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의를 행해야 할 이유 (요일 03:1-10)

첨부 1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자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다른 하나는 마귀의 자녀입니다. 요한일서 2장 29절에 “너희가 그의 의로우심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로서 태어난 자로서 의를 행하는 것과 인격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3장 10절에서도 두 종류의 자녀를 구별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그러면 누가 마귀의 자녀입니까? 본문에서는 마귀의 자녀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미국 재무성에는 위조 화폐 탐색반이 있다고 합니다. 그 반에 들어가서 제일 처음 하는 일은 위조 화폐를 어떻게 만들며 그것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화폐를 만드는 과정을 배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만 잘 배워 놓으면 나중에 “이것이 위조 화폐다”라고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구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같은 원리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3장 1-10절에서는 의에 대해서 말하고, 11-24절까지에서는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삶의 양식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요한일서 3장 전체를 통해서 더 강조하고 싶어한 것은 나중에 있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강조하기 전에 의를 강조한 것은 기독교 정신은 의가 수반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의 사랑은 타협을 통해서 형성된 사랑이 아니라, 의를 통해 형성된 거룩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의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인격은 의로운 인격이 아니면 안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의를 행해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의를 행해야 합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1-3절까지의 말씀을 보세요.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했습니다.
이 사랑을 입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면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배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의로운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의 논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렇게 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그 명령을 어기면 큰 일 나니까 그래서 그렇게 삽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면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하거나 하나님의 기대에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사는 것이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무서워서 의를 행한다면, 이들은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서도 그의 삶의 동기를 아직까지도 그 두려움에 두고 있는 사람은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먼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물론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이 놀라우신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신적인 사랑(Divine Love)입니다. 이 사랑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무조건의 사랑입니다.
일반적인 사랑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해야 나도 너를 사랑합니다. 주고 받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전체를 비우시고 버려주신 자아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원수 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놀라운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하게 살아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거나 하나님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참고로 요한일서에서 몇 절을 같이 찾아 읽읍시다.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2장 29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3장 9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을 알고”(4장 7절).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5장 1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5장 18절).
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위대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그 놀라운 동기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태어났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사실을 선언합니다. 요한일서 2장 29절과 3장 1절 말씀을 보세요.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의 증거가 있습니다.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비록 우리 스스로 만족할 만큼 의를 행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전에 믿지 않을 때와는 분명히 다른, 의에 대한 사모함과 의에 대한 갈증, 또 의를 향한 열정과 갈망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과 신비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란 말입니다. 이 땅의 왕의 자녀가 되어도 특권인데 하물며 왕중의 왕 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세요. 이 이상의 특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신비한 것이 아닐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설명하기에는 신비로운 영역에 속하는 비밀인 것입니다.
3장 1절에서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이란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세상”이란 말은 불신앙 속에,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영역 밖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사랑의 비밀과 체험과 계약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이 사랑에 대해서 완전히 무지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인식합니다.
본문 3장 2절을 보세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고 선포한 이 사실을 우리는 당당하게 전해야 합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면서 그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여깁니다. 회사에 다니는 어떤 청년은 “목사님, 저의 회사에서 제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분 나름대로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않는 것보다 그리스도인이라 말하지 아니하고 살면서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는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인자도 하나님 앞에서 너를 부인하리라.”

어떤 회사나 기관에 가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믿는 친구들의 모임이라 해서 신우회(信友會)라고 합니다. 그런데 회사나 기관에서 신우회에 관계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조용히 나 혼자 예수 믿으면 되지 회사까지 와서 예수 믿는 사람 티를 내며 그럴 거 뭐 있나’하는 생각 때문에, 혹은 ‘신우회라고 모이는 사람들 보면 별거 없고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는데 그럴 바에는 나는 아예 참여하지 않겠다’ 해서일 것입니다. 또한, ‘믿는 사람이라고 해 놓으면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니까 밝히지 말고 회사에서는 좀 자유롭게 지내며 살아야지’하는 생각에서일 것입니다.

