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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의 교제 (요일 05: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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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그 교제의 근거는 영생입니다. 그래서 11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영생을 누가 주셨어요? 12절을 보십시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생을 주십니다.

무엇이 영생입니까? 어떻게 얻습니까? 이런 것들을 알 수 있는 것이 어디입니까? 그것은 성경입니다. 13절 말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영생이 무엇입니까?
11절 말씀에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영생이란 무엇을 행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선물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만 그 공적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생의 교훈을 가르칠 때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수여하시는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뭐랬어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 이하를 보세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에는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했스니다. 이처럼 영생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다는 사실을 성경 여러 곳에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영생을 얻는 과정이 어떻습니까?
영생을 소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을 주시려고 우리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지옥을 향해서 가는 나를 찾아 오셔서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며 내가 죄인 됨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영생이 필요하다는 주의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 내 마음의 문을 열고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그 순간에 주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했을 때 그 믿음 안에서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호의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그 응답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영생의 확신을 어디서 얻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성경입니다. 지금까지 사도 요한은 영생을 얻었다는 주관적인 증거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관적 증거들은 분명히 잘라 말하기는 어려운 데가 있습니다. 그런데 13절 말씀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객관적인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확실히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성경을 쓴 것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함이라”고 하신 말씀을 굳게 붙드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영생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말씀해 보면 그들은 한결같이 느낌이 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영생은 느낌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다른 어떤 책보다도 권위 있고 신뢰할 만한 책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나에게 영생이 있다고 확실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근거하여 영생을 얻은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성경만이 모든 진리의 사실을 증언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믿는 것이 믿음이고, 사실 아닌 것을 사실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 미신이고,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것이 불신입니다. 믿음은 항상 사실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교제하는 길은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바른 교제가 이루어졌다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삶이 열려야 합니다.
어떤 태도로 기도해야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기도할 때 담대하고 확신 있는 태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이가 이 믿음을 통해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기도가 응답받을 수 있습니까?
응답받는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14절 말씀을 보세요.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했습니다.
신앙 생활이란 것이 마치 인간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것인 듯한 분위기가 오랫동안 한국교회의 분위기를 휩쓸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일 뿐 아니라 불행한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근본부터 뒤엎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직도 그런 가르침이 우리 주변에 많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목회란 것은 인간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는데 사실 이것은 기독교의 원리를 모르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필요, 하나님의 뜻이 신앙인의 궁극적인 관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왜 기도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필요를 이루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기도의 궁극적인 관심은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란 사람의 뜻을 하늘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땅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성자라고 불리는 죠지 뮬러는 “기도는 하나님의 주저하시는 마음을 돌려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마음을 따라 가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정의입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도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뜻을 이루고자 하실 때의 마지막의 그 결과만 작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취되는 그 과정도 작정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기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이 우리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작정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기도 없이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통해 그분의 뜻을 이루고자 하시는 것은 나를 하나님의 드라마에 동참시키시는 하나의 위대한 축복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일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름답고 풍성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를 할 때도 늘 주의 뜻을 살펴야 합니다. 단순히 내 정욕, 내 욕심에 근거한 기도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복음의 선포를 위해서 필요한 기도인가 성경에 비추어 묻고 살피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음으로 주님과 놀라운 교제를 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모범적인 기도에서도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삼아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마지막 주의 기도처럼 우리도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15절에 보면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 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에 보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도의 초점을 하나님의 영광에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생각대로만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리란 확신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 유지해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흔들림이 없지만 때때로 교제가 흔들릴 수는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한번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상태는 영원히 변함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나 사이에 바람직하지 못한 사태가 벌어질 때, 아버지와 나와의 대화가 끊어질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와 같은 불행한 교제의 단절을 막고 계속 교제를 유지해 나갈 수가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다루고 있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교제가 왜 끊어집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죄가 들어오면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맙니다. 시편 66편 18절에도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에서는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부부 사이에 좋지 못한 관계가 계속되면 기도가 막힙니다.

부부지간뿐만 아닙니다. 잘못된 인간 관계에서 올바르게 반응하지 못하게 되면 기쁨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주님과 나 사이의 사귐이 끊어지는 아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인간관계에서 그리스도인다운 태도를 취하는 삶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5장 23-24절에서 불편한 인간관계로 형제 사이에 원망들을 만한 일들을 그대로 두고 제단에 예물을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열납하시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제가 끊어진 비극적인 상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관계에서의 불화뿐만 아니라 잘못한 것 없이 일방적으로 당한 일에서도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태도를 나타내지 못하면 역시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말은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0절에 뭐랬어요?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순종입니다. 반대로 불순종하면 주님 안에 온전히 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단절됩니다. 하나님께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속히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면 빨리 거기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게 되면 아주 중대한 불행을 초래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범했을 때 신속히 할 일은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할 일입니다.

