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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망은 시련보다 강하고 (벧전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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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지도자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을 꼽자면 베드로와 요한과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가리켜 특별히 ‘믿음의 사도’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를 통해서 믿음에 대해서 잘 알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사랑의 사도’라고 합니다. 또 베드로는 ‘소망의 사도’라고 합니다.
이 시대는 소망이 필요한 세대입니다.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꿈을 잃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집착하기 때문에 소망에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비전과 소망’이 없으면 백성이 방자하게 행한다고 말합니다. 소망이 없으면 사람들은 현실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쾌락과 육신의 욕망에 빠져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복중 하나가 ‘소망’입니다. 믿는 자에게 참 소망이야 말로 고난을 이기는 용기와 힘의 근원이 됩니다. 단테는 작품 ‘신곡’에서 ‘이곳에서는 일체 희망을 버려라’는 말로 지옥을 표현합니다. 희망이 없는 삶이야말로 바로 지옥입니다. 지옥 같은 삶은 고난이 있는 삶이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고난은 우리를 절대로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고난 자체가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이 닥쳐왔을 때 절망이 우리를 무너뜨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망하는 것은 마귀에게 패배하는 것입니다.

절망 가운데 얻은 소망

베드로전서가 기록된 때의 시대적 상황은 교회가 핍박을 받을 때였습니다. ‘쿼바디스’라는 영화를 보면 그 시대의 모습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는 네로 황제가 통치하고 있던 때로서 그의 광기는 극에 달해서 네로는 로마의 구도시를 불태우고 그 책임을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단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어 매를 맞고 심지어 원형경기장에 끌려가서 맹수의 밥이 되기도 하는 등 온갖 참혹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핍박가운데서도 성도들에게 소망을 가져 핍박을 이기도록 서신을 통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 자신도 고난을 아는 사람으로서 실패를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베드로 사도는 열정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무척이나 충성스러운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단순하고 순전한 사람으로 두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우직한 사람이고, 남자다운 사람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배반의 아픔을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사실, 사랑하는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갔다는 사실은 이런 성품을 가진 그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난이고 슬픔이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중 하나가 요한복음 21장의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여러차례 만나주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다시 일어서서 교회를 수습하고 사람들을 다시 모아서 믿음의 경주를 계속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의외로 그는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서 고기를 잡는 생활을 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고향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모습은 자연스러운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차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직후에 낙향을 감행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어쩌면 베드로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에 더 큰 부담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지만 베드로는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했던 내가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께...’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는 ‘그때 믿음을 지켰더라면...’이라고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는 절망감과 후회하는 마음으로 죄책감을 안고 낙향했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를 사랑하셨고 다시 세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참 소망이었습니다. 그는 넘어졌던 사람으로 실패와 고난의 아픔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고난을 이기는 힘이 믿음과 소망의 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과 소망으로 핍박받고 있는 성도를 위로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1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그는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베드로전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 때문에 흩어졌고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고향땅에서 정착하고 안정된 삶을 살고 싶었지만 핍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흩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또는 법적인 잘못을 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쫓겨다녀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도 흩어진 나그네들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한 복판에서 믿음으로 살아야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세상 가운데 보내지만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복음의 사명을 위해 잠깐 머물다가 떠나가는 것입니다.

나그네로서의 삶

우리 교회는 2천/1만 비전을 가지고 모든 성도가 흩어질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외국에 1만사역자로 파송을 받고 떠난 한 성도로부터 엽서 한장이 왔습니다. 그는 교환교수로 떠난 그곳에서 연약한 교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늘 은혜를 받는 입장에 섰던 사람이 섬기는 입장에 서서 큐티와 일대일제자양육 등으로 섬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헌신을 통해 교회가 서가는 것을 보며 자신이 사역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는 그곳에서 왜 우리교회의 성도들이 흩어져야 하는가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이들은 원치않는 상태로 정든 곳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원치않는 곳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 ‘아멘’으로 응답하십시오. 사람이 보낸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보낸다고 생각하십시오. 그곳이 오지일수록 오히려 더 ‘아멘’이라고 외치고 떠나십시오.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예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성경을 봐도 믿음으로 즐거이 떠나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핍박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는 곳 마다 주께서 함께 가셨고,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온누리교회’입니다. 우리가 온누리에 흩어지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는 나그네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이들에게 평안을 약속하셨지만 그것은 세상 평안이 아닙니다. 그분이 약속하신 복도 세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해서 만사가 형통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넓고 편안한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의 영광은 반드시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광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이땅에서 지불해야하는 대가가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으면 해결되고 바뀌는 점이 많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으면 도덕적으로 깨끗해져서 죄를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게으른 사람이 부지런해집니다. 정직하고, 열심히 살게 됩니다. 그래서 받는 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받는 고난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적인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기 때문에 버리게 됩니다.
게다가 영적인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다. 가족들 간에 갈등이 생깁니다. 예전 같으면 목소리를 높여 싸우기라도 할텐데 이제는 예수를 믿어서 싸우지도 못합니다. 그것만도 작은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 삶에는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그것을 억울하고 힘들게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나그네이므로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땅이 전부인 것 처럼 뿌리를 내리고 살 때 오히려 교회와 믿음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을 보십시오.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가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야곱의 경우도 바로가 나이를 묻자 ‘1백 30년의 나그네의 세월을 살았지만 조상들에 비해서는 짧은 세월을 험악하게 살았다’라고 대답합니다.
늘 여행하는 사람이 많은 짐을 가지고 다니면서 가는 곳곳마다 집을 짓고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나그네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꼭 필요한 것만을 가지고 영원한 본향을 향해서 나아가야 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것입니다. 이땅의 사람들이 때로는 우리를 무시하고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당하는 일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베드로전서 1장 2절을 보십시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이땅에서 우리가 예수 잘 믿고 성령충만하게 살았다고 세상이 박수를 쳐주지는 않지만 우리를 알아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는 나그네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선택받은 자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 우리를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미리 정하여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미리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알고 정하신 백성이 아니면 예수를 알고 믿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가 결단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셔서 은혜로 구원하셨기 때문에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받았다는 가장 큰 증거는 이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두가지의 선택을 해야합니다. 먼저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세상에서도 사랑과 인정을 받고 하나님께도 사랑과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길은 거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진지하게 하나님을 따르고 온전히 주님을 따를수록 우리는 세상과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과 우리는 서로 맞지 않습니다. 대화도 되지 않고 함께 나눌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것은 복음뿐이며 그밖에 것은 별로 없습니다.