관계되는 분에게 “이 회사의 전체 사원의 몇 퍼센트 정도가 기독교인으로 등록이 되어 있습니까?”하고 물으면 대개 10퍼센트도 밑도는 6퍼센트나 7퍼센트가 고작입니다. 우리 나라에 예수 믿는 사람이 25퍼센트, 즉 네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회사에 등록한 종교란에는 예수 믿는 사람 네 사람 중에 한 사람만 예수 믿는다고 밝히고 나머지 세 사람은 예수 믿는다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는 결론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해서 그런 결과를 갖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주신 복음을 부끄러워 말라고 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부끄러워할 때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는 자녀 됨의 소망이 있습니다.
3장 2절에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이란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사용된 원어는 ‘호모유스’라는 말인데 ‘질은 다르지만 근사(近似)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안다”고 했는데 우리가 예수님이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에 의해서 아무리 거룩한 성화를 완성해서 영화로운 존재가 된다 해도 여전히 피조물이지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 인간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심연이 있습니다.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비슷하게 닮을 수는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그것도 주님의 능력과 사랑과 도우심을 통해서 우리는 영광스럽게 주님을 닮은 사람이 되어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복스러운 소망입니까 ! 디도서 2장 12-13절 말씀에도 주님이 다시 오실 그 사건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희망을 가리켜서 “복스러운 소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 되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깨끗한 인격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3장 3절을 보세요.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우리는 비로소 완전히 주님을 닮은 인격으로 완성이 됩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영화”(Glorification)라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설명을 했더니 이 말을 듣고 있던 사람이 “그러면 그때까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주님을 닮을 수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깨끗이 포기하고 그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 되겠네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론적으로 그런 설명이 가능할는지 모르지만 주님이 오시는 날 주님을 온전히 닮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진 사람은 지금부터 주님을 닮아 가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해질 수 있고,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깨끗해질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계명에 대해서 언급하시면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려고 제단에 가져왔지만 네가 그때에 네 형제 가운데 너로 말미암아 노여워하는 자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옆에 놓고 돌아가서 그 형제와 화목하고 와서 그 예물을 드려라. 그래야 네가 드리는 제물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이 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온전하고 깨끗한 자리로 나아가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깨끗한 자리로 나아가기 위해서 힘쓰면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온전히 죄 없는 자리에 올라갈 수가 있습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의 의견이 구구합니다. 웨슬레 같은 사람은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그리스도인의 완전론을 주장했습니다. 어거스틴 같은 사람은 이론적으로는 그렇게 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세상에서 이런 자리에 올라갈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격 완성에 대해서 가장 높은 표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가장 높은 표준에 이르기 위해서 꾸준히 노력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말했습니다.

더구나 이 연습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동행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능치 못할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으로는 할 수가 없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힘쓰면 날마다 온전한 자리, 깨끗한 자리를 향해 나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요한일서 3장 2절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아있을 때 육신으로 이런 완성의 경지에 이른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다음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장성해서 주님과 같이 되겠다고 성경이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다 높은 은혜를 사모합시다. 낮은 데를 바라보지 말고 더 높은 것을 바라보십시다. 흐린 날은 낮은 곳에 구름이 덮이고 안개가 덮여서 음침합니다. 그러나 비행기를 타고 높이 올라가면 거기에는 여전히 밝은 햇빛이 비칩니다. 보다 높은 은혜를 사모해서 오늘보다 내일, 이 달보다 내달, 금년보다 내년에 더 높은 은혜의 자리에 올라가서 좀더 온전한 자리, 좀더 깨끗한 인격의 자리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자녀로 잉태되고,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자녀로 태어나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자녀로 성숙하고, 하나님을 닮아서 자녀로 완성됩니다.

둘째로, 주님이 우리 위해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고,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다시 불의를 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5절을 보세요.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주님은 철저하게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8절에 뭐랬어요?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나타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의 명백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6절 말씀에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오해하기 쉬운 말씀입니다. 이것을 성경 원문에 기록된 그대로 나타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마다 습관적으로, 계속적으로 범죄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고 성령의 사역이 있기 때문에 죄를 짓지만 성령의 근심과 탄식하심으로 인해서 죄를 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이 없는 영혼들은 습관적으로 죄를 지으면서도 평안하게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원론적인 입장을 취해서 이 말씀을 영은 죄를 범하지 않고 육신만 죄를 범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해석입니다. 우리 사람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존재입니다. 인격이란 영혼과 육신을 같이 취급합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깨달았다고 합니다. 물론 구원받는 진리의 인식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서 자기의 생활을 전혀 책임지지 않습니다. 자기들만 구원의 지식을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지주의자와 아주 비슷합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아직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하는 데 조심해야 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경고하신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런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역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6절 말씀을 보세요.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7절에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라고 말합니다. 그 당시 영지주의자들의 교훈에 의해서 사람들이 미혹되고 있었으므로 신학적인 논쟁이 아닌 참 진리와 생명을 가지고 그리스도인 된 삶을 입증해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셋째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을 보세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본문에서 성령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고 “그의 속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죄를 습관적으로 지을 수 없는 것은 그의 속에 하나님의 씨인 생명, 말씀이 거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학자들에 따라서 하나님의 씨라는 말을 생명, 말씀, 성품 등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죄를 계속해서 범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우리 안에 부패한 성품이 없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나쁜 데서부터 점점 나아져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개선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낡은 성품 다시 말하면 옛 부패한 성품을 없이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놔두시고 우리 안에 새로운 한 성품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옛 성품은 그대로 있고, 그리스도의 새로운 거룩한 성품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미에서 더욱 갈등을 느낍니다. 옛 성품과 새로운 성품과의 갈등, 성령을 좇아 살려는 성품과 육을 따라 살려는 성품 사이의 갈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창조를 위한 갈등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갈등에 대한 부담을 짊어지고 헤쳐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유혹이 우리의 문을 두드릴 때 새로운 성품이 반응을 보입니까? 아니면 옛 성품이 반응을 보입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의 계속적인 삶의 선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의심하지 않지만 너무 연약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 자신의 삶을 드리며 사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따라서 성령의 지배 아래 우리가 살아야 할 의로운 행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왜 의를 행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위해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예수 닮아 가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