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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드로의 마지막 권고와 송영 (벧후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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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베드로가 한마디로 요약한 그의 마지막 권고를 살펴볼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베드로는 그의 교리의 대요를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제 그가 가르친 모든 것을 그들의 실생활에 옮겨야 한다는 말로 이 권고를 합니다.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중요한 원칙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이 없이는 성장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 새생명을 선물로 받았고 그 생명이 자라가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은혜 안에서 자라갈 수가 있습니까? 그 동안 교회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일, 하나님 나라의 확장, 하나님을 닮은 생활, 하나님을 더욱 아는 일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두어 왔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개인에서 사회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회구원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정치운동을 하는 것인지 노동운동을 하는 것인지 분별하기 어려운 자리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밖에서 보는 것은 말할 것 없고 자기 스스로도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많게 되었습니다. 모든 관심은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데서 사회적이고 일반적인 문제에 집중되어, 이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성장에 대해서는 거의 들은 바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의 영적인 수준의 하락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하여 이 세상을 좀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는 데만 관심을 두어 왔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 닮은 훌륭한 사람을 만들려는 일에는 무관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가 개인들로 이루어진 복합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 결과에 이른 것입니다.
심지어 복음적인 단체라고 하는 데서도 거룩은 단 한번의 행위로써 갑자기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혜 안에서 자라간다는 말이 소용이 없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한다고 하는 일에 대해서 관심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약 성경을 진지하게 읽어보면 “은혜 안에서 자라가라”는 권고를 어디서나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영향력을 끼치려면 오늘 베드로 사도를 통해 주신 말씀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여러분, 인류역사에서 널리 영향을 끼쳐온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 사람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란 사람들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고상한 인생관을 소유하고 청렴결백한 인격을 가진 지도자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사람들이 적습니까? 그 대답은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대한 가르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시키려고 애써 왔습니다. 그들은 “내가 왜 자신을 괴롭혀야 하고 내가 왜 정치나 사회 일반에 관심을 가져야 하나?”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이기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성의 부족 때문입니다.

국가적 회복의 지름길도 사실은 개인적인 소명 의식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보시기에 기쁜 삶을 살려는 이 개인적인 소망의 회복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훨씬 중요한 의미에서 국가적 중요성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실제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은혜 안에서 자라갈 수 있습니까?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여기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천주교의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의 입장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은혜 안에 자라고 싶으면 그 일을 인생의 유일한 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에서는 수도원 제도나 여러 가지 신앙적 수도회를 보게 됩니다. 천주교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 두 분야로 나누는데 성직자는 은혜 안에서 자라고 성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평신도는 너무 분주하고 다른 일에 젖어 있기 때문에 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평신도는 ‘성자(聖者)’가 된 다른 사람들로부터 공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 안에서 자라는 데 대한 천주교의 견해입니다. 그러므로 성자가 되려면 세상에서 나와야 하고 어떤 직업이나 사업에도 종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독신으로 지내야 하고 신비한 길을 따라야 합니다. 여러 말이 필요 없이, 이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의 견해는 일반적인 원칙에서 시작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자라게 할 수 없다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성장할 수 없으며 스스로 성장하려는 시도조차도 해서 안된다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은, 우리는 자신의 키를 한 치도 더 늘릴 수 없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주님은 거기서 육체적인 성장이나 생명의 연장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우리의 영적인 성장에 우리가 단 한치라도 더할 수 없다는 의미 또한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의 견해에 다르면, 나는 스스로 자라나게 할 수 없으나 성장을 촉진하고 또 거기에 필수적인 몇 가지 조건들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 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의 개념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데 먹을 것, 마실 것, 공기가 필수적인 것처럼 영적인 의미에서 여기에 상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먼저 성경이 있습니다. 성경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성경에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으면 자랄 수 없습니다. 바꿔 말해서, 은혜 안에서 자라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 읽는 일에 태만히 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받습니다. 우리가 호흡함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기도함으로 우리의 영혼이 삶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의 모든 집회에 참석하는 것, 봉사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운동하는 것과 같은데 부지런히 운동해야 무럭무럭 자랄 수가 있습니다. 좋은 종교서적을 읽거나 명상의 시간을 갖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소극적으로는, 우리가 성장하는 데 지장이 되는 장소나 환경은 피해야 할 것입니다. 어린애들의 예를 들어 말하면, 전염병 지역에 가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곡식으로 말하면, 잡초를 제거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도 이와 똑같습니다. 성경에서도 말씀하는 대로 우리가 세상과 친구가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친구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자라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자라나는 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점진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진리를 이해하는 일에 성장해 가야 한다는 것을 베드로가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그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지식과 그가 이 세상에 무엇을 가져왔는가에 대한 지식에서 자라가고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단순히 용서와 구원에 관한 지식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구원의 전체 계획과 목적에 관한 이해와 지식 안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이 편지에서 말하여 왔던 모든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영적인 투쟁의 성격을 점점 더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역사의 영역에서도 하나님께서 서서히 자신의 계획을 완성해가고 계심을 볼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의 최종적인 완성을 점점 더 이해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간다”는 말씀의 한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 교리를 연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주님과 교제를 통해서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아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그리스도를 아는 신비로운 지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 대한 단순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소유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관한 일을 아는 데 그쳐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지식에서 자라야 한다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저는 제 아내와 가정을 이룬 지가 40년 가까워 옵니다. 그런데 아직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역경에 부딪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고 주님의 사랑을 받는다면 우리도 바울처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 안에서 자라갑시다. 그의 사랑을 더 많이 압시다. 또한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진리의 모든 범위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와 같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이며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리지 않을 것이요, 우리를 후사로 삼으신 하나님께 합당한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십시오.” 어리면 이해를 못합니다. 실망을 잘합니다. 변하기를 잘합니다. 판단력이 부족합니다.

