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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요일 04: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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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요한일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과의 교제 그리고 사람 사이의 교제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교제하고자 하는 대상이신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7절 말씀을 보세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정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들은 하나님께로 태어난 자로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고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랑함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결과론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으면 마땅히 사랑이 있어야 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이 사실이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났으며 하나님을 안다는 것에 관한 증거가 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하기만 하면 아무 것이나 믿어도 상관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하기만 하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괜히 폭 넓은 마음의 소유자가 되려 하지 마세요. 성경은 오히려 참으로 신뢰하고, 의지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만이 진실로 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사랑이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가능케 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은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행동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요한일서 4장 9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가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나타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씀으로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요? 하나님과는 원수가 되는 세상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했었습니다. 마틴 루터의 말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벌써 몇 번이고 멸망하고 말았을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로마서 5장 6절 이하에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주신 것으로 사랑의 구체적인 증거를, 그 역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독생자를 주심으로 그의 사랑을 공개적으로 표현하셨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공개적으로 표현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 동양 사람은 기질적으로 사랑을 잘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저 은근히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을 사람들 앞에 나타냅니다. 구체적으로 결혼식을 할 때 결혼이 선포되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신랑과 신부가 입을 맞춥니다. 그런 것 보면 서양 사람이 우리 동양 사람보다 더 하나님을 닮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하시고, 행동으로 그 사랑하심을 드러내시고, 구체적으로 나타내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칼 바르트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구약에서 “하나님은 숨어 계시다”라는 유명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부분적으로 타당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의식과 규례의 배후에, 제사 형식의 배후에 숨어 계셨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던 하나님, 잘 잡히지 않던 하나님을 신약에 와서 볼 수 있게 되었고 만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 크리스마스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볼 수 없던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봄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질 때 그들은 하나님을 만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손수 만져 본 경험이 있는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고, 의사에게 다니느라고 있던 재산 다 없어지고 절망 상태에 있었지만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기다리고 있다가 예수님의 일행이 지나가시게 될 때 그 많은 사람을 헤치고 달려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만지는 순간 12년 간이나 혈루증으로 고생하며 소망 없이 살던 이 여인이 깨끗이 낫게 된 것을 느꼈습니다. 주님의 옷자락을 만진 이 여인은 하나님을 만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신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은 어떠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십니까? 예수님의 인격적인 모습이 어떻습니까?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요한복음 14장 9절에서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간청할 때 주님은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0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났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또 누구를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미 생각한 바 있는 7절 말씀에서 우리가 사랑이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10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씀하면서 11절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로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고 의무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했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책임질 수 없는 사랑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감상에 젖은 사랑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참된 사랑이란 책임질 수 있는 사랑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랑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와의 교제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역사하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나타내셨다는 사실도 귀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와의 사이에 이 사랑이 계속되도록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 또한 귀한 것입니다. 이 사랑은 계속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놀라운 교제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와 위대한 사귐을 갖기 위해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모습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구약 창세기를 읽어보면 “걷는다”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가령 창세기 3장 8절에 보면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에 죄가 들어오자마자 하나님과의 동행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으로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또 찾아오십니다. 창세기 5장 21-22절을 보십시오.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라고 에녹과 거닐던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6장 9절에 보면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말씀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창세기 17장 1절에 보면 “아브람의 구십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했습니다. 온전한 생활, 깨끗한 생활을 해야 하나님과 교제할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24장 40절에 보면 “주인이 내게 이르시되 나의 섬기는 여호와께서 그 사자를 너와 함께 보내 네게 평탄한 길을 주시리니 너는 내 족속 중 내 아비 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 것이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걷기를 원하시는 모습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 생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걷는 생활입니다.



1.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2. 어린아이같은 우리 미련하고 약하나
주의 손에 이끌리어 생명 길로 가겠네


