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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분별하며 삽시다 (요일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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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시절에는 오늘과 같은 전임 교역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순회 사역자들이 한곳에서 얼마 동안 전도한 다음 또 다른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되면 대단히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순회 전도하는 사람들을 잘 영접해서 대접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으로 영광스런 특권으로 여겼고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책임 가운데 하나로 여겼습니다.

제가 어릴 때 다니던 시골 교회는 그 당시에 큰 교회였습니다. 평양에 몇 개의 큰 교회가 있긴 했어도 천명이 넘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오백명이 넘는 교인이 있는, 큰 도시의 교회에 버금 가는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목사님을 정성껏 모셨습니다. 시골서 햇과일, 햇곡식이 나면 으레 목사님 댁에 갖다 드렸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우리 동네에 계시면서 주일 아침 예배를 인도하시고는, 20리 정도 떨어져 있는 교회에 가셔서 저녁 예배를 인도하시고, 수요일 저녁에는 또 다른 교회에 가셔서 예배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목사님이 많지 않아서 여러 곳에 다니시면서 전도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에서는 주일 아침만 목사님이 예배를 인도하시고 주일 저녁이나 수요 기도회는 교회의 집사님이 예배를 인도하셨고 방학 때는 신학생이 와서 예배를 인도하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전도사님이나 교역자를 성도들이 그렇게 정성껏 대접했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절에서 말하는 “형제”는 틀림없이 복음을 전하다가 갇힌 사람들일 것입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저 형제들의 사정을 남의 사정이 아니라 자신의 사정처럼 알아야 한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권고하고 있습니다.
똑같이 이러한 삶의 처지 가운데서, 언제 직면할는지 모르는 위기 속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으로 계속 전전하는 하나님의 사역자들과 이러한 손님들을 정성으로 영접해서 그들을 환대하는 습관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습관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하고 아름답고 고상하고 흐뭇한 습관을 악용하고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고 있던 거짓 종교 지도자들이 또한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요한이서를 읽어보시면 그 당시의 배경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요한이서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의 사회상을 배경으로 주어지는 말씀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을 모시는 일은 아주 귀한 일입니다. 접대하는 것은 아름다운 삶의 모습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악용해서 남의 가정에 불필요하게 부담을 지우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잘못된 교리 가운데 인도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떠나게 하려는, 미혹하려는 거짓 교사들이 등장하게 된 것을 이 말씀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라는 메시지가 이런 배경 속에서 주어집니다. 1절 말씀을 보세요.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낱말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 믿지 말고” 그리고 “시험하라”는 말입니다.
목사라고 하면, 전도사라고 하면, 선교사라고 하면, 심지어 은혜받은 사람이라고 하면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으로 그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교리에 접근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참과 거짓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그 분별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만이 유일하고, 타당성 있고, 객관적인 근거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기독교는 결코 이성주의적인 종교는 아닙니다. 인간의 지식과 이성을 모든 것으로 생각하거나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판단의 규범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반이성주의도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이 온전하고도 유일한 안내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진정한 신앙의 규범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말씀에서 구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때 우리 안에 허락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말씀을 건전하게 생각하게 하는 우리의 이성을 통해서, 우리의 부패된 이성이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새롭게 쓰임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이성은 성령의 인도 아래서 비로소 참된 것이 어떤 것이고 거짓된 것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하는 안내자가 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거짓 선지자들이 이미 세상에 있기 때문에 분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분별에 대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요한일서 4장 2-3절을 보세요.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눈 앞에 드러나는 것만 가지고 하나님께 속하였나 속하지 않았나를 분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참된 인식에 영원히 도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단도 얼마든지 외견상 나타나는 능력과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도들의 눈 앞에 놀라운 사건이 전개될 수 있습니다. 꿈이 신통하게 맞을 수도 있습니다. 예언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한 그대로 들어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깨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신 13:1-3)고 말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거짓된 것들을 허용하십니까? 아예 이 땅에 거짓이란 것이 없게 하시면 될 것 아닙니까? 그것은 우리가 정말 하나님에 대한 애정을 옮기지 아니하고 그 말씀과 인격에 대한 우리의 신앙이 굳게 머물러 있는지를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시험하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3장 4절 말씀을 계속해서 보세요.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앞에 어떤 기적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말씀에 대한 신뢰를 옮겨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아무리 성경을 많이 공부했어도, 올바른 신앙의 교리를 많이 배웠어도 눈 앞에 어떤 기적을 한번 보여주기만 하면 모든 것을 버리고 기적의 주인공을 따르려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에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근거는 “우리가 참된 신앙을 소유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이제 우리는 능력이나 기사나 이적이라는, 밖으로 눈에 보이게 드러나는 사건이나 현상에 의해서 참된 것을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가 어떤 것을 구별하려고 할 때 두 가지 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는 인격이요 다른 하나는 신앙고백입니다. 성경에 근거한 올바른 신앙고백과, 이 신앙고백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인격과 생활이 그 속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물어야 합니다. 이 둘 중에 어느 하나만 강조되어서는 안됩니다. 이 중에 하나를 소유해도 아직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사람이 훌륭한 인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생활의 모범이 될 정도로 성실하고 근면하고 어려운 지경에 있는 사람을 돕습니다. 나무랄 데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신앙고백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인격이 훌륭하고 생활이 고귀하다고 해도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교회에도 열심히 출석하고 직분도 맡습니다. 그러나 그 인격이 성실하지 못합니다. 자기 중심이고, 자기에게 손해가 조금 나는 것 같으면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합니다. 이중적으로 삽니다. 이간을 붙입니다. 이런 사람도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때때로 과거의 교회사에 나타난 이단들 가운데 인격적으로는 대단히 훌륭한데 본질적으로 성경을 왜곡시키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영과 적그리스도의 영이 등장합니다. 두 영을 분별하는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진위를 구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초점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교파나, 어떤 집단의 주장이 참된지 거짓된지 알려고 할 때 제일 마음을 써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어떤 고백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여러 가지 역사적인 논쟁이 있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 논쟁 때문에 예수님을 잘못 이해했던 사람들은 이단으로 정죄되고 또 그리스도를 참으로 고백했던 사람들이 기독교 역사를 형성해 온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오해한 이단 사상 혹은 집단이 있었습니다. 그때 같아서는 이단 사상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여지고 놀라운 세력으로 확장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진리 아닌 집단은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가령 기독교 역사상 대표적인 이단들을 생각해 보면 몇 되는데, 그 중에 에비온파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본래 유대인 출신으로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유대교는 철저한 유일신 사상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한 신이라는 데는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데 대해서는 이 문제를 소화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종종 말하는 노스틱파가 있었습니다. 이 노스틱파는 초기에 도케틱파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았습니다. 사도 요한이 오늘 주신 말씀에서도 거짓 영들이 있다고 말할 때 아마 제일 먼저 염두에 두고 공격한 이단이 이 노스틱파라고 봅니다.
이 노스틱파에서는 이원론을 주장했습니다. 영혼과 육신이 있는데 영혼은 거룩하고 육신은 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예수님이 추한 육신을 입을 수가 있겠는가, 예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영에 속한 분이시고 육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의 이론대로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지만 영이시기 때문에 그에게는 아무런 고통도 없으셨다고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리안파가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알렉산더가 반박한 이단으로 아주 유명한 파였는데, 본래 아리우스라는 사람이 이끌던 그룹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 최초의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피조물이나 다른 인간보다는 훨씬 우월한 존재이며 또 많은 신 가운데 하나로 간주될 수도 있지만, 결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차원에서 생각할 수 없고,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피조된 존재라고 인정했습니다.
오늘 여호와의 증인이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후 325년에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잘못된 가르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그리고 아폴리네리안파가 있었습니다. 이 파는 그레고리 나지아주스라는 사람이 아리우스 교리를 반박하면서 나왔습니다. 라오디게아의 감독이었던 아폴리네리우스라는 사람에 의해 체계화되었는데, 아리안 교리를 반대하다가 결국 다른 극단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아폴리네리안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네스토리안파가 있었습니다. 이 네스토리안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신이시고 완전한 인간이시라는, 양성의 진정한 연합을 부인했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마치 이중 인격적인 존재인 듯이, 괴물처럼 소개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주후 431년 에베소 종교회의에서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정죄되고 말았습니다.

