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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때를 기다리며 (벧후 0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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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어디서나 분명한 역사의 종말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그 종말은 심판의 종말이 될 것이며 우리 주님께서 왕으로 다시 오실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이며 사람들과 천사들의 최후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 심판은 불경건한 자의 정죄와 파멸이 있는 것입니다. 그때는 하늘과 땅이 사라질 것이고 모든 원소들은 뜨거운 열기에 녹아버리게 되고 땅과 체질들이 불타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역사관에서 부정적인 면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거기서 끝나지를 않고 베드로 사도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이 기대할 수 있는 긍정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경건한 자에게는 최후의 파멸 외에는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어떤 소망도 없습니다. 성경 어디를 읽어보아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끝없는 형벌과 파멸 외에는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무섭고 놀라운 생각이지만 그것은 성경 어느 곳에서나 가르치고 있는 명백하고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면이 있다는 데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려야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3절을 보세요.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에 거하는 바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다른 소망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약속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읽는 모든 것이 결국은 그 약속으로 인도되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구원의 중대한 목표요, 목적입니다.
사도신경을 신앙고백으로 외울 때마다 영원한 상태에 대해서 확인하면서도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에서의 사건에 대해서 지나치게 관심을 가져왔기 때문에 다가올 영광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거론해 왔기 때문에, 그들은 성경의 여러 곳에 나타난 영원에 대한 영광스러운 계시를 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베드로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고, 성경 여러 곳에서도 자주 다뤄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령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은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 하면서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서는 논쟁과 의견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사실상 이것을 무서운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과 천사들을 판단하게 된다면 무슨 힘든 일이라도 우리가 감당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 19장 28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은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여기 “새롭게 되어”라는 말은 아주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라는 말은 모든 것이 새롭게 되어지는 때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하늘과 땅이 소멸하고 새하늘과 새땅이 있게 된 후 새롭게 되어, 우리는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가 사도행전 3장에서 행한 설교를 여러분께서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만유를 회복할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 여기서도 다가오고 있는 그때에는 만물이 회복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후사가 무엇입니까? 후사는 상속을 받는 자인데, 이것에 대해 바울은 우리가 다가오는 이 위대하고 새로운 세계, 곧 새땅과 새하늘을 상속하는 후사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그와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19-23).
아마 이 말씀은 교회에 대해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하게 진술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세계의 창조를 알 수 있으나 계시록, 특히 21장에서는 이 새로운 창조 곧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새롭게 됨’과 베드로가 이야기 한 ‘만유의 회복’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를 대조해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셨고 그 후 죄가 들어와 세상을 혼란시켰으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재창조할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에 죄의 결과가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세상이 죄로부터 깨끗하게 되고 정결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세기와 계시록을 대조해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창세기에서 우리는 천지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계시록에서는 새로운 창조에 대해서 읽습니다. 창세기에서는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별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보고, 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성의 빛이 되기 때문에 그러한 발광체들은 필요가 없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낙원을 어떻게 해서 잃게 되었는가를 읽고, 계시록에서는 다시 회복된 낙원에 대해서 읽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인간의 타락을 초래했고 인류의 오랜 역사에 나타나는 모든 불행과 비참함과 허울을 가져온 마귀 곧 타락한 천사의 세력을 보고 계시록에서는 정복당하고 지배당하여 결국은 파멸당하고 멸망의 포구로 펼쳐져 무기력하게 된 마귀를 봅니다.

창세기에서는 인간이 자기의 죄 때문에 동산에서 하나님을 피하여 달아나며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고 하나님을 무서워하여 피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하려고 하는 것을 보고, 계시록에서는 복음과 복음의 축복과 친절과 자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거하시고,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거기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완전히 영적 교제를 이루는 가운데 함께 거하는 것을 봅니다.
창세기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고 동산에서 쫓겨나 그들이 생명 나무에 이르지 못하고 동산의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화염검과 그룹들로 그들을 지키게 한 것을 보고, 계시록에서는 인간이 자유롭게 생명나무를 취해서 먹을 수 있도록 허락받아 처음에는 그에게 금지되었던 바로 그것이 이제 지극히 큰 은혜와 축복으로서 그에게 주어진 것을 봅니다.

