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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성숙 (요일 02: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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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말씀은 새로운 계명에 대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라”는 것은 권면이 아니라 계명입니다. 계명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신 대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계명의 대표인 십계명도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첫 계명부터 넷째 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라 한 것입니다. 다섯째부터 열째까지는 이웃을 이렇게 사랑하라 했습니다.
한번은 서기관 한 사람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 그때 예수님은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3장에서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강조하는데 그것은 거듭난 사람들 안에 이 사랑이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해야 되고 또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계명은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사랑해야 합니까? 4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사랑을 구체적인 모범으로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가장 구체적으로 실감 있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그 모범도 알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5절 이하에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마가복음 3장 17절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각기 별명이 있었습니다. 또 누가복음에도 야고보와 요한의 형제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가시다가 날이 저물어 쉴 곳을 찾으려고 교섭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부정적이었고 그들을 냉대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을 천대하는 유대인들을 사마리아 동네에서 쉬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은 능력이 많으신데 그 놈들에게 당장 벼락을 내려 멸망시킵시다”하는 제안을 했습니다. 이 일 후에 예수님은 이들을 가리켜 “보아너게,” “우뢰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사도 요한은 사랑이란 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질의 요한에게 깊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요한이서를 통해서 요한일서가 증거하는 삶들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교회사에 보면 사도 요한이 말년에 몸이 불편하고 병약한 상태에서 제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혹은 들것에 실려 다니면서 말씀을 전할 때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뇌성벽력 같던 격정적인 사람, 미움과 고발과 시기의 성품을 가지고 있던 요한이 주님을 만나고 성령을 충만히 받아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된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희망을 가집니다. 요한이 변해서 사랑의 사도가 된 것처럼 우리도 주님 안에서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요한일서를 쓴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 2장 1절에서 소아시아에 있는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여러 가지 신앙의 장점들을 칭찬하다가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렇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이 말씀에서도 가장 중심 되는 계명으로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7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을 보세요.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요한복음 12장 35-3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다른 빛들이 있어서 사람들이 그 빛들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어떤 빛은 진리의 희미한 명멸에 불과했고 어떤 빛은 진실한 것에 대한 희미한 섬광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따랐지만 결국 암흑 속으로 끌려들었고 거기에 남겨지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거의 비슷합니다. 여러 가지 불완전한 빛이 있고 허위적인 빛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사람들은 이 거짓된 빛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빛이요, 참빛이요 사람들의 갈 길을 인도하시는 진정한 빛이십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사람들에게 참빛을 가져다 주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은 어두운 밤을 헤치고 새벽 동이 트는 것처럼 의와 진리의 태양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참빛 되시는 그리스도는 의심의 어두움을 몰아 냈습니다. 참빛 되시는 그리스도는 사망의 어두움을 몰아 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빛이라는 낱말이 요한복음에 스물한 번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빛이십니다. 그래서 이 빛을 믿는 자는 빛의 아들이 됩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빛과 어두움을 사랑과 미움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만나 함께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더불어 예배하는 가운데서 성숙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소위 무교회주의자들이 무교회를 부르짖었지만 그들도 외로워서 같이 만나 성경 공부도 하고 교제를 합니다. 왜요? 그 교제 없이는 신앙이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떠나서 있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2절에서 14절까지는 교제를 통해서 신앙의 성숙이 오는 것을 말씀했는데, 여기 보면 네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12절에 “자녀들아” 했습니다. 13절에는 “아비들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청년들아” 했습니다. 14절에는 “아이들아”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신앙의 네 가지 연령 계층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말하자면 영적 연령을 가리킨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연령을 통해서 성숙해야 하는 단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각기 신앙의 특색이 다르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은 사람들은 “자녀들”입니다. 또 “아이들”은 아버지를 알기 시작하는 삶을 살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인 것을 알고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14절 중반에 나타나는 “청년들”의 상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청년들의 힘, 아름다움, 열정 등을 의미하는데, 말씀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는 영적인 청년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사단과 더불어 싸울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아비들” 은 태초부터 계시며 우주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깊이 알아 가는 삶을 삽니다.

가만히 보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교제를 하는 데도 이 네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나이는 많지만 신앙의 성숙에 있어서는 아이같은 사람도 있고, 나이는 어리지만 아비들도 있는데 이것은 자연적인 연령이나 교회에 다닌 햇수에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의 영성에 의해서만 점검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각기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서로 교제하면서 우리의 신앙은 자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영적 단계는 어떤 단계에 있습니까? 영적인 신앙의 나이는 몇 살쯤 되십니까?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을 때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습니까? 그런데 죄사함의 놀라운 사건이 없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사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을 절대로 하나님의 자녀라 부르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의 은혜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지금도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믿었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법적으로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 없는 사람처럼 간주하시고 받아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으며 그래서 성도라 일컬음을 받았다는 이 고백에 이의가 없습니까? 이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사건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속량했다는 그 사실을 믿고 신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하여 오늘 주신 말씀 14절에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이들”이란 헬라 말로 “Paidia”인데 경험이 부족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인이기는 하지만 영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이들과 같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로마서 8장 15-16절을 보세요.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는 놀라운 사건이 우리에게 일어났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를 향해서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더구나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어린애는 아버지를 부르기만 합니다. 대화가 잘 안됩니다. 어린애는 그저 달라고만 합니다. 아이들은 자라야 합니다. 성숙해져야만 합니다.

