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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뜨거운 사랑 영원한 말씀 (벧전 01: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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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네로 황제에 의해서 교회역사상 가장 혹독한 핍박이 가해졌을 때 기록되어 고난받고 핍박받는 성도를 위로하고 용기를 준 말씀이 베드로전서입니다.
당시의 성도들에게는 불 같은 시험이 닥쳤지만 사도 베드로는 섣부른 위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아픔에 연민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을 바라보기보다는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더욱더 믿음으로 살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난과 역경에 처해있는 성도들을 향해서 구원의 능력을 확인시켜 줍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 놀라운 사실로 말미암아 세상을 이기고 역경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시고, 영원히 살아계시고,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믿고 있기에 아무 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환란이라도 우리를 스러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순결한 영혼의 사랑

베드로전서 1장 2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비록 지금 고난과 역경이 있어도 믿음 덕분에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우리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신 부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영광으로 바꾼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주님께서 우리가 믿음 때문에 받는 고난도 승리와 영광으로 바꾸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 소망과 믿음을 둔 사람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치 않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소도를 믿으면 그 구원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믿음과 소망뿐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사도 베드로는 고난의 현실 앞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서 서로 뜨겁게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사랑의 힘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은 예수님을 믿을 때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환경이 좋고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아도 서로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갈등을 일으키고 상처를 주고받는다면 그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형편과 환경은 어렵지만 그럴수록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고, 용기를 준다면 능히 고난을 이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난이 오히려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고난이 더욱 힘들게 느껴지는 것은 고난을 당할 때 외롭기 때문입니다. 사실 고난 그 자체보다 더 어려운 것은 사람들이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우리의 곁을 떠난다는 데 있습니다. 그동안 자신과 함께 하고 믿고 사랑하던 사람이 자신으로부터 돌아서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왔을 때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고난을 위로하고 사랑해 주는 것을 경험할 때 고난을 믿음과 소망으로 넉넉히 이길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장례식 때 이런 사실을 접해보게 됩니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순간에는 당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강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 교회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를 사랑하고, 위로하면 상을 당한 사람들은 슬픔 가운데서도 위로와 소망을 얻게 됩니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세상도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세상도 사랑을 필요로하고 이를 노래합니다. 오히려 세상이 사랑을 더 많이 노래하고 간구하며 사랑받기 원하고 사랑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사랑 때문에 아파합니다. 왜 세상에서는 그렇게 바라는 사랑을 하면서 아파하고 고통스러워 할까요?
왜냐하면 세상의 사랑에는 순수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서 계산하고, 자신의 이익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오히려 고통스러워집니다. 영혼이 깨끗해야만 거짓없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거듭나지 않으면 영혼이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갈수록, 공부를 많이 할수록, 세상 경험이 오히려 많으면 많을수록 순수하던 영혼이 더렵혀지고 왜곡되어지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때때로 그리운 마음으로 어린시절을 뒤돌아 보는 것은 ‘순수함’에 대한 향수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이들어갈수록 세상속에서 때가 묻어가고, 순수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전도를 해보면 젊을수록 전도하기가 쉽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나이 많고, 교양있고 인격있는 사람은 복음을 들어내놓고는 반대하지 않아서 예수를 잘 믿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많이 봅니다. 반대로 관심이 없다던 젊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 들였을 때 신앙이 빨리 성장하는 모습을 봅니다. 나이 든 사람들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순수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이 깨끗해지는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세상도 나름대로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은 음악, 시, 좋은 환경 속에서 영혼이 순수해지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가지고는 영혼을 순수하게 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순종함으로 영혼 깨끗케