16절에서는 우리 주변에서 죄를 범한 사람을 보았으면 그리스도인들이 구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형제 가운데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한 사람을 보거든 달려가서 그를 위해 도와주며 기도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5장 15-16절을 보세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야고보는 범죄 가운데 빠져있는 사람들이 돌아설 수 있도록 그들을 돕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5장 19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이라고 말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신 말씀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했다면 도와 주어도 소용이 없고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는 원칙을 말씀합니다.
그러면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상한 뜻으로 비약시켜서 해석하려 하지 말고 오늘 주신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문자 그대로 사망이 무엇인지를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망’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육신적인 사망으로 해석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생명을 거두어 가시게 하는 죄를 범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그런 죄를 범했고 그래서 하나님이 내 생명을 거두어 가시기로 이미 결정되었다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 기도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주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말씀과 그 맥락이 일치합니다. 17절에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죄 와는 다른 것임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 사망에 이르는 죄를 사함 받을 수 없는 죄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가령 마태복음 22장에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함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했는데, 여기서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죄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칼빈은 신자와는 상관없는 불신자가 범하는 죄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부딪친 사건을 배경으로 해서 나타난 경우입니다. 사함받을 수 없는 그 죄를 지금 생각하는 말씀의 신자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고, 또 그것이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메시야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범죄, 그리고 사단을 따르는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사함을 받을 수 없는 범죄인 것입니다.

우리가 칼빈의 이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본문에 나타난 사망에 이르는 범죄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편지는 믿는 사람에게 쓰고 있는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 사망에 이르는 죄는 신자들이 범할 수 있는 죄입니다. 이것은 신자들이 어떤 죄를 범했을 때 육체적으로 죽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복음 12장에 나타난 소위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그 죄와 구별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시고, 성령의 인치심을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어떻게 성령을 훼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죽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청지기로서 충성을 부탁받았는데 목숨 관리를 잘못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말대로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다 끝났다면 주께서 나를 데려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1장 18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과 시몬 베드로의 대화에서 베드로의 순교의 죽음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우리의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때 주님은 그 사건, 그 현장에서 생명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주의 만찬에 대한 교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일, 다시 말해서 나를 구속하기 위해서 흘리신 보혈과 또한 나를 위해서 제물로 드려졌던 주님의 몸의 거룩한 희생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을 경솔하게 대하면 주님과 나 사이의 교제를 등한히 하고 주님을 존귀히 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당시 주의 만찬을 경솔하게 여겼던 사람들을 주님께서 징계하신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계속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머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등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을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고전 5:1-2).
그 당시 고린도에는 유명한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었고 이 신전에는 수많은 창녀들이 은거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 도시는 더럽혀진 성에 오염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마저 거기에 영향을 받아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교회가 징계하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면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성경은 그들을 물리치라고 엄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은 분개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4-5절을 보세요.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람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습니다. 불륜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육신을 멸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중요한 단서를 붙여서 육신은 멸해도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얻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한 번 얻은 구원을 다시 잃어버린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그를 다루시는 마지막 징계의 방법은 목숨을 가져가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아도 이런 예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물론 모든 죄가 다 육체적인 죽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범죄는 육체적 죽음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끝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의 특권을 확신하라고 하십니다.
18절을 보세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죄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는 죄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자마자 우리 안에 새생명이 거하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속에 심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이 말은 우리가 전혀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습관적으로 죄를 범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죄를 범했다면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여기서 “만지다”는 말은 본래 헬라어로 “하토마임”이란 말인데 그것은 “꼭 붙잡는다”는 뜻입니다. 사단이 우리를 슬쩍 건드리고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우리를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왜요?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 아래 보호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절을 보세요.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온세상은 악한 자의 안에 처한 것이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는 사람들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 확신으로 죄를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흉악한 자를 이길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이 내 안에 거합니까? 지배합니까? 붙들고 있습니까? 묵상합니까? 비추어 보십니까? 성령의 검, 말씀을 가지고 놀라운 교제 안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결론이 무엇입니까? 21절 말씀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우리 마음속에 탐심이 가득할 때 하나님이 자리잡을 여유가 없습니다. 그때 내가 탐내고 있는 대상이 내 마음속에 우상으로 군림합니다.

요한일서를 강해하면서 살펴 본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놀라운 생명의 교제, 사랑의 교제, 거룩한 교제를 방해하는 방해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나와 하나님의 교제가 우리 삶의 우선 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내게 우상이 없습니까? 지금 당장은 없지만 우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은 없습니까? 그것 때문에 주님을 더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까? 주님께 나 자신을 드릴 수 없게 한 그 무엇이 없습니까? 그것이 돈입니까? 지식입니까? 권력입니까? 이성입니까? 게으름입니까? 잘못된 습관입니까? 취미입니까?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돌이키기에 방해하는 모든 것, 그것을 던져 버릴 때 나를 향해서 계시되시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주님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를 사로잡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가장 행복한 사귐의 삶을 시작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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