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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노아와 롯의 도전 (벧후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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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 세상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악을 행하는 세상이고 많은 사람이 세상 편에 사는데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사람은 소수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소수인 그리스도인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또한 얼마나 큰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 권고는 오늘도 그때만큼이나 중요한 것입니다.
다행히도 사도 베드로는 그의 가르침을 하나의 이야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옛날 인류의 역사에서 그렇게 뛰어나게 두드러진 두 사람 노아와 롯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노아가 홍수 이전의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의 종교적, 도덕적 타락에 대해서는 창세기에 아주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말하자면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6장 5절 이하를 보세요.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이 정도로 끔찍한 상태에 노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죄악으로 둘러싸여 있는, 그리고 결국 노아의 홍수라는 심판으로 이르게 하는 그러한 세상의 사악함에 직면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함께 지켜보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롯과 평원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롯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성경이 얼마나 너그럽게 그리고 부드럽게 묘사하고 있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롯이 의로운 사람이 아닌 것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롯은 그 들판이 기름지고 물이 넉넉해서 그곳에 죄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것이 더 풍성한 곳이었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를 택해서 거기서 살고 싶어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사도 베드로가 여기서 어느 정도는 롯이 그런 행동을 하도록 한 어리석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롯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로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8장과 19장을 읽어보면 우리는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무서운 도덕적 타락, 그래서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불결과 추악함 속에 살고 있는 사회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에서 롯과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날이 저물 때에 하나님이 보내신 두 천사가 소돔에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롯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들이 듣기 싫어해도 말해주어야 합니다. 정말 영혼의 구원을 원한다면 우리는 거리낌없이 불타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선언해야 할 것입니다.
롯이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된것이지만 그래도 도구로 쓰이는 천사들이 책임 있게 일했습니다.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고 천사들이 말했습니다. 이 말에 얼마나 강력하고 열렬한 사랑이 비치고 있습니까?

리챠드 박스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것은 마치 꺼지지 않는 지옥불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대로 버려두면 얼마 안 있어서 그 불 속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서도 그냥 말로만 ‘그리로 그냥 가면 불이 있을 텐데요. 그 불은 아주 뜨거울 걸요’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로 가는 사람에게 “이게 무슨 일이에요. 그리로 가면 안돼요. 죽어요. 어서 이리 오세요”하면서 잡아당기지 않겠습니까? 옳은 말입니다. 우리는 긴급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찰스 스펄젼은 그의 설교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끌어들이세요.” 이 말은 다른 사람의 영혼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한 말입니다.
천사들은 사람들의 손을 붙들고 있습니다. 두 천사가 가진 손은 넷뿐입니다. 천사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에 손 하나가 해당되었습니다. 천사들은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 그리고 두 딸의 손을 잡았습니다. 여기 네 사람의 네 손이 전부입니다. 남은 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리도 두 손을 가졌으니까 이 두 손으로 어두운 세상에 있는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데 쓰시기를 바랍니다.

롯과 그의 식구들은 소돔성을 빨리 떠나라고 하는 천사들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왜 지체했습니까? 롯은 그 도성 안팎에 많은 재산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소돔성을 떠나는 것을 지체한 것 같습니다. 아마 롯의 가축과 양떼들이 소돔의 기름진 초원에서 자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것을 다 잃어도 우리의 영혼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고 말 세상 것 때문에 영원한 것을 잃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아마도 롯의 아내는 육적인 애정 때문에 지체한 것 같습니다. 그녀에게는 딸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도성을 떠나지 아니하려는 사위들도 있었습니다. 출가시킬 준비도 잘 해놓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큼 떠나가기가 어려웠는지 모르겠습니다.
롯의 딸들은 왜 지체했을까요? 약혼자가 있는데 저희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기며 따라나서지 않았습니다. 약혼한 사람을 뒤에 두고 혼자 떠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롯의 딸들이 소돔성을 떠나는 것을 지체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죄를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겠느냐? 아니면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겠느냐?”고 말입니다. 우리 앞에 양자택일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다른 것은 몰라도 죄만은 포기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죄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렇게 안타깝게 눈물로 호소하는데도 그 호소가 들리지 않습니까? 왜 우리가 죄에서 떠나기를 지체합니까? 성 어거스틴도 회개하기 전에는 죄에서 떠나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그것이 옳다고 인정을 하면서도 “조금만 더 있다가 떠나겠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왜 우리가 죄에서 떠나지 못하고 지체합니까? 게을러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떠나야지, 끊어야지”하면서 오늘에 이른 사람은 없습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다 인정하면서도 아직 회개하지 않은 분은 안 계십니까? 그런 사람은 성경을 다 믿는다고 말하며 지옥이 분명히 있는데 자기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게 된다고 말합니다. 구원도 있는 것을 믿고 이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다는 것까지 다 믿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 살지 못하니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청년들은 시간이 없다는 말을 믿지 않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연세가 40, 50 지나신 분은 제 말씀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나이 60이 지나면 해마다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70이 지나면 달마다 달라진다고 합니다. 80이 넘으면 날마다 달라진다고 합니다. 지체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간단합니다. 믿으면 살고, 신뢰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의 상황은 긴급합니다. 죄악의 자리를 떠나야만 삽니다.