끝으로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 베드로가 그의 편지를 끝맺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편지를 시작할 때와 같이 편지를 끝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편지를 시작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는 말로 편지를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사도의 편지는 시작과 끝이 꼭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베드로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신약의 기자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교회의 주된 기능과 임무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의 편지 마지막에서 “은혜에서 자라가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말을 덧붙였습니다.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여러분, 성경은 심리학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를 잠시 동안 행복한 상태에 있게 해주고 우리를 기분좋게 해 줌으로 우리만을 위해주고 우리에게서 끝맺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입니다. 그것은 복음이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선언이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계획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만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아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데 있어서도 가장 필수적인 원리는 우리 자신을 보지 않고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봄으로 주님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책이며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두 주님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반드시 주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곧 기독교입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어떻게 그가 주님과 함께 거룩한 산에 있었으며 그가 어떻게 주님의 영광을 보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중심은 언제나 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전 생애와 그의 사상이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통제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 편지를 이러한 말로 끝맺고 있는 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너무 사랑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생애의 큰 소망은 모든 영광이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베드로 자신이나 그밖에 모든 사람이 가진 것이 주님께 다 봉헌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데서 나온 말입니다.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이 말은 사도 베드로가 의미하는 바를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2장에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의 마음속에는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그것은 그들의 불타는 열망과 지극히 큰 소망이었습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의 생활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이 되도록 활기 있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영광이 증대되기를 바라고 있습니까?”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국위를 선양하고 국가의 이름을 높인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의 생각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법이 되어야 하고, 그들의 전 인격으로 사랑하는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주된 소망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알고 찬미하며, 그들 자신을 그리스도께 복종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할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그에게 드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왜 이와 같이 영광스럽게 되셔야 합니까?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영광과 존귀를 받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온세상으로부터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있을지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내포된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 기독교의 중심 되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리스도의 행하신 기적,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고 주님이 보내신 성령으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 때문에 그에게 존귀와 영광도 돌려야 합니다. 그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인격은 세상에 오시어 그 모든 것을 참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그의 이름을 찬미하며 존귀와 영광을 그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멈춰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현재의 위치 때문에 그에게 모든 영광과 존귀와 찬미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위와 권능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하나님과 함께 보좌에 앉아 계시며, 지금 이 순간에도 바로 주님이 영광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려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이십니다. 모든 주권이 그에게 주어졌고 모든 권세가 그리스도의 손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 밖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앞으로 하실 일을 인하여 우리는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름을 타고 세상에 오십니다.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은 그리스도를 알아볼 것입니다. ‘영원한 날’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영광의 나라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주님께 영광과 존귀를 드려야 합니까? 우리는 그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광되게 해야 합니까? 그리스도께서 내게 생명을 주셨고, 소망을 주셨고, 내 삶을 변화시켜 주셨고, 모든 것을 바꾸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인내하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삶에 소망이 없고 단지 암흑뿐인 죽음 저편의 것과 함께 비참하고 불행하게 살고 있는 우리를 구원하사 기쁨으로 살게 하시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다주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해도 우리가 그의 영광스러운 나라에서 그와 함께 있고, 그리고 그의 영광되고 거룩하신 면전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라는 보증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있을지어다.” 이제와 영원한 날,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으며, 그리스도를 변화시킬 수도 없고, 그의 계획을 빗나가게 할 수도 없습니다.

성자 하나님, 곧 그 영광을 버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을 이기고 부활하셨으며,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 곧 오시어 그의 영광의 나라를 시작하시는 그리스도께만 이제와 그가 오실 때까지, 그리고 영원한 날까지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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