하나 더 말하면 유티키안파가 있었습니다. 이 유티키안이란 사람은 콘스탄티노플의 교회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는데 역시 그리스도의 두 성품 사이의 진정한 연합을 부인했고, 나중에 신성이 인성을 결과적으로 압도한다고 고백함으로 인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주후 451년 칼세돈 종교회의에서 잘못된 가르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들이 주장하는 것을 살펴보면 모든 이단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했던 아니면 참으로 사람되심을 부인함으로써 잘못된 가르침으로 왜곡되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교리적 곡해의 현상은 옛날만 그런 것은 아니고 오늘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멀리 갈 것 없이 박태선 씨가 이끌던 전도관 집단을 보세요. 그는 본래 장로교회의 장로였습니다. 그가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이상한 말을 하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따랐습니까? 은혜의 이슬이 내리는데 회개한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고 하니까 그 이슬 보려고 눈을 비비며 애타게 따라다닌 사람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니까, 은혜받은 사람은 박태선씨의 몸에서 나는 향기를 맡을 수 있다고 해서 코를 킁킁거리며 따라 다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는 것을 카메라로 찍었다며 하늘에서 빛이 내리는 것처럼 조작 현상해서 많은 사람을 현혹시켰습니다. 구원받은 십사만사천에 들어가려면 가산을 정리해 가지고 신앙촌에 들어가야 한다고 해서 결국 패가망신한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심지어 신학이 정립되지 못한 목사들 가운데, 거기에 쫓아다니다가 망신하고 목회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목사가 몇 명이었습니까?