그리고 롯이 구원받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의 배후에는 아브라함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효력 있는 기도, 능력 있는 기도, 응답받는 기도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지 않는다”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기도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소돔성이 심히 악하기는 했지만 그 중에 의인 몇이라도 있으리라고 기대했습니다. 최악의 곳에서 최선의 것을 희망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기대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용기를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소돔성에 의인 50명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의인의 숫자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양보를 재촉했습니다. 나중에는 부끄러울 정도로 낮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아브라함이 간청을 그만둘 때까지 하나님은 양보를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기도를 끝마칠 때까지 하나님은 떠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구원얻은 사람은 롯과 그의 가족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셨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지마는 의인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롯의 가정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일을 행하는데, 오직 한두 사람만이 경건한 생활을 하고 하나님 앞에서 참되게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가족 중에 오직 혼자 올바른 길을 걷는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을 같이 따라가는 것이 쉽습니다. 주님께서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으며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음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뿐 아닙니다. 다수 가운데 소수로 서 있는 사람이 받는 시험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노아가 그랬습니다. 노아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빈정거림을 당하고 조소를 받았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모두 멸하기로 작정하실 정도로 세상이 악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악했을 때 노아만은 홀로 자신의 고결함을 지켰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었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완전한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힘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려고 애썼습니다.
노아가 산 시대는 한마디로 패역한 시대였습니다. 그런 세대에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산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노아의 날,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는 날에 오래 참고 기다렸으나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다가 멸망당했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늙은이의 망령으로만 여겼습니다.

