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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적 (요일 0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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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우리가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만, 요한일서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려 할 때 혹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가지려 할 때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는 사단의 공격이 있습니다.
이 적그리스도를 경계하고 대처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교제, 우리와 성도 사이의 교제는 자연히 단절되고 성도 사이에는 분열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루고 있는 요한일서 2장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요한은 적그리스도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신앙의 성숙의 정도에 따라서 자녀들, 아이들, 청년들, 혹은 아비들이란 말로 나누어 표현했던 사실을 보았습니다.
여기 오늘 주신 말씀에서도 “아이들아”하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청년들의 문제는 세상과의 문제지만, 아이들의 문제는 적그리스도와의 싸움에서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되자마자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이 첫 번째로 직면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과제는 올바른 신앙을 분별하고 진리의 말씀 위에 신앙을 견고하게 세우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인 어린아이들의 특징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에베소서 4장 14절 말씀을 보세요.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며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요동하기 쉽고, 잘 흔들리기 쉽기 때문에 꼬임에 넘어가기를 잘 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유괴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어린애들은 낯선 사람이라도 친절하게 대해주고 좋아하는 것을 주면 그 사람에게 끌립니다. 어른이 되면 낯선 사람이 친절하게 대하면 오히려 경계하게 되고 상식 밖에 지나친 행동을 하면 아예 멀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유혹을 당하기 쉽고, 마음이 흔들리기 쉽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이들이 요동하지 않고 견고하게 설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성경 기자들은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시간 아직도 내 신앙이 어린아이의 신앙이라고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여 내 신앙을 진리의 터전 위에 견고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의 1장과 2장에 세 가지 대조가 나오는데 1장 1절에서 2장 6절까지는 빛과 어두움에 대한 대조가 나옵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말씀은 어두운 데 거하지 말고 빛 가운데 행하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2장 7절에서 17절까지는 사랑과 미움을 대조시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워해야 할 것, 버려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사랑 가운데 행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생각하게 되는 요한일서 2장 18-29절에는 진리와 거짓에 대한 대조가 나옵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적그리스도의 유혹에 현혹되지 말고, 잘못된 가르침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말고, 진리 가운데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질문 앞에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빛과 사랑으로만 끝나는 것이 왠지 석연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가 강조하고 싶었던 진리 가운데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없는 빛, 사랑만을 강조하는 신앙은 자칫하면 신앙이 아닌 거짓된 인본주의로 인도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혹은 감상적인 도덕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이 빛과 사랑은 진리의 기초 위에 세워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여기서 진리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병원에 입원한 환자를 간호사가 정성과 사랑으로 간호해 드린다고 합시다. 환자는 간호사의 치밀한 간호와 돌봄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호사가 극약을 의약으로 잘못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갖다 환자에게 드렸습니다. 환자는 간호사가 가져온 약을 정성스럽게 받아 먹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신앙 생활도 그렇습니다. 진리에 서서 적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공격이 어떻게 주어지는지 아주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목회자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시편 23편 5절에 보면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셨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여름에 목자가 양들을 이끌고 높은 산을 향하여 올라갑니다. 그 길이 거칠고 험하고 위험합니다. 문자 그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습니다. 그런데 힘들지만 목자를 따라 고지를 향해 올라가면 거기에는 상을 차려 놓은 것처럼 공해 없는 푸른 초장이 펼쳐져 있습니다. 고지를 올라오느라고 피곤하던 것이 가시고 시원한 바람에 흐르던 땀이 식게 됩니다. 양들은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더구나 그 아름다운 풀밭에는 일찍이 보지 못한 아름다운 꽃이 피는 아주 먹음직스러운 풀이 여기저기 있어서 양들의 시선을 끕니다. 그런데, 목자는 양들이 가까이 가기 전에 그 먹음직스러운 풀들을 다 뽑아 버립니다. 이유를 모르는 양들은 투덜거립니다. 불평합니다.
그러나 목자에게는 그렇게 하는 뜻이 있습니다. 양들이 보기에 먹음직스러운 풀을 먹으면 온몸이 스름스름 마비가 되어 결국 죽고 맙니다. 보기에 먹음직하고 꽃이 아름답지만 그 풀은 독초입니다. 목자는 독초를 알기 때문에 양들을 위해서 뽑아버리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오늘도 여기저기 있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 적그리스도의 역사를 막아 하나님의 양무리인 성도들을 독초에서 건져야 하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 2장 18절을 보세요.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이 말씀에 두 가지 개념이 나타납니다. “마지막 때”라는 말과 “적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마지막 때”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은 언제부터 마지막 때라고 합니까?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부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긴 시간 같지만 영원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안목에서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장에 보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부분, 여러 모양으로 인간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여 오셨던 그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세워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역사 속에 찾아오신 그때부터 역사는 완성기를 향하여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이 마지막이 무르익어 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표현대로 지금은 마지막 중에도 마지막, 그래서 말세지말(末世之末)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그 마지막을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그때를 말씀하지 않았던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에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긴박한 의식 속에서 그들의 신앙을 재촉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놀라운 부흥을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그때 성도들에게 재림의 때를 솔직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가령 하나님께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상상해 보세요. “얘들아, 1998년 몇월 몇일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라고 말씀하셨다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주님께서는 그때를 영광스런 하나님의 비밀로 붙여두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종말론적인 긴장을 가지고 살기를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늘밤에 오실 수도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마지막 때임을 강조하면서 바로 적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역사를 통해서 태초부터 활동해 왔지만 가장 맹렬한 활동은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진짜가 있으면 반드시 가짜가 생깁니다. 수많은 가짜 종말론과 재림의 예언과 심지어 재림의 날짜들을 예언하던 사람들에 의해서 성경의 영광스런 종말론이 많이 격하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예 종말론을 포기하려고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가짜 종말론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종말론에 관한 굳은 신앙을 가져야만 합니다.