문선명 씨가 이끄는 통일교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처음에는 성경을 가지고 강해하더니 나중에는 통일 원리를 성경 대신 강론하게 되었습니다. 또 피가름이란 말을 써서 자기는 하나님으로부터 피가름을 했는데 자기와 피가름을 해야 구원받는다고 해서 가정을 파괴하는 일을 다반사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통일교 교인들의 피를 빨아 엄청난 재산을 가진 재벌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구원파도 그렇고 어린종도 그렇고, 그런 사이비적인 운동은 수를 세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정신 차리고 조심해서 말씀대로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간곡히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면 성경의 포괄적 교리를 이해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합니까? 그것이 왜 중요합니까? 거기에 우리의 생명과 멸망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단을 가려내는 가장 중요한 초점은 기독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3년 동안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이 가까웠을 때 3년 동안 훈련과 교육을 시켜왔던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졸업 시험 문제를 내셨습니다. 그 문제는 하나였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기독교에서는 예수께서 무엇을 가르쳤는가 하는 물음보다도 “예수님은 누구신가?”하는 물음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세계 다른 모든 종교에서는 그 종교의 교주가 가르친 교리나 교훈, 철학들이 훨씬 더 중요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예수님 자신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 말씀을 기억하세요.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적그리스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을 구별하는 가장 주요한 초점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분으로 본래 하나님이신데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신성에 대한 고백, 그분의 동정녀 탄생, 이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교회사의 전설을 읽어보면 도케틱파의 거두였던 게린토스라는 사람이 나타나면 사도 요한은 쳐다보지도 않고, 목욕탕에서 만났을 때 옷도 입지 않은 채 밖으로 뛰쳐나왔다고 합니다. 그는 그 당시에 참된 신앙을 무분별한 진리 가운데 오도하게 하는 이단들을 보면서 대단히 분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노스틱파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이 노스틱파는 문자 그대로 영적인 지식을 강조하는 영지주의자들입니다. 사상적인 배경을 말씀드리면 그들은 파사 나라의 조로아스터교와 헬라의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탄생한 신학적 종교적 이단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원론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조로아스터교는 선과 악의 영원한 존재를 믿습니다. 선과 악이 영원히 공존하면서 선한 신이 악한 신을 지배할 때는 모든 것이 잘되고, 악한 신이 선한 신을 지배할 때는 모든 것이 잘못된다는 이론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이론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파괴적인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아주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언제 악한 신이 이길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론대로 하면 역사는 영원히 미궁 속에 빠져들어 갈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원론이 아니라 철저하게 일원론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악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지배하에 허용되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이 처리하실 수가 있습니다.
이원론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에서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더럽고 악한 육체를 입고 오실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들은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시켰습니다. 예수님이 30세 되기까지는 인간이었는데,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는 그 순간 비로소 신성을 입고 그리스도가 된 것이고, 그 다음에 다시 인간 예수로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사 승천하셨다고 말합니다.

더구나 영지주의자들의 생활은 금욕주의적이면서도 쾌락주의였습니다. 육체는 악하고 더러운 것이기 때문에 영적인 생활을 하려면 육체를 억압하고 학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스토아 철학과 통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와 비슷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늘에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적그리스도에게 승리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 속해 있을 때, 내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내가 응답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사단을 정복할 수는 없습니다. 사단은 우리보다 지혜롭고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와의 싸움에서 내 힘만 의지하면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단은 능력은 있지만 전능하지는 못합니다. 지혜는 있지만 전지하지는 못합니다. 오직 전지 전능하신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했을 때 우리는 이미 “저희를 이기었나니”라고 했습니다. 도덕적인 삶이나 교리적인 다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굳게 주님을 붙들고 소유한 사람마다 이미 적그리스도의 영들에게 승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겨 놓은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희망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옥은 이 희망을 영원히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5-6절 말씀을 보세요.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며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사도 요한은 여기서 “저희”라는 말과 “우리”라는 말을 아주 날카롭게 구별하고 있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사람들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 그것이 내 인격을 결정하고 내 성분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자녀들은 사단의 자녀끼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끼리 함께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선교의 사명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내 생활의 한 중심에 신앙적 교제를 이루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백성된 특권이요, 또한 요청인 것입니다.

이 복잡한 세상, 진리와 거짓이 뒤엉키고, 하나님의 영과 마귀의 영이 함께 역사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말씀 따라 살아감으로, 바른 신앙 생활하고 약속하신 대로 앞 길이 평탄하고 형통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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