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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도적 증언과 성경 (벧후 01: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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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생각하게 되는 베드로후서 1장 16절 이하의 말씀은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미 드린 말씀대로 이 편지는 사도 베드로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을 격려하고 신앙에 확고히 서 있게 하기 위하여 쓴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주님의 재림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 있는 성도들은 여러 가지 의심이 생길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것을 의식하면서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때 외부적인 환경의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보다는 그들에 대해서 그들 주변에 널리 알려진 이상하고 놀라운, 많은 꾸며낸 이야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 진리인가를 구분하는 것이 아주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을 한다고 해도 “우리가 그 말씀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무슨 권리로 그 말씀을 하십니까? 누구의 재가를 얻어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사도 베드로는 두 가지 중요한 것을 말했습니다. 첫째는 사도 자신이 목격한 사건이 우선이고, 그 다음으로 예언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 기독교 복음에서 가르치는 교훈이 얼마나 훌륭한가를 말합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냉철하게 생각해보면 불교나 유교, 마호멧교에서 가르치는 교훈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소크라테스, 헬라의 철학자나 세네카 같은 사람들의 교훈도 아주 훌륭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비교해보면 별 차이가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또는 고귀한 가르침이라는 견지에서는 기독교 복음의 유일성을 주장하기가 어렵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아니어도 다른 데서 똑같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의 전한 말씀이 고상한 가르침의 본질에만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이 교훈을 경험이나 복음을 믿음으로 일어난 결과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야 합니다. 이것 역시 중요합니다.

여러분, 이런 환경에서 베드로는 뭐라고 말합니까? “나는 한때 어부였습니다. 죄 많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고 전도자가 되고 사도가 된 이후에 나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증언의 근거를 자신의 내적인 경험이나 자신에게 특별히 나타난 복음의 결과에 두지 않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주관적인 어떤 것에 우리 확신의 근거를 둔다면 오늘 우리 사회에 보편화된 사교(邪敎)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아주 분명하고 뛰어난 경험들을 줄 수 있는 많은 요인들이 있습니다. 다른 모든 가르침 속에 있는 복음의 어느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말을 들어보세요. 오늘 주신 말씀 16절 이하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기독교적 변증의 본질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사도가 증언을 한 확실한 사실 위에 굳건히 놓여져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거기서 기독교 복음의 첫 전도자인 사도들이 한 설교의 특성을 살펴보세요.
그들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무엇을 말했습니까? 그들이 자기들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까? 그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말했습니까? 그들 주변에서 일어났던 몇몇 신비한 경험에 대해서 설명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보고 증언한 확실한 사실들을 말했습니다. 그들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전파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그 예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거기서 이방인 고넬료에게 전도하는 것을 볼 수가 있고, 그가 말한 것을 들어 볼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에 집에 가서 나사렛 예수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있었고 그가 여러 가지 일을 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이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자요 우리와 함께 먹고 마셨던 분이시라는 것입니다”라고 예수를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베드로나 바울이 전도하는 것을 살펴보면 어느 곳에서나 설교의 내용이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고 예수가 참으로 고통을 당하였음을 성경을 가지고 입증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의 주장의 기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에 관한 사실 위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어떠한 증거가 있습니까? 우리는 그가 행하신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병자를 고치시고 눈먼 자를 보게 해주시고 바다를 잔잔케 하고 바람을 멎게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주권을 갖고 계십니다. 이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의 부활이 사실이라는것에 대한 증언을 해줍니다. 그들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무덤에 묻힌 것을 보았는데, 그 후에 바로 그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을 보았고, 그가 그들에게 이야기하고, 그들과 함께 40일 동안을 지내시면서 그 자신을 입증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가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기서 변화산에서의 사실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사실상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야고보와 요한과 내가 그 산 위에서 그와 함께 있었는데 우리는 갑자기 그가 변화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가 특별히 이것만을 이야기할까요? 그 이유는 틀림없이 그들이 우리 주님의 특별하고 놀라운 영광을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더 명백하게 보았던 곳이 바로 이 변화산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그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갑자기 그들은 주님이 변화하시는 것을 보았고 그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강렬하고 눈부신 빛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옷은 그 누구도 만들어 낼 수 없을 정도로 하얀 옷이었습니다. 그 놀라운 영광으로 말미암아 거의 눈이 멀 지경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때 그 광경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그 놀라운 장면을 보면서 그곳에 있는 동안에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는데, 그들이 베드로 자기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죽음과 무덤 저 편에서 온 사람들인데 나타나서 그와 이야기를 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전에는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그런 소리, 하늘에서 나는 음성을 들었는데 “아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사도들이 엄숙하게 말한 이 사실을 그대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갔을 때 예수님이 갑자기 변하는 모습을 보았고,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고, 하늘에서 나는 음성을 들었다는 것을 믿습니다. 