여러분, 아이들의 제일 중요한 특색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는 성숙한 성도가 없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와 갈등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절 말씀을 보세요.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같이 하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린아이같은 신앙의 수준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깊은 말씀을 주어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어린아이의 상태는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3장 3절 말씀을 보세요.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특색 가운데 하나는 시기와 분쟁입니다. 가정에서 자라나는 형제와 자매를 보세요. 하루에 몇 번이고 싸우고 다툽니다. 왜요? 시기해서입니다. 형이 좀더 많이 가지는 것을 못 보고 동생이 앞서는 것을 기뻐하지 않아서 싸웁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인 사실은 알지만 이기심의 껍질을 깨뜨리지 못하고 있는 유치한 상태가 우리 믿는 사람의 사회에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는 청년들입니다. 청년은 인생의 황금기입니다. 창이 열릴 수 있는, 말하자면 무한한 기회가 주어져 있는 시기이니다. 이 얼마나 커다란 축복의 계절입니까? 그런데 청년의 특징을 세 가지로 묘사했습니다.
우선 13절 하반절에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 보면 완료형 능동태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궁극적 승리란 말입니다. 청년은 전혀 실패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많은 갈등이 있은 후에 궁극적인 승리를 거둔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갈등을 겪으면서 승리에 도달하는 것을 배우고 사단과 싸워서 이길 줄 아는 사람이 신앙의 청년기에 속한 영적인 청년들의 모습입니다.

이어서 14절을 보세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강하다”는 말은 체력이 강하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말씀을 자기 마음속에 간직하고 말씀의 지배를 받으며 자기 삶에 적용할 줄을 알고 마침내 말씀의 인도를 통해서 신앙의 영적인 승리를 거둘 줄 아는 사람들이 말하자면 영적인 청년들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단과 싸우실 때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말씀을 아시고 적절하게 사용하시고, 그리고 승리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19편 11절에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며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도덕적인 시험을 받을 때 갑자기 마음속에 내가 간직했던 말씀이 살아나며 기억되어 그 말씀이 내 발걸음과 모든 행실을 지켜 나를 거룩하게 한 경험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것이 영적으로 성숙기에 도달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아비들의 특성은 어떻습니까? 13절 말씀을 보세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안다”하는 말은 객관적으로 또는 상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안다는 의미입니다. 가령 여러분이 죄를 아십니다. 그러나 체험적으로는 잘 모르십니다. 저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빼놓고는 제 아내입니다. 그렇게 경험적 지식에 의해서 안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전달해 준 하나님이 아니고 여러분이 직접 체험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유명한 사상가 카알라일이 살고 있는 동네에 신임 목사님이 취임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이 카알라일을 방문하자 그가 목사님에게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소문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체험으로 영혼에 부딪쳐서 안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말하는 앎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경험이 있는 사람의 고백을 말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안다”는 말을 “야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남자가 여자를 보통으로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성관계가 맺어졌다는, 깊은 앎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를 통해서 주님과 깊은 사랑 속에 빠지면서 주님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12절 말씀에 “이를 인하여 내가 또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참 놀라운 고백입니다.
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바울은 “내가 의뢰한 그분을 내가 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아는 것이 영적인 면에서 아비들의 상태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런 자리에까지 이르기를 바랍니다.

이제 끝으로, 성숙한 삶의 모습이 어떠한 것을 말씀합니다.
성장해 가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일서 2장 전체를 통해서 강조하는 중요한 명령이 있습니다. 9-16절에 있는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또한 15절에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할 것이 있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형제는 사랑하고, 세상은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하지 말아야 할 세상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상이란 말은 ‘코스모스(kosmos)’라고 하는데 이 말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물리적인 지구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는 말은 지구를 미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만물은 선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구는 사랑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류를 뜻합니다. 가령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할 때는 세상 속에 있는 영혼들을 사랑했다는 의미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무형의 영적인 존재입니다. 이 지구에는 두개의 나라가 공존하는데 하나님의 왕국과 사단의 왕국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사단이 통치하는 곳에 사단의 왕국이 확장됩니다.
복음이 증거되고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주권에 복종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단의 지배도 역사하는데 그것은 인간을 파괴시키기 위한 모든 사단의 잘못된 사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성경은 그런 의미에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세상의 정체가 나옵니다. 이러한 악한 사단의 지배하에 있는 세상의 세 가지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인데,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사단이 자랑하는 세 가지 무기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파괴를 도모하는 사단이 이 무기를 가지고 제일 먼저 누구를 찾아왔습니까? 아담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보니까 먹음직하고(육신의 정욕), 보암직하고(안목의 정욕), 지혜롭게 할 만했습니다(이생의 자랑). 그래서 사단의 공격 앞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먼 훗날 아담보다 훨씬 악조건에서 이 세 가지 악마의 유혹 앞에 담대하게 나서서 승리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둘째 아담 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사단이 광야에서 금식하고 계시던 예수님을 찾아와서 공격했던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떡-육신의 정욕, 천하의 영광-안목의 정욕, 성전에서 뛰어내림-이생의 자랑).

성경이 육신의 정욕에 대해서 얼마나 신랄하게 경계하고 있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육신의 정욕은 우리 안에 있는 부패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안목의 정욕은 눈으로 보는 것을 통해서 들어오는 유혹을 말합니다. 이생의 자랑은 무의미한 자랑입니다. 자기 자신을 오만하게 하는 위험한 자랑입니다. 야고보 4장 6절에 보면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단이 이것을 가지고 쉴새없이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은 지나갑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성숙한 삶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먼저 형제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합니다.

그러면 세상을 사랑하면 어떻게 됩니까? 고린도전서 11장 32절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세상과 함께 정죄되지 않는 귀한 삶을 누리기 위해 세상을 사랑하지 맙시다. 세상 좋아하고, 세상과 친구되고, 세상에 물들고, 세상 본받지 맙시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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