우리 앞에 제시되어 있는 그 위대한 약속은 베드로 사도가 유의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도다.” 불경건한 자의 심판과 파멸이 있은 후에,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이 뜨거운 열로 타버린 후에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천지 만물에서 죄의 모든 더러움과 가시와 바늘과 재난과 해독의 원인이 되는 모든 것과 지진과 재난을 가져오는 모든 것을 깨끗이 할 것입니다. 이것이 불의 의미입니다.
불은 악한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이며 그 결과로 아름다움과 영광의 “의에 거하는 바 새하늘과 새땅이” 있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상상력이 너무 미약해서 그것을 다 파악할 수 없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을 여러분에게 상기시켜 드리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성경 속에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의 교훈이고, 베드로에 의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관심을 집중시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피조물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자연에는 탁월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에 따르면 우리들,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새로운 창조와 영광스럽게 된 이 땅을 보게 될 때는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현재 우리 사람의 생각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늑대가 양과 함께 거하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뜯어먹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다툼도 없고, 슬픔도 없고, 한숨도 없으며, 그런 모든 것은 제거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준비된 이 영광스런 광경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요? 베드로는 여기서 우리에게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들은 그 영광스런 광경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13절과 14절에서 “바라보다”라는 말을 얼마나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지 보았습니까?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이며 베드로도 이것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말은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 사용되는 말과 똑같은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들어가고 있었는데 성전 문 밖에는 친구들에 의해서 데려다가 앉혀진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였습니다. 그는 성전에 기도하러 가는 사람들에게 동냥을 얻기 위해 그 곳에 인도되어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오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은 아마 기계적으로 뭔가를 얻으려고 손을 내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에게 “우리를 보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바라보다”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말인데 ‘기대하다,’ ‘바라보다,’ ‘고대하다,’ ‘예상하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바라봅니까? 그리스도인의 기대와 소망은 세상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특별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지나간 시대에는 다른 원리와 교리가 강조돼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강조되어야 하는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의 소망은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들과 관련해서 그렇게 세웠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정반대 편을 보아온 것입니다. 여기에서 복음은 처음부터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소망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사람들이고, 내세에 대한 사람들의 주의를 딴 데로 돌려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회를 개혁하면 보다 살기 좋은 사회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육이 구원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인상을 주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사회가 개혁될 것을 믿었다는 사실보다는, 그들이 지나친 열심을 내었고 개혁하는 데만 그들의 믿음을 고정시킨 것이 비극이었습니다.

죄와 죄의 결과를 억제하는 일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이것은 정부와 권력이 존재하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나라를 세우시고 통치자를 명하신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그들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어떤 점에서 그들의 기능은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입니다. 그들의 기능은 이 세상이 더 나쁜 곳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정부와 법을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국민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내 믿음을 고정시키고 그것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믿게 되면 그것은 복음을 부정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 세상에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고정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것은 다가오는 영광과 그 세상입니다. “그것을 바라보세요.” “우리는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런 것을 바라보고, 고대하며, 기대하지 않는 한, 이 교리를 믿지 못하고 이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 놀라운 진리 앞에 서게 될 때, 이 세상과 이 세상 일에 얼마나 많은 우리의 시간과 생각과 기대를 쏟았으면서도 다가오는 새로운 세상에 대해서는 얼마나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는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 두려운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았으면 깨달은 그것이야말로 참된 세상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신 대로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기독교의 복음을 보고 있다면 바로 이 문제가 우리 앞에 놓이게 됩니다. 그것을 잘 바라보십시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믿는다면 그것을 기대하십시다. 우리는 매일 하루도 거르지 말고 이것을 생각하며, 명상하며, 숙고해야 합니다.