여러분, 왜 이렇게 가짜가 많습니까? 가짜가 많기 때문에 진짜가 없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가짜가 많은 것은 진짜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에 관한 분명한 사실이 있기 때문에 어두움의 세력은 이 사실을 교묘하게 모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어두움은 자기를 포기하기 전에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적그리스도라는 말의 “적”이란 말은 영어로 “anti”인데, 이 말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 대신 그리스도를 가장하고 온 자”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며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영으로서, 한마디로 사단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사단의 도구로 쓰여지는 많은 거짓 선지자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종말에 관한 많은 책자들이 나도는데 거기에 보면 한 명의 적그리스도를 특별히 강조합니다. 그것은 특별히 말세에 등장할 한 결정적인 적그리스도로서 그 적그리스도가 유럽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성경을 보는 것은 건전한 해석 방법은 아닙니다. 성경은 유일한 적그리스도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적그리스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사단에 의해서 사단의 도구로 쓰여지고 있는 진리를 왜곡하는 수많은 거짓 교사들을 총괄적으로 적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적그리스도가 누구며, 어디 있으며, 몇 년도에 태어났다고 말하면서 특정한 시대에 성경을 뜯어 맞추려고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해석입니다. 이런 해석은 삼가야 할 뿐더러 사실 귀담아 들을 것이 못됩니다.

교회사를 통해 보면 과거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오류를 저질러 왔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살던 시대가 마지막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을 핍박하던 네로 황제를 결정적인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666이란 숫자를 뜯어 맞추기 위해서 광분했습니다.
중세에는 교황들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뜯어 맞추다가 부합되면 그 교황을 가리켜서 적그리스도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히틀러가 한참 교회를 박해할 때 히틀러를 666이란 숫자에 맞추어 그가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666이란 숫자를 가지고 그러한 실수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건 하나가 생기면 그것으로 해석을 끄집어내는데 이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고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이 적그리스도를 가르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다면 적그리스도가 누군가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그렇게까지 의견이 분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적그리스도가 활동하는 그 특색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와의 교제를 거부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8-19절을 보세요.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속에 파고들어 올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가만히 들어왔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은연중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잘못된 신학, 잘못된 사상, 잘못된 교리의 영향력을 확산시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가운데 끼어 있을 수는 있지만 우리 중에 영원히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들 자신이 불편하고, 견딜 수 없고, 언젠가는 그 정체가 드러나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19절 말씀에서 사도 요한은 저희와 우리를 구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근본 진리의 문제가 아닌 이상 성도의 교제를 끊으려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이고 성경적인 연합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계속 깨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적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그가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려고 하는지 그 사실로 적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적그리스도는 참된 성경의 교리를 부인합니다.
본문 20-25절을 같이 보세요.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성경 교리 중에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 지엽적인 문제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의견을 달리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확실히 말한 어떤 교리에 이의를 제기하려는 사람들은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땅위에 있는 모든 교회의 모든 교리가 똑같이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으로 영감되었기 때문에 오류 없이 기록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받아들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근본 교리에 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가령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기독교 교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기독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와 그리스도는 누구신지에 관해서 대답을 달리 하는 사람은 사단에게 속한 적그리스도의 영들인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를 삼는 교리는 두 가지입니다. “그리스도론”과 “신론”입니다.
본문 22절에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그가 적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 예수가 바로 그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데 이의가 없어야 됩니다.