하나님께서는 ‘진리에 순종할 때 영혼이 깨끗해 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속사람, 우리의 영혼이 언제, 어떻게 깨끗해 지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안에 들어오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그렇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힘써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일을 감당하고, 직분을 얻고, 세상 복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속사람을 계발하는 일, 우리의 영혼을 계발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강건해지고, 순수해지고, 거룩해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진리에 순종하는 것, 말씀대로 사는 것은 복이고,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진리에 순종할 수 있습니까? 그 능력은 어디서 올까요?
2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거듭난 사람이 순종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의 능력, 중생의 능력을 체험한,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죄인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2절에는 ‘죄와 허물로 죽었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여러분, 옳다는 것을 안다고해서 순종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성경속에 참 좋은 말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동의한다고 해서 순종하지는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종한다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우리가 성령충만을 구하는 이면에는 신비한 능력을 얻어서 사람들 앞에서 ‘스타’가 되어보고 싶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충만을 구하는 이유는 우리가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을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지만 능력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썩어질 씨앗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말씀으로 됩니다. 그 말씀은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외의 것으로는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교육, 세상에 있는 어떤 것, 또 힘으로나 능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징벌로도 사람을 바꿀 수 없습니다. 구약의 메시지를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죄인들을 끊임없이 심판해도 죄인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죄진 사람들을 교정하기 위해서 국가에서는 막대한 돈을 투입합니다. 그리고 최고의 엘리트들을 법관으로 세우고 죄를 방지하고 죄인들을 교정하려고 합니다. 교도소는 갱생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러나 교도소에서는 갱생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현재의 사법체제를 가지고는 범죄를 예방할 수도 없고, 범죄자들을 갱생시킬 수도 없다는 사실을 전문가들도 인정합니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심령과 골수를 쪼개고’들어올 때 우리는 변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한 대학생이 부모를 끔찍하게 살해한 사건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심란합니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다 함께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예전에 ‘지존파’라고 불리웠던 사람들은 배우지 못한 이들이었다고 하지만 이 사람은 명문 대학교를 다니는 많이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지존파’도 변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 모두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형이라는 형벌 앞에서도 변화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전달하고 기도를 해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보다가 깨어졌습니다. 그리고 ‘왜 진작 이 복음을 나에게 전해주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는 왜 변하지 않을까? 늘 성경도 보고, 예배에 참여하는데...’라는 의문을 갖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으로 받아들이면 오히려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지식은 비판하게 만듭니다. 지식은 사람을 복잡하게 하며 까다롭게 만듭니다. 그러나 말씀에 성령이 역사할 때는 말씀이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세상의 어떤 검보다도 예리해서 우리의 혼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고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말씀을 단순히 지식으로만 대하면 안됩니다. 말씀을 읽을 때, 설교를 들을 때 ‘성령님 이 말씀을 들을 때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이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썩어질 씨를 뿌리며 산 사람들, 단지 육신의 생명을 가지고 산 사람들의 운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이 아무리 많은 교육을 받고, 교양있고, 다른 이들에게 칭송받는 삶을 살았다고 해도 그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육체의 삶은 반드시 끝이 있고, 허무한 것입니다.