소망은 전능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세상과 가족과 친구들과 아무런 갈등이 없다는 것은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자로 설 때 세상에서 손해보고 핍박받을 때 우리는 오히려 찬송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우리가 이 땅에서 비록 환영받지 못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지만 감사해야 될 이유 중 하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진 자가 됐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소망의 사람입니다. 상황은 절망적이고 언제 좋아질지 알 수가 없다해도 세상이 알 수 없는 소망과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들은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담대하게 소망을 갖습니다. 세상도 희망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적극적인 사고 방식과 마인드 콘트롤 등 온갖 것을 훈련합니다. 그러나 진짜 소망은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거듭나면 반드시 소망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신명기를 보면 12명의 정탐꾼이 40일동안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옵니다. 정탐 내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른 사람들이 절망하고 있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저들을 우리의 손에 붙이시면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
이런 담대함은 믿음이 주는 소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비전과 소망은 지금 자신의 현실로 보면 맞지 않습니다. 또 지금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보면 자신이 거룩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의 기업의 상속자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해 보일지경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하시면 나도 예수님처럼 될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자신의 믿음과 능력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능력을 보는 것입니다. 그 능력에 의지해서 지금은 넘어지고 실수하고 연약하지만 자신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고 나아가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를 가지고 5천명을 먹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는 가능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땅을 향해 나아갈 때 계산을 하면 결과는 절망적입니다. 계산으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이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정한 것이 아닌가를 의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황당한 일도 하십니다. 예수님은 겨우 12명의 사람을 택해서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식도 없는 75세의 노인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같은 많은 자손을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 계산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믿음으로 합니다. 우리가 죽음 앞에서도 담대한 것은 산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4절을 보십시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우리는 영생과 하나님의 영광뿐만 아니라 하늘에 영원한 기업을 보장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믿는 모든 사람에게 기업을 약속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고난이 와서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명예, 건강, 재산, 그리고 자신감도 잃어버려서 창피를 당할까봐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어차피 이땅에 있는 것들 중 붙잡을 수 있는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든 믿지 않든 고난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은 더 괴롭고 억울하게 느껴집니다. 고생을 해도 의미있고 가치가 있는 것은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땅에서 고난의 삶을 살 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십시오.
하나님 나라에 투자하면 기본적으로 30배의 이익을 얻습니다. 그것도 망하는 법이 없는 기업입니다. 소멸할 이땅의 것으로 하나님 나라에 투자하면 영원한 기업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아들들도 지혜로운데 하나님의 아들들은 더 지혜로우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거두고,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거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께 복받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받은 것을 쌓아두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 다시 헌신하십시오.

우리를 영원히 지키시는 하나님

베드로전서 1장 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환란이 와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실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다가 믿음을 버리고 실패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에는 우리는 승리합니다. 우리의 끝은 보장되어 있습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두렵게 하는 사단의 역사에 속지 마십시오.
베드로전서 1장 6, 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우리를 사랑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당하고 어려움을 겪는 것을 지켜보시고 그렇게 오랫동안 부르짖고 간구해도 내버려두시는 이유는 알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을 모두 알 수는 없고, 우리가 보는 수준과 하나님이 보는 수준은 다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불필요한 일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꼭 필요하기 때문에 그 난관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은 우리가 감당할만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큰 고난이 오면 하나님께 인정받았다고 생각하십시오.

‘믿음의 시련은 금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금을 얻기 위해서도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난리법석을 일으키는데 그 금보다 더 귀한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난 후의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오면 잠시 근심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여러가지 모습으로 옵니다. 아무도 다음에 올 시험을 예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훈련시키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연단을 받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각자에게 최선이고 유익하게 때문에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절망과 눈물로 기도를 시작할지라도 결국은 기쁨과 찬송과 소망을 얻을 것입니다. 고난이 올 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자신이 연단받게 되어 영광이 더 할 것을 기뻐하십시오. 고난이 크고 깊을수록 하나님의 비전과 영광은 더 큽니다.
오늘도 소망으로 주님 앞에 나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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