주님이 파도를 잔잔하게 하고, 바람을 재우고, 병자를 치료하고, 죽은 사람을 살린다고 그들이 말하는 것도 믿습니다. 제가 믿는 데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이 한 말이 저의 유일한 근거이고 기초이고 소망의 확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심리학적인 경험을 할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이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고, 그가 기적적인 방법으로 태어났고, 그가 기적을 일으켰고, 거룩한 산에서 변화되셨고, 인간은 결코 한 적이 없는 일을 행하셨고, 인간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사흘만에 무덤에서 일어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증언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제쳐 놓고 하나님의 교회를 설명할 수 있습니까? 사도들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 복음 쓴 사람들이 거짓말쟁이고 날조자이고 사기꾼이고 고의적으로 이런 장면을 꾸며냈을까요? 죽음이 두려워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그의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후에 끊임없이 죽음과 순교의 위험 앞에서 자신을 나타내고, 결과적으로 자신을 순교하게 만든 주장들을 했을 것 같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이 사도적 증언과 증거에 바탕을 둡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오늘날에 이르게 된 방법이고 고대 세계를 정복했던 방법입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들의 증언을 믿느냐, 아니면 꾸며 낸 이야기로 생각하고 잊어버리느냐 이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학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과학이 결코 사실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에 대해 변명하지 맙시다. 우리의 믿음을 약화시키지 맙시다. 우리는 기적을 믿는다고 주장합시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약 성경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도적인 증언과 증거 위에, 그리고 변화산 위에서 그와 함께 있었고 하늘에서 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를 들은 이 사람들의 증거 위에, 우리의 모든 것을 굳게 합시다.

이제 오늘 주신 말씀 19-21절에서는 성경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성경의 일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이 진실하다는 것은 성경 전체가 진실하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서도 이와 같은 것을 정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사도가 20절에서 나타내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고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 말씀을 좀 자유롭게 번역하면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선지자 자신이 여러 가지 일들을 이해한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니라”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니라”에서 “감동하심”이란 말을 주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말한 것이니라”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감동하심”이라는 말에 대해서 해석하는 사람들은 사도행전 27장과 비교합니다.
여러분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로마로 가는 도중에 난파를 당한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파선기는 아주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라굴로라고 하는 광풍이 일어나 작은 배가 요동하고 밀려가자 배의 선장과 선원들은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불필요한 모든 기구들을 물에 던져 배를 가볍게 하고, 그 다음 배의 짐을 다 밖으로 던졌습니다. 그때 그들은 배를 구하기 위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습니다. 배는 그냥 쫓겨 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쫓겨 갔다”고 하는 말이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냥 쫓겨 간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라고 할 수 있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성경과 예언을 단지 인간들의 사고와 관념들을 모은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의 예언은 인간의 통찰력과 지혜의 결과가 아닙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인간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기록하기로 결정하여 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 이상의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그들에게 오시어 그들은 붙잡고 그들에게 말을 전하사, 그들이 그것을 증거로 기록할 때 그들에게 옮겨주고,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예언자들 자신이 주장하는 것과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하사” 또는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하사,”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다”라는 말을 그들은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은 제가 생각하는 바입니다”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은 주어진 말씀이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를 보아도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달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 말씀을 그대로 전달한다면 문제가 생길 것이고 그의 평판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것 때문에 투옥을 당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는 그것을 말해야 한다. 너는 그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의지와는 반대로 부르실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는 말씀을 전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런 일은 선지자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그 일이 주어진 것입니다. 배가 아드리아바다에 그냥 쫓겨갔던 것처럼 그들도 문자 그대로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쫓겨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참으로 중요한 어떤 일들을 인간에게 알려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은, 인류는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도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이 지식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람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두 가지 중요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 주시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계시를 통해서 계시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 위에 특별한 계시의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끔 백성들에게 말씀이나 행동을 보이심으로 자신을 나타내셨고, 어떤 때는 기적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어떤 선택한 종들에게 말씀을 하시고 그들에게 그의 말씀을 나타내시어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기록할 수 있게 함으로써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어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영감에 대한 주장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같은 사람을 인도해 주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모세는 사실들을 기록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 말씀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모세가 알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사상이나 견해나 발견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감되어졌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그 사람이 기록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것을 기계적 영감설이라고 하는데, 저는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 그 쓴 사람에 따라서 문체가 다른 것을 발견하시지요? 