영원히 살아있는 하나님 말씀

세상의 것중 영원히 유지되는 것은 없습니다. 모두 사라지고 지나가는 것들 뿐입니다.
그러나 25절을 보십시오.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오직 주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말씀의 사람도 영원합니다.
영원한 철옹성 같아 보였던 로마도 무너졌습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것 처럼 보였던 네로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믿음을 지키다가 믿음으로 주안에서 죽은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몇천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 다윗 등을 보십시오. 그들은 지금도 우리에게 너무나 친근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고난의 때에 앞에도 뒤에도 길이 보이지 않고 좌우를 돌아보아도 길이 보이지 않고 캄캄할 때, 위를 보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붙드십시오. 믿어지지 않을지라도, 의심될지라도 말씀을 붙들고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십시오. 우리는 말씀을 통해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환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거듭나고, 거듭난 사람은 다시 진리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진리에 순종하면 영혼이 깨끗해지고, 그렇게 영혼이 깨끗해져야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을 보며 ‘이 사람을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럴 수 없을 듯이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미 사랑할 능력이 있습니다. ‘너희가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형제사랑’은 이미 우리에게 이르러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라’는 말씀에서의 사랑 ‘아가페’는 의지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서의 사랑도 ‘아가페’입니다. 원수를 의지적 결단 없이 사랑할 수 있다면 이미 원수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하십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손마른 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때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가 그렇다고 하자 ‘네 손을 내밀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손마른 사람이겠습니까? 손을 내밀 수 없어서 손이 마른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낫고 싶다고 응답했을 때 그에게 안수라도 먼저 해야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는 치유를 받았으니 손을 내밀라고 해야 맞는 순서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낫고자 한다는 대답에 손을 내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자 ‘네 병이 나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명령과 말씀 앞에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순종과 의지로 하려고 들면 할 수 있게 됩니다. 정말 사랑할 수 없을 듯 하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결단하고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고나면 정말로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 것이 없어서 외롭고, 목마르고 힘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없어서 힘들고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행동입니다. 실천입니다. 마음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실천할 때 열매맺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랑하고 싶을 때 마음을 가로막는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남이 잘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남을 해치고자 하는 것을 악독이라고 합니다. 궤휼은 속이는 것입니다. 계획적이고 의도적으로 속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외식은 위선입니다. 그리고 시기와 비방도 있습니다.
이 구절은 세상을 향해 권면하는 말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를 향해서 이것들을 버리라고 권면합니다. 정말 우리 안에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사랑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

저의 경우를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언젠가 저의 차 앞을 가로막고 살짝 끼어드는 차를 보며 속으로 ‘에이 사고나 나버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생각이 올라오는 것을 보며 저는 회개를 해야만 했습니다. 저 또한 그런 것들을 제 안에서 보게 됩니다.
궤휼을 살펴보면 때로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명목 아래 자신의 이득을 구하며 스스로와 하나님을 속이는 교활함을 보게 됩니다. 그런 마음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직분과 여러가지 포장을 가지고 많은 위선 속에서 살아갑니다. 교회 안에서 제일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시기입니다. 시기는 부러워하면서 미워하는 것입니다. 시기 뒤에 따라오는 것이 비방입니다.
이런 것들을 버리십시오. 그런데 이런 것을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버리자’고 결단하면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마십시오.
회개하면 버리게 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 속에 이런 것들이 들어올 때마다 버리십시오. 이런 마음은 우리가 인간이기에 때때로 우리안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자꾸만 버리십시오. 그런 마음이 생길 때마다 오히려 상대방을 축복하십시오.
그리고 이런 악감정들을 뽑아낸 후에 그 빈자리에 채워넣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채워넣으십시오. 갓난 아이와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인 말씀을 받으십시오.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이란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른들이 온갖 좋은 것을 찾아 먹을 때 아이들은 오직 엄마의 젖만을 먹습니다. 물조차 마시지 않습니다. 젖을 먹으면 아이들은 육체적인 필요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안정도 얻습니다. 아이에게는 오직 젖 하나면 족합니다. 아이들은 보석, 돈, 명예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만을 사모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의 많은 프로그램들에 참여하십시오. 그러나 그것들은 말씀을 받기 위해 옥토를 만들기 위한 보조적 역할을 할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여러분 먹어본 사람만이 또 다시 먹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체험한 사람, 그 말씀속에 위로와 사랑과 소망의 역사를 체험해 본 사람이 말씀을 사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가까이하고 순종할수록 내안에 악독과 궤휼과 시기와 위선이 사라진다는 것을 경험한 사람만이 말씀을 사모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성격도 바꿀 수 있습니다. 가장 메마른 요한이 사랑의 사도로 변했습니다. 가장 성질 급한 베드로가 오래 인내할 수 있는 인내의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말씀의 역사입니다. 탕자였던 사람이 성자로 바뀌었습니다. 히포의 감독이었던 어거스틴이 그랬습니다. 그가 방황할 때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말씀을 읽으라고 하셨고 성경의 말씀 한 구절이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능히 구원한 이 말씀이 역경과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형제를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줄 것입니다. 이 말씀의 역사 앞에서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가운데 우리에게 닥친 모든 역경에서 승리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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