3. 꽃이 피는 들판이나 험한 골짜기라도
주가 인도하는 대로 주와 같이 가겠네


4. 옛날 선지 에녹같이 우리들도 천국에
들려 올라 갈 때까지 주와 같이 걷겠네
(후렴)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사랑하는 여러분, 평생을 주님과 함께 걸으시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25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걸으시다가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라고 명하십니다. 장막을 지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살도록 명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영광의 장막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일시적인 장막에서 영구한 집인 성전이 지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을 정성을 다해서 건축하여 봉헌하던 그 날을 상상해 보세요. 그 날의 감격을 보세요. 성전 건축은 실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위대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커다란 열망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아름답게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짓는 축복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주어졌습니다. 다윗은 모든 준비를 다 해 놓았고,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솔로몬이 이 성전을 봉헌할 때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이 이 집에 가득하게 임하시고 주께서 그의 백성들과 교제하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계속해서 영원히 이 땅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아름다운 성전, 세계의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였던 예루살렘 성전, 하나님의 거하심의 상징이었던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왜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졌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성전에서 떠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떠나신 성전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여 다시 성전이 재건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이 땅위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는 것을 가장 완벽하게 드러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2장 19-21절의 말씀을 살펴보면 성전 곁에서 예수님과 유대인 사이에 오고 간 흥미 있는 대화를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친히 거하시는 집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전히 아름답게 거하십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서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옛날 찬란한 성전 안에 계시던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찬연히 드러났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세상에 늘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시기 직전에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은 예수님 자신의 영이고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성령은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인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본문에서도 “거한다”는 말이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확실한 관계가 맺어진 사실에 대해서 세 가지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


2. 성령이 내주하고 계시다는 것.


3.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시인했다는 것.

이처럼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아무도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맺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걸으십니다.

결론적으로 이와 같은 사랑이 우리에게 이루어진 증거를 제시합니다. 17-2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17절을 보세요.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어떤 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움은 이미 형벌의 시작입니다. 지옥의 심판이 두렵지 않은 이유는 내가 그분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고, 사랑의 아버지는 나를 거기로 결코 보내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이 사랑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시켜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5장 24절에 아주 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참되게 주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왜요? 예수님이 우리 대신 이미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심판을 생각하면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이 우리 안에 사랑이 이루어진 증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경건한 두려움을 가집니다. 우리 주변에서 그리스도 없이 살다가 죽어 가는 마지막을 목격할 때마다 그 두려움을 똑똑히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신뢰하는 사람들 안에는 확실한 믿음, 주님을 만나는 간절한 기대를 그의 얼굴 속에서 환희를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인류의 조상 아담이 죄를 범하자마자 생긴 것이 무엇입니까? 두려움이었습니다. 누가 말한 것도 아닌데 “내가 두려워 숨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자마자 이 두려움은 변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담대한 사랑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끝으로, 형제 사랑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하나님 집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가질 때 가장 기뻐하는 사람은 가장(家長)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에서 가장은 누구십니까?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형제가 서로 사랑하라고 당부합니다. 시편 133편에도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했습니다. 형제는 사랑의 대상이지 미움의 대상은 아닙니다.
20-21절을 보십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 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너무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이것은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신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보이는 형제를 사랑치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계명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계명입니다.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고 안하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시험하려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율법은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면 어떤 축복이 임합니까?
서로 사랑하면 이웃의 허물이 가려집니다. 베드로전서 4장 7절 말씀에 보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면 이 죄가 덮어집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이웃의 허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웃의 잘못이 자꾸만 눈에 띄어 거슬립니까? 사랑하지 않아서 그럽니다. 이웃의 잘못이 보이지 않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랑은 망원경으로 보는 것이고 미움은 현미경으로 보는 것이다.” 이웃을 보실 때 망원경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현미경으로 보아서 허물만 들춰내는 일은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정의 식구를 볼 때도 사랑으로 보세요. 교인끼리도 사랑으로 보세요. 동포끼리도 사랑으로 보세요. 이웃을 사랑하면 죄가 가려지니까 마음이 평안합니다. 그러나 이웃의 허물이 자꾸만 눈에 띄면 마음의 평화가 없어집니다.
또한 서로 사랑하면 하는 일에 부담이 없습니다.
요한일서 5장 2-3절을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사랑에는 수고가 따릅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에게 수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를 위하여 수고하는 것이 짐이 되지는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교회의 각 방면에서 봉사하는 수고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그것이 부담이 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합니다. 같은 일을 해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과 사랑 없이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부모 없는 자녀를 데려다가 돌보는 사람의 수고를 보세요. 예수님을 사랑하니까, 그 아이들을 사랑하니까,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봉사하므로 옆의 사람이 감동을 합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요한복음 13장 35절에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예수의 제자입니까?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입니까? 직분을 맡은 사람입니까? 제자 된 표시는 서로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사랑할 수 있습니까? 결심하면 됩니까? 노력하면 됩니까? 아닙니다.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오순절 때 성령 충만히 받은 사람들에게는 사랑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마음의 뜨거움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성령이 충만히 임해서 주님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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