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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로 생각나게 하노라 (벧후 0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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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잊어버리는 동물입니다. 지난날에 끔찍스러운 사고가 있어서 수많은 인명의 피해를 입었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하고 기억이 희미해집니다. 잊어버려서 그럽니다. 좋은 것, 고마운 것은 더 잘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내려오는 말에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잊어버려야 될 것은 빨리 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시편 103편에 보면 다윗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하나님의 은택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감사할 수 있고 그 은혜에 보답하려는 헌신과 봉사가 있게 됩니다.
우리는 처음에 믿었던 것들을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오늘 주신 말씀에서 그들이 마음속에 새기고 간직해야 할 것을 다루고 있는데, 이것이 그가 글을 쓴 목적이고 자기가 언급한 사실들을 거듭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생각해 볼 때 그의 특유한 강조나 메시지뿐만 아니라 많은 일반적인 원리들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일입니다. 가령 우리의 기억력에 관한 말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의 특징 중에서 망각하려는 경향보다 더 두드러진 것이 있을까요?
우리는 사람들을 아주 쉽게 잊어버립니다. 어디서 한두 번 만나 인사를 나누었지만 곧 잊어버립니다. 또는 어떤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를 결코 잊을 수 없고 영원히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 같고 우리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곧 잊어버립니다.
때로는 “세월이 약이라”는 말을 하는데, 이것도 우리가 언제나 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말일 뿐입니다. 우리는 중요하고도 흥분된 순간들마저도 이런 식으로 잊어버리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개인 생활에서도 그렇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맹세하는 것이나 서약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을 겪고 난 후에 우리는 흔히 맹세나 서약을 합니다. “이제부터는 이런 방법, 이런 태도로 살기로 맹세했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맹세나 서약, 혹은 엄숙한 선서를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예전에 살던 그 자리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런 경험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잊어버리고, 잊어버려야 할 것은 잊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괴로운 일이지만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안다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강조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2절을 보세요.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이 점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을 우리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항상 위험한 일입니다. 안다고 해서 기억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는 것과 기억하는 것은 다릅니다.

학생으로서의 경험이 있으신 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어느 날 여러분이 강의실에서 선생님의 강의를 듣습니다. 강의를 들을 때 여러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 저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다 압니다.” 그래서 이 강의 내용을 노트에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몇 달 후 시험을 볼 때 바로 그 문제를 푸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 강의를 들었고 이 주제에 대해서 읽었다는 것도 생각이 납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알기는 하지만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도 사도 베드로가 마음에 품고 있던 것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원리를 알고 있지만 알고 있는 것만큼 실생활에서 실천하고 활용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도덕적 기준은 알고 있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잘된 것이라고, 그러니까 알고 있기만 하면 실천을 다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끔 죄가 우리를 유인한다는 것이 위험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선한 것을 안다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데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선을 행한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원리를 발견합니다. 사람들이 기억 속에서 살기를 바란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깨닫기 어려운 위험입니다. 이 말씀이 뜻하는 것은 어떤 원리가 우리 마음속에 생생하게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이 기억을 회상하고, 그런 기억 속에서 살고, 기억에 힘입어 계속 살아갈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 속에 살 수는 없습니다. 기억만으로도 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있는 것입니다. 과거 속으로 거슬러 가서 살려고 하는 것은 현재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없습니다.