우리는 현재 당하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서만 너무 많이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현재의 어려움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가오고 있는 종말과 새하늘과 새땅과 이 영광스럽게 된 창조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생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 입니다. 그럴 때 현재에 당하는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이것들을 바라보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비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14절에서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행실과 품행을 위하여 신약 성경 어디에서나 호소하고 있는 기초적인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신약 성경이 항상 거기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신약 성경은 결코 도덕과 윤리와 행위 그 자체를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 성경은 결코 사람들에게 선한 생활 자체를 위한 선한 생활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신약 성경이 호소하는 것은 항상 이 복된 소망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신약 성경의 윤리적인 요구에 반대를 하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이야말로 참으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이 논리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에 대해서 논쟁할 필요도 없고 그것은 천연적이고 지극히 합리적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만일 우리가 바라보고 기대하고 있는 것이 죄가 있는 이 세상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죄의 영역에 속한 일을 계속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자기 모순입니다.
바로 이것이 베드로가 말씀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거룩해지려고 하는 사람들이 오직 규칙만 수행함으로 신약 성경의 가르침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룩해지는 것은 그런 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전혀 그것을 호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호소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과 또한 “이 복음을 믿는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만일 참으로 그 사실을 믿는다면 지금은 복된 소망에 대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어야 할 때입니다.
바로 그와 똑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요한의 말을 들어보세요. 요한일서 3장 2-3절에서 그는 “우리가 지금은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바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에 대한 실제적인 증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경건하고 도덕적이고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만일에 그렇지 않게 되면, 그 날이 올 때 나는 부끄러운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사도 베드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바로 이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이 다가오고 있으며 “모든 눈이 그를 바라볼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모든 궁금하던 일들을 다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인 예수님을 뵈올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와 동등하셨고 또한 영원히 공존하시지만, 거기서 영원한 천국복락을 누리시고 계신 분이셨는데, 그 곳에서 나오셔서 친히 비천하게 되시어, 자신을 비우셨고, 자신의 영광의 훈장을 내던지시고,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죄에서 구하여 내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이 영광의 후사로 삼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모든 것을 참으셨던 분이십니다.
우리가 바로 그 주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그것이 주님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녔으며, 어떠한 희생을 치르게 하였는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뵙기 원하면 주님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베드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이 세상을 즐기고 이 세상에 몰두하고 지내왔다면, 우리는 부끄러워서 참으로 많은 일을 행하시고 많은 고난당하신 그를 바라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 한 분이 한국동란 때 남하해서 혼자 지내시면서 40여년 동안을 오로지 북한에 남겨두고 온 아내와 그 자녀만을 생각하며 어려운 목회 생활을 해왔습니다. 남미에 선교사로도 가서 봉사했고, 미국의 교포들을 위한 목회도 성공적으로 하시고 정년 은퇴를 하셨습니다. 미국의 시민권이 있기 때문에 북한에 두고 온 식구들을 한 번 만나보기라도 하고 싶어 준비를 잘 해 가지고 북한에 갔습니다.
그런데 가서 만나 봤더니 아내는 재가를 했었고 아들은 공산당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의 충격, 실망, 배신감이 어떠했을까 짐작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라면 그 목사님의 부인이었던 분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남편은 오로지 아내만을 기리며 청춘을 보내고 지냈는데 남편 되었던 분을 뵈올 면목이 있었을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나타나심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끝으로, 그 날이 다가오는 것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2절에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그 날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워도 참을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한국 고전 중에 「춘향전」을 보면, 춘향이 그렇게 어려움을 많이 당했지만 이 도령에 대한 그 일편단심의 사랑, 이 도령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 어려움을 겪어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요사이는 부부가 같이 유학도 갈 수가 있습니다만, 30년 전만 해도 같이 갈 수 없고 남편이 유학을 가면 부인은 남아서 가정을 꾸려 나가야만 했습니다. 남편 없이 가정을 꾸려나가는 부인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남편에게서 오는 편지를 받아 읽으면서 용기와 소망을 가집니다.

만일에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기업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틀림없이 기업을 받을 것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준비하며 그것을 간절히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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