우리는 기독교가 체험적인 종교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 이전에 계시의 종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체험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체험이 곧 기독교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 위에서, 말씀이 허락한 범주 안에서, 말씀이 승인하는 체험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만을 적합한 체험으로 수용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교리에 대해서는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교리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몸이 이렇게 버티고 서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뼈가 있기 때문입니다. 뼈가 없으면 몸은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리는 우리 몸의 뼈와 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미국의 부흥사 중에 죠지 휫필드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한번은 그가 어떤 교인을 만나서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때 그 교인이 “저는 교회가 믿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당신의 교회는 무엇을 믿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네, 우리 교회는 제가 믿는 것을 믿지요”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래서 휫필드는 “그러면 당신은 둘 다 믿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네, 우리는 둘 다 똑같은 것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경이 정말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깊이 가져야 합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강력하게 부인하던 이단인 그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은 철저한 이원론에 입각해서 영혼과 육체를 나누었습니다. 물론 영혼과 육체는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전인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은 주님의 성육신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인 기독론을 왜곡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교리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본문 2장 20절과 27절 말씀을 보세요.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20절).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7절)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령을 기름 부으셨다고 말씀했는데, ‘기름 붓는다’는 말은 그 당시에 방을 밝히는 등잔에 기름을 붓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등 안에 기름을 넣고 불을 붙이면 환하게 비칩니다. 이 빛 앞에 모든 것이 밝아집니다. 우리 안에 찾아오신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진리를 조명합니다. 성령이 누구를 조명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4장 26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이 우리 마음에 부으신 바가 되면 모든 것이 밝아집니다. 확실해집니다. 주님을 밝히 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증거할 것입니다.

셋째로, 적그리스도는 성도를 미혹합니다.
이단이 누구를 찾아다닙니까? 모든 적그리스도의 영들이 역사하는 공통된 특성 중의 하나는 예수 믿는 사람을 찾고 성도를 미혹케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전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누가 찾아와서 신앙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면 떠나라고 말하세요. 그 시간을 아껴서 아직 주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하라고 도전하세요.
적그리스도의 영은 불신자들보다 성도를 미혹하는 일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요한은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특색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미혹하는 영”이라는 말은 바른 진리에 있던 사람을 탈선시키는 영이란 말입니다. 신앙의 궤도를 걷고 있는데 이 신앙의 궤도에서 탈선시키려고 하는 것이 바로 사단의 사역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지 아니하고 승리할 수가 있습니까?

우선 성령의 가르침에 거해야 합니다.
27절 말씀을 보세요.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고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적그리스도에게 빠지는 사람을 보면 대개 인간의 가르침에 너무 호기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신기한 소리 때문에 망합니다. 진리를 가르쳐 주는 최대의 교사는 성령님 자신입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께서는 우리를 잘 깨닫게 하기 위해서 교회 안에 은사를 주어서 어떤 직임을 가진 사람을 세우신비다. 신앙의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가르침의 은사를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27절 마지막 부분에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했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라는 것은 주님과 지속적인 교제를 가지라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진리 안에, 그리고 진리의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끝으로, 주님 안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인격과 삶을 지녀야 합니다. 적그리스도가 우리를 유혹하려 하다가도 우리의 삶을 보고 할 말이 없도록, 주님과 교제하는 삶이 만족하고 풍성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만족이 없고 답답함을 해결할 길을 찾고 있는 사람을 적그리스도가 유혹합니다. 신앙 생활에 행복하고 만족한 사람은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만족과 행복이 없는 사람이 여기에, 아니면 저기에 행복이 있을까 기웃거리다가 유혹의 손길이 미치게 되면 그만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주 안에 항상 거하는 생활을 해서, 원수들이 택한 자라도 미혹하려고 하는 이 혼돈된 상황 속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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