기억이나 추억 속에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은 뒤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가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추억 속에서만 살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부분이 있거나, 아니면 그 자체가 전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베드로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우리가 추억 속에 살도록 하기 위해서 이 사실을 일깨워 준 것이 아니라 이 원리가 우리 마음속에서 활발하게 작용하고 이것에 의해서, 또 우리가 이것으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과거 속에 살고, 과거 속으로 이끌려 가라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주시는 원리에 의해서 현재를 살아가라고 하는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 속에서 또 다른 중요한 중심적인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예, 그 말씀을 제가 압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는 “아니다. 너희는 그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단 하루도 거르지 말고 이 사실을 명심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가 계시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바로 그 주님과 우리는 날마다 같이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명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런 원리를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이 원리가 단지 기억이라는 것으로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 원리를 실제 우리 생활에 활발하게 적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가 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막연하고 애매모호한 일반적인 진술에 그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 중심 사상을 반복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복음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세상 사람들은 복음보다도 정치, 경제, 문화, 사회여건, 같은 데 관심을 갖습니다. 어떤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는 막연하고 일반적인 말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일은 사람들이 자주 잊어버리는 이런 것을 계속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상기해야 합니까? 무엇보다도 생활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복음에서는 인생의 위대함과 영광스러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인생들은 저속한 방법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일 죽을 것이므로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는 말을 합니다. “인생이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도 합니다. 그들은 지혜의 정수란 인간이 그가 할 수 있는 한 지혜를 최대한도로 이용해서 무엇인가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인생은 위대하고 훌륭하고 커다랗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한 성경의 말씀은 영혼에 대해서 한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난 것을 보면 인간은 하등동물에서 진화된, 생각하는 동물에 불과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특별한 창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고 모양을 지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위대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절망과 비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개인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물로서 인간이 위대하고 위엄있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이 품고 계신 생각과 인간을 위한 그의 방법, 그리고 계획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는 매우 흥미 있는 방법으로 우리의 삶의 본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3-14절을 보십시다.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 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우리 삶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우리가 잠시 거주할 집이나 장막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한 사도가 이것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요한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사 우리와 함께 잠시 거주하셨다고 말합니다.

육신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일종의 장막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곳은 우리가 영원히 거주할 곳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육체를 동일시하는 것은 비극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생명은 단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는 이 세상에 보내져서 잠시 동안 이 거주지에 머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임시 체류자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머물고 있을 뿐입니다.
인생은 하나의 순례이고, 인간은 순례자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여행하면서 하룻밤을 지내는 일종의 여관과 같은 곳입니다.우리는 이 세상에 왔습니다. 하나님이 여기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의 평균 수명이 75세라고 하니까 다소의 차이는 있을 것이지만 75세면 이 세상을 떠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성경에도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고 육신을 입고 사는 것은 임시 거주지에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우리 생활의 존엄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아무런 의미 없이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항상 생각해야 할 사항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런 인생관을 갖게 된다면 곧바로 이 세상에서의 삶의 목적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세상에 왜 살아야 합니까? 우리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이제는 가버리고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인생이란 단지 우연에 불과합니까?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다 때가 되면 죽는 것, 이것이 전부입니까? 그래서 사람은 세상에 나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전부입니까?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물적인 생활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기독교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면 이 모든 질문에 대해서 “아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사람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인간은 그런 의도와 목적으로 창조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목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이곳에 머무르기 위해서, 아니면 그럭저럭 살기 위해서 온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우리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 큰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그 영원하고 궁극적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만드신 위대한 계획의 일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상에서 행하는 일과 인생 그 자체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 하나 하나가 중요하고 모든 순간 순간들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찮다고 생각하며 하는 말까지도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도 하나님이 보실 때 귀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 돈도 아껴써야 하지만 시간은 돈과 비교할 수가 없이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이 모든 것이 존엄하고, 위대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할 때 인생의 목적이 새로워지고 삶의 의미가 달라질 것입니다.