바울의 글을 읽으면 바울을, 베드로의 글을 읽으면 베드로를 생각하게 되지요. 요한의 글을 읽으면 또한 요한을 생각하게 됩니다. 인격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하나님의 종들은 진리의 지식에 인도되었을 뿐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데도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들의 인격은 자유로웠지만 그들은 성령에 의해서 지배를 받았으며 이 최종적인 결과를 약속받은 것입니다.

이 성경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유일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성경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 하나님에 관해서 무엇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이 성경 속에 자신을 나타내시고 그의 성격과 그의 거룩하심을 나타내 주심으로써 그에 관해서 바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인간과 생명과 세상에 관한 자신의 생각들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인간의 모든 문제들이 어떻게 해서 죄의 결과인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죄에 관해서 어떤 일을 행하셨으며 또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인가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역사의 지도가 있습니다. 여기에 시대의 철학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앞으로 펼쳐질 시대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베드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요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이 백성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서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그대로 믿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왜요? 말씀은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어두운 데를 비취는 등불”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유일한 빛은 성경의 빛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빛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성경은 분명히 어두운 동굴 속을 비춰주는 등불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이 말씀을 주의하여 열심히 살펴보기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성경만이 유일한 소망이요, 어두운 곳을 밝게 비췰 수 있는 유일한 빛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드러내 줍니다. 성경은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습니다.”

세상은 어둡고 침울하고 비참한 곳입니다. 사람들을 보세요. 세상을 보세요.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보세요. 세상을 밝은 곳으로, 빛과 소망과 낙관으로 가득한 곳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어두운 세상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 상황을 묘사할 수는 있지만 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빛 이외에 오늘날 세상에는 어떤 빛도 없습니다. 회의를 한다고 문제가 해결됩니까? 교육이 인간을 바르게 살 수 있게 합니까? 우리는 모든 것이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 어둡고 침울하고 비참한 세상을 위하여 어떤 소망이 있습니까? 거기에 대해서 오래 전에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빛, 예언의 빛 이외에 어떤 빛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분명한 빛이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세상의 소망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며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어떤 행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의 소망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예언의 가장 큰 주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인간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으로 인하여 세상이 오늘날과 같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세상이 오늘날과 같이 된 것은 불가피한 결론입니다. 우리들이 마음대로 행동함으로 이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를 범하면 그는 저주를 부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저주가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관심을 가지시고 구원에 대한 계획과 목적을 가르치십니다. 구약 성경에서 그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에게 한 나라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 민족은 애굽에서 고난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하시고 약 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계속해서 그들에게 사사와 왕을 주셨고, 예언자를 보내시어 그들에게 메시야가 오신다는 것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차매’ 그가 오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은 그를 거절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께 반역하며 똑같은 사악함에 빠져 있고 동물적 수준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니 동물과 꼭같이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비참하고 침울한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들을 부르고 계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으로부터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거기에 빛이 있으며 등불이 비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여기에 그 마지막 말씀이 있습니다. 이 일은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계속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을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시는 일은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는 정복자로 오실 것입니다. 그가 오시면 “의의 거하는 바 새하늘과 새땅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빛입니다.
우리에게 이같은 말씀의 빛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이같은 소망의 빛이 있습니까? 우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말씀 붙들고 바르게 신앙 생활해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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