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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합니까? (벧후 03: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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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베드로는 지금까지 그의 교회적인 설명을 마친 다음 그의 편지를 끝맺으려 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지금까지 강조해 온 것은 그리스도인의 인내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오늘 주신 말씀 17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도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낙망이라는 것은 가장 큰 위험인데 이것은 좌절하고 포기하고 후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그의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그들이 견디어내야 할 시련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로 하여금 앞으로 올 일에 대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근면하고, 낙심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이 쓴 여러 편지에서 사도 베드로가 다루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계속 꼭 붙잡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는 호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처음에 가졌던 확신을 굳게 붙잡고 있으면 여러 가지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구약에 나타난 성도들의 아픔을 열거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은 어려운 박해시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모세와 같이 그들 모두는 “상 주심”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터가 있는 성을 바랐습니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모든 호소는 확신과 지속, 그러니까 착한 일을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것이 완전하게 잘 될 것이며, 더 이상 시련이나 문제들이 없을 것이고, 우리가 평안하게 쉴 수 있을 것이고, 이런 자리에서 하늘 나라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믿음의 싸움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인내하고 굳게 서라는 호소를 계속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것이 필요할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주님의 오심이 지연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즉시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의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왜 주께서 오시지 않으시는가?”라는 것이 이 편지의 큰 주제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여기에 대해서 대답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시간은 도덕적인 것인데 그에게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둘째는 거짓 교사들의 일과 가르침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2장에서 생각한 바 있기 때문에 다시 거론할 필요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그것을 17절에서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리는 것”이라고 다시 한번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굳세게 살아야 합니다.

셋째는 우리의 고집과 게으른 성향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고 하지만 쉽게 복음에서 빗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성향을 물리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굳세게 될 수 있으며 그 이름에 합당하게 살 수 있습니까? 복음은 그 일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굳게 하는 복음의 방법은 우리에게 지식을 권해주고 진리와 함께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느니라.” 그것이 방법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의 모순과 문제들에 직면할 때 우리는 신약 성경을 읽고 이런 계시와 진리로 되돌아가라고 권고받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나는 왜 “나는 지금 단순한 인간이 한 말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인간의 심리학이 시도하는 데 따라 나 스스로에게 도움을 주려 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약 성경을 주의 깊게 살펴 볼 것이며 거기서 전개되고 설명된 그대로의 진리를 찾을 것이며 그것을 믿을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해야 합니까?
베드로는 여기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기에 그가 주장하고 있는 근거가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그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이 내려주신 계시로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가르침에 근거해서 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책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다”라는 말씀은 베드로가 그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일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역사의 철학을 이야기하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사도는 이 편지를 쓰면서 자기 자신은 아무런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것을 주셨으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받은 지혜와 위로부터 주어진 계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책이지 인간의 견해와 철학으로 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베드로가 여기서 바울의 기록과 자신의 기록을 구약 성경과 똑같이 나열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했습니다.
이것은 무서운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여기서 모든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독특하게 영감을 주사 내리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구약 성경과 대등하게 그의 호소와 바울의 호소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마음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다른 이유는 성경이 우리가 그렇게 실행하는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우리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15-17절)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성경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신약 성경은 우리에게 생동감을 주고 있습니다.

사실 신약 성경만큼 현대적인 책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의 상황을 살펴볼 때 성경이야말로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유일한 책인 것을 믿습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 철학에서는 아무도 4반세기 동안에 두 차례의 세계 전쟁이 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교육으로는 누구도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불경건함과 비도덕성을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런 일들에 대비하게 해 주는 책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도덕적인 혼란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며, 우리에게 많은 표적과 기사와 소리들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택한 자라도 아주 교묘하게 미혹하려 한다고 성경은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의 오심이 지체되는 것은 오직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직도 세상에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오심이 지체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에 이르게 되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올바른 방법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성경 공부하는 데 될 수 있으면 참석하라고 합니다. 요사이도 성경을 읽고 잘못 해석해서 그 믿음이 잘못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을 올바로 읽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성경을 항상 주의 깊게 연구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서둘러서 읽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읽는 데 경솔히 해서도 안되며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서도 안됩니다. 성경은 주의 깊게, 연구하는 마음으로, 전체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편리한 것일수록 위험부담이 있습니다. 전기가 얼마나 필요하고 편리함을 줍니까? 그러나 잘못 사용하면 전기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비행기나 자동차가 교통 수단으로 얼마나 편리합니까? 그러나 사고가 나면 그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우리의 삶을 바르게 인도하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책이라고 한다면 잘못된 말일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지극히 위대한 책입니다. 이 책을 읽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은 심령이 얼마나 많은지 그 수를 셀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의 말씀대로 성경을 잘못 읽으면 그것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이단에 빠지는 경우도 성경을 잘못 읽고 잘못 해석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주의 깊게, 연구하는 마음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성경을 전체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여기저기 부분적으로, 또는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특정한 부분만을 읽어서는 안됩니다. 특히 오늘과 같은 때 성경 전체를 읽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 전체를 읽고 그 역사를 두루 살펴보고 율법과 예언과 그 궁극적인 결과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좋아하는 부분만 읽지 말고 성경 전체를 읽는 것은 아주 필요한 일입니다.