노아와 그 당시 사람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노아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노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보이는 분처럼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위해 살았습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을 애써 하나님을 위해 살았으나 그와 그의 일곱 식구 외에는 모두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참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예수님이 “인자가 올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노아는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 장차 멸망할 것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불쌍히 여겼을까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노아의 가정을 동정했습니다.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은 노아의 말을 늙은이의 헛소리로 들었습니다. 이것이 악한 세대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 5절을 보세요. “옛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축복받은 가정의 모습을 봅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받는 가정입니다.
창세기 7장 7절 말씀에 보면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600세라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자세히 보세요. 노아의 가정은 홍수가 나서 집에 물이 들어올 때 방주에 들어갔습니까? 아닙니다. 비도 오기 전, 날이 흐리지도 않은 맑은 날인데, 하나님이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것에 그저 순종함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비웃었을것입니다. “아니 저 미친 것들 좀 보게. 저 큰 배 안으로 들어가는 좀 보게, 왜 저러지? 늙은이는 망령이라 치더라도 그 자식들은 왜 저러지? 젊은 것들이 이성도 없나? 그것도 부전자전인가?”하면서 빈정댔을 것입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이게 노아 영감님이 말하던 홍수의 시작인가?”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 사람이 살다보면 맑은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고, 해 나는 날도 있고 비오는 날도 있는 것이지 비오는 게 오늘 처음인가?”하면서 반박했을 것입니다. 장대비가 이틀 사흘 나흘 계속 오니까 “이건 큰 장마구먼”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물이 점점 불어서 집에까지 들어오니까 이것은 홍수라고 하면서 언덕으로 피했을 것입니다. 물이 언덕을 넘으니까 큰 홍수라고 하면서 산꼭대기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노아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비극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노아의 가정은 어떠했습니까? 온 가족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이것 이상의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가족 가운데 아직 구원의 반열에 동참하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이것은 정말 가슴아픈 일입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남편이 있습니까? 아직 구원받지 못한 아내가 있습니까? 부모님이 계십니까? 자녀가 있습니까? 눈물로 기도합시다.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제목이 많습니다만, 가장 긴급한 것은 내 가정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의 일곱 식구를 홍수 속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악한 세대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두드러지게 구별되는 사람입니다. 노아와 롯은 둘 다 그들의 시대에 널리 유포되고 있는 경향과는 다른 방법으로 두드러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초대 감리교인들을 어떻게 보았는지 아십니까? 그들을 경멸하는 의미로, 그들이 다르게 산다는 것 때문에 그들을 욕하는 뜻으로, 종교적으로 엄격한 사람 “Methodist”라고 불렀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인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된다고 믿는다면 만일 우리가 정말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영으로 거듭난 사람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반드시 견디어 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들과 같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터툴리안의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그는 매우 유능하고 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초대 그리스도인을 보고 개종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은 다음부터는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살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하기보다는 오히려 투기장에 있는 사자에게 던져질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을 보세요. 그들에게는 틀림없이 무엇인가 있습니다. 그 믿음이 사람을 저렇게 변화시킨다면 그 믿음 안에는 틀림없이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 생명까지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터툴리안은 말했습니다. 그에게 감명을 준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개종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처럼 견디고 있습니까? 청교도들처럼 견디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세상과 우리 사이를 거의 구별할 수 없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 중에는 세상 사람처럼 되려고 하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많이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과는 전혀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두드러지고 구별된 사람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가 단지 두드러지고 구별된 사람이라는 것은 잘못된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직 세상과는 아무 상관없이 지방 정치, 국가 정치, 세계 정치에 참여하기를 거절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구별되었다는 것은 수도승이나 은둔자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노아도 롯도 그런 의미에서 구별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가지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구별된 사람,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기도가 있는데, 15절에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까? 분명히 그 가르침은 우리가 세상적인 생각과 세상적인 행위에 영향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사용한 말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20절에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이라고 말했습니다. “얽매이고”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언제나 타협하는 것, 세상이 우리에게 생각하게 하고, 말하게 하고, 행하게 하는 것을 그대로 따르는 그것은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맞서서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요한일서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는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바로 그것이 세상의 특징입니다. 그것이 노아의 홍수이전,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세상의 상황이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똑같습니다. 그것이 세상적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그것에 오염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것의 지배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그의 나라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우리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악한 세상 때문에 고통받고 염려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여기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롯도 고통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8절)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상태를 보며 슬퍼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이 이렇게 된 데 대해 한탄해야 합니다. 거기에 대해 비참을 품어야 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이 신의 성품에 참예해야 하는데 술 취하고, 부도덕하고, 추악한 세상적인 농담에서 재미를 느낀다면 이것이 옳은 일입니까?
성경 말씀에 의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일 때문에 가슴 아파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악에 대해 반감을 품어야 합니다. 비난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서 간섭해 주실 것을 간청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처럼 하나님을 배반하는 세상을 위해서 우리가 할 일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며 애타게 하며, 괴롭힙니다.

끝으로, 우리가 그런 세상에 의를 전파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경고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죄로 인하여 다가올 심판에 대하여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들의 위험을 깨닫고 그 위험에서 빠져 나오도록 호소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그리고 하나님과 그의 진리에 대한 충성스러운 자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노아와 롯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노아와 롯이 살던 시대나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세상이 너무 같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우리가 구별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영예를 위해서 이 세상을 보며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까? 자신을 해치며 파멸해가고 있는 영혼을 위해 슬퍼하고 있습니까? 책임을 느끼고 위하여 기도하며 참된 부흥과 신앙적인 각성이 일어나기를 위해서 힘쓰고 있습니까? 노아와 롯이 오늘의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던지는 도전 앞에 우리는 어떻게 응전해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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