혹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박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인생의 과정이라면 왜 인생이 이 모양입니까?” “만일에 하나님이 인간과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인생의 창시자시고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독특한 피조물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오늘의 세계를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도대체 전쟁은 왜 일어나 많은 생명이 죽어갔습니까?”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만이 우리에게 참되고 실제적이고 적절한 설명을 해 주기 때문에 여기에 모순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고통과 시련과 비극은 오직 한 가지 이유, 죄 때문이라는 것을 복음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세요.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세상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죄를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낙천적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가급적이면 고통을 피하려 합니다. 그러나 진상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모든 일을 사실 그대로 보려면, 모든 고통의 원인이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미래가 밝아질 것이라고 설득한다 하더라도 그 말속에는 진정한 확신도 없고 오직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이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 없이 살려 하면서 이루어 놓은 너희 자신의 모습과 너희들 세계를 스스로 보도록 해오고 있다”라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가지 않는 한 인류나 이 세상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복음은 우리에게 죄가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사도의 위대한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15절에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떠난다”고 하는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다 살고 난 후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 세상을 떠납니다. 이 말은 죽음이란 실제로 하나의 탈출임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사도는 나의 탈출이 이를 때까지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표현은 퍽 의미 있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애굽의 속박과 포로 상태에서 새로운 땅 가나안으로 가는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은 잔인한 독재자 바로 왕의 압제와 속박과 노예 상태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후 그들은 애굽을 떠나서 홍해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풍성한 소산물을 얻게 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에 의하면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궁극에 이르러서 접하게 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공포가 아니라 장막을 걷어 이동하는 것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을 떠나(탈출하여) 강(요단강)을 건너 영원불멸의 왕국(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그런 식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위한 위대한 계획과 목적을 갖고 계시고 이 계획과 목적을 시행하고 계신 중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우리에게 죄가 남아 있는 한 고통이 있고 마침내는 대변동 사건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피상적인 낙천주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전쟁과 전쟁의 소문에 대해서 쓰여져 있기도 하지만, 죽음과 죄와 무덤의 권세를 이기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마침내 이 세상을 깨끗이 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이고, 하나님께 대하여 적의를 가진 모든 요소들은 마침내 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더없이 영광스러운 최후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최후의 탈출, 최후의 계시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해오신 일을 생각하라고 말씀하듯이 하나님이 앞으로 하실 일을 기대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궁극적인 것, 그리고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하는 것이나 희망하는 것만 가지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주님을 의지해야만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의 부활입니다. 생명과 죽음, 그밖의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인간의 삶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죽음과 무덤을 이기고 영원한 삶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시고 다시 부활하신 주님을 생각함으로 다른 모든 기억이 거룩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6절을 보세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 주신 말씀대로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고 주님 자신도 친히 성경 여러 곳에서 말씀하신 바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신학적인 이론도 아니고 철학적인 평론도 아닙니다.
이것은 목사가 사랑하는 성도들의 심령을 위해서 쓴 목양의 편지입니다. 그들을 돕고, 격려해주고 확고하게 세워주고, 강하게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그가 말한 대로 “그들이 부름받고 택함받은 것을 확실히 하도록,” 그들에게 힘을 주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을 가지고 외면으로나 내면으로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강한 위치에 있을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많은 비유도 결국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세 가지 비유가 있는데 열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그리고 나라들의 심판에 대한 것이 다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분명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신약 성경을 해석하는 여러 학자들의 이론이나 주장, 그리고 학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믿고 여러분에게 전하는 것뿐입니다. 복음이 가르치는 핵심은 최후의 성취와 그리스도의 재림과 계시적 요소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은 너무 분명하고 큰 사실입니다. 그가 어떻게 다시 오십니까? 주님은 인격으로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육체로 다시 오십니다. 성경은 그가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은 반드시 육신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게 오십니다. 그는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고 “모든 사람이 그를 보게 될 것입니다.” 신약 성경을 읽어보면 여러 곳에서 그 결과에 대해서 말한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사람들은 산과 바위들에게 자기를 숨겨달라고 소리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볼 것입니다. 그는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며,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운데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갑자기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님은 그가 언제 오실는지 그 자신도 알 수가 없고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왜 다시 오십니까? 이 세상 일들을 종결지으시고, 시간을 끝내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부활을 이루기 위해서 다시 오십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모든 죽은 자가 선악간에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심판을 받기 위한 부활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남긴 삶의 기록대로 심판받게 될 것인데, 택함받은 사람은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서 그 책이 펼쳐질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책에 기록돼 사람은 영원히 구원하실 것이고, 하나님의 원수들은 다 멸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여러분에게 간곡히 드리는 말씀은 “깨어 있어서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은 간교하게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약 성경의 정수입니다. 잘 준비하셨다가 언제 주님 다시 오신다고 해도 영광 중에 맞이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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