셋째로,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단순히 우리 자신의 생각을 따르고 우리 자신의 이론들을 지지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어서는 안됩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읽으세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이론을 가지고 성경을 읽지 마세요. 저는 오늘 행해지고 있는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해서 굳이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유행하고 있는 많은 이론들과 이상한 교리를 살펴보세요. 우리 주변에 있는 여러 사교집단을 보세요.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사상들을 살펴보세요. 문제는 그들이 성경에서 이러한 사상들을 찾아내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문제라는 것은 그들이 열린 마음 대신에 이론으로 성경을 살펴보고, 그리고 성경을 읽고 성경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따르는 대신에 자신의 이론과 사상들의 증거를 성경에서 찾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자신을 멸망케 하는 한 예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에 이해하지 못하는 점이 있으면 그렇다고 말해야 합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해야지 아는 것처럼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넷째로, 겸손한 마음과 배울 준비를 하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보니까 영광스러운 실례가 나와 있습니다. 순전히 개인적인 면에서 본다고 해도 그것은 놀랍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겸손한 마음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갈라디아서 2장에서 우리는 바울이 어떻게 베드로를 면박하고 있는 것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안디옥에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는 칭의의 교리를 오해했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어떤 면에서는 그리스도인도 유대인과 같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를 면박해야 했습니다. 베드로로 말하면 주님의 교회의 위대한 인물이었고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잘못되었을 때 바울은 그를 심문하고 그의 잘못을 바로 고쳐 주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어렵고 납득이 잘 안 갑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세우신 사도요, 바울의 선배 지도자인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면박을 줄 수 있을까? 또 이것을 베드로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하고 염려되는 점이 없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겸손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오늘 말씀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잘못되었고 바울이 옳았음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듣고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겸손한 마음과 듣고 배울 준비를 하고 성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 이론이 잘못된 것이라고 판명되면 상관할 것 없이 잘못을 고치고 바른 것을 따를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어린아이같은 마음으로 성경을 대해야 합니다. 교회의 위대한 인물이요 지도자였던 베드로도 그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에게 귀를 기울였습니다.

다섯째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연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메시지의 위대성을 깨달아야 하며, 우리 자신의 마음이 연약하다는 것과 우리의 성향이 육적이고, 세속적이고, 단순한 인간적 생각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 없이, 자신을 낮춤 없이,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해력을 주시라고 요청함이 없이 성경을 펴서는 안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지성과 감정을 열어주시도록 요청하면서 성경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는 경외하는 마음으로 성령으로부터 기름 부음과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간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억지로 풀다가 자신을 멸망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심령이 굳세어지기 위한 방법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충성되고 진실하며, 흔들림없이 지속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이것은 단지 작은 심리학적인 격려가 아닙니다. 또한 단지 책장을 넘기거나, 우리가 성경을 읽고 그 교리를 공부하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겸손하고 경건한 방법으로 그렇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조롱꾼들의 비웃음이나 거짓 선생들의 모든 이단이 우리를 흔들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사도 베드로의 마지막 말씀이 나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했습니다.
이 말씀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타락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진보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뒤로 미끄러지는 것을 피하는 길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사도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는 말씀 속에 완전히 요약되어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총괄이기도 합니다.

여기 “자라가라”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새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탄생이 없으면 성장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새생명을 받은 사람에게만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라가라”고 하는 말은 중생에 대한 전 기독교적인 교리를 설명해 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라는 권고를 받을 때 우리가 자신에게 물어야 할 첫 번째 질문은 “우리는 생명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거듭났는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출발점입니다.

둘째 단계로, 이 생명은 다른 모든 형태의 생명과 같이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생명 없이는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성장은 참으로 신비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장의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일어나고 있는 과정을 볼 수 없습니다. 성장은 결코 갑작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성장은 점진적이며 진보적인 일입니다. 이것은 ‘자라가라,’ ‘성장’이라는 이 짧은 말 속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사상입니다.

베드로는 여기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먼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자라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은혜의 영역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모두 율법 아래 있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제 은혜의 영역 안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친절의 특별한 대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 가지 분량과 정도로 받고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게 되면 더욱 순종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체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1년 전의 나와 비교해 볼 때, 그 어느 때보다도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친절과 자비와 선하심을 내가 더욱 느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은혜에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진리를 이해하는 일에 성장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그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였는지, 그가 이 세상에 무엇을 가져 왔는가에 대한 지식에서 자라가고 성장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단순히 용서와 구원에 대한 지식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구원의 전체 계획과 목적에 관한 이해와 지식 안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가 이 편지에서 말하여 왔던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영적인 투쟁의 성격을 점점 더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간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연구하는 가운데 그를 알게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가운데 그를 더욱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를 아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 관한 단순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소유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첫 번째 편지에서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라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는 자만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아는 데 그쳐서는 안됩니다. 인격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 지식에 자라가기를 원합니다.

끝으로, 우리가 이 두 가지에 해당된다면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일이 왜 중요합니까?
그래야 우리가 이 세상에서 확고하게 설 수 있고 이 세상의 여러 가지 모순들을 이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역경에 부딪혀도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우리가 왜 자라야 합니까? 어린아이는 이해를 잘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실망하기가 쉽습니다. 주위 환경에 따라 변합니다. 활발하다가도 우울해 합니다. 그런데 어린아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우리가 왜 자라야 합니까? 어린아이는 판단력이 부족해서 거짓 교훈에 희생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4절에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며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다가 잘못되는 사람이 누굽니까? 은혜나 지식이 자라지 못한 사람입니다. 어린아이는 언제나 감정과 충동에 크게 의존해서 판단을 내립니다. 신앙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세상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맞서 대항하려면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알고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와 같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넘어지지 않을 것이고,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리지 않을 것이며, 우리를 후사로 삼으신 하나님께 합당한 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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