부인하자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복음적 그리스도인들은 순복의 자세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도 베드로가 살고 있던 그 시대의 로마 황제나 정부도 좋은 왕이나 좋은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여전히 성령의 붙들림을 받아서 권력에 순종할 것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부가 아니라 직장이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8절을 보세요. “사환들과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나에게 잘해주고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존경할 만한 주인들에게만 순복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했습니다. 까다로운 주인, 나를 못살게 굴고 사사건건 간섭하는 까다로운 상사에게도 의연히 순복하는 자세를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쫓겨날까 두려워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월급을 더 받기 위해서 아첨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다 주님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최선의 시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고난을 딛고 승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9-2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니” 했습니다. 여러분, 애매하게 고난을 받은 일이 있습니까? 애매하게 억울한 누명을 쓰신 일이 있습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그런 경험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20절을 보세요.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고난을 딛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인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억울한 일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때에도 우리는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6절 이하의 말씀을 보세요.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6-19).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내가 하겠다고 나서면 하나님에 대한 월권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 일을 하시도록 기회를 드리세요. 그래서 인내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21절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크게 하였느니라” 했습니다. 토마스 아 켐퍼가 쓴,「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중요한 일이니까?
여기서 “본”이라는 말은 ‘아래서 열심히 베낀다’는 뜻입니다. ‘그대로 베낀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삶을 그대로 베껴야 합니까? 예수님의 삶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자기 부모를 모방합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도 마땅히 하나님을 모방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애매히 고난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애매히 고난당하는 사람의 사정을 잘 아십니다. 애매하게 고난당하는 때가 주님에게 가장 가까워지는 때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그럴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22절에 보세요. “저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했습니다. 내가 억울하게 고난을 받을 때, 그에 대해 반응을 잘못해서 분에 못 이겨 날뛰면 나도 범죄하게 됩니다. 범죄는 한 사람으로 족합니다. 상대방이 죄를 범했다고 같이 범죄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애매히 고난을 받으셨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우리 지체 가운데 제일 먼저 활동하는 부분이 어디입니까? ‘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억울하게 애매한 일을 당하시면서도 그 입에 궤사가 없으셨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53장 7절을 보세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도다” 했습니다.
오해받고 괴로운 일을 만날 때 최선의 삶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침묵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을 생각해 보십시오. 억울한 일을 당하시면서도 아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거리를 걸으시던 주님의 침묵을 생각해 보세요. 그 입에 궤사가 없으셨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23절에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했습니다. 주님도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욕하지 않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하나님 앞에 부탁해야 합니다.

끝으로, 24-25절에 보면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했다고 했습니다. 애매한 고난을 받는 중에서도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상대방의 유익을, 이웃의 유익을,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셨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24-25절을 보십시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생명, 치유, 구원’이란 말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애매한 고난받으실 때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치료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도 사람 앞에서 어떤 수모를 당하든지 계속해서 하나님이 사랑하신 영혼들을 사랑하며 목자 되신 주님에게 돌아올 수 있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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