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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한 자와 가난한 자 (약 0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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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의 기준
1789년에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혁명의 부작용도 있었고, 희생도 있었지만 프랑스 혁명은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자유와 평등’의 깃발 아래 혁명이 진행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존엄한 존재로서 누구든지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외쳤습니다. 혁명은 주장한 것과 성취된 것이 달랐지만, 그것을 신호탄으로 계급사회가 무너지면서 시민사회가 도래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것을 잘 반영한 제도가 ‘참정권’ 즉 투표입니다. 투표는 한 사람이 한 표만 행사할 수 있습니다.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피부색과 상관없이, 종교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한 표씩 투표합니다.

미국의 인권운동가였고 노벨 평화상을 받았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피부색과 인종과 종교와 빈부의 차이없이 백인 자녀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고 뛰어놀 수 있는 사회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은 암살로 무너졌지만 지금도 하나씩 하나씩 실현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은 하나님의 꿈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마지막 대 제사장적인 기도를 할 때 그 기도의 핵심은 ‘하나됨’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안에 들어오면 호칭이 달라집니다. 세상의 많은 호칭이 있지만 ‘형제’, ‘자매’로 부릅니다. 모두가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습니다.
1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우리는 주 안에서 형제요 자매입니다.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차별됨이 없이 모두가 존중받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여전히 사람들을 외모로 평가합니다. 우리는 이런 평가에서 한 번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서 살려고 하는 이면에는 사람들의 이런 평가가 있습니다. 작은 차를 타고 다니면 사람들이 무시하는 것 같고, 큰 차를 타고 다니면 대접받는 것 같이 느낍니다. 작은 차를 타든 큰 차를 타든 사람은 똑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좋은 차, 좋은 옷으로 좋은 평가를 받기 원합니다.
입시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런 나라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수능시험 듣기평가를 할 때에는 비행기 이착륙도 잠시 보류됩니다. 다들 목숨을 걸고 높은 점수를 받으려고 합니다. 왜일까요? 그 점수가 평생가기 때문입니다. 출신학교가 평생 자기를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것이 나에 대한 평가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평가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항상 우리가 갖고 있는 돈으로, 직분으로, 직업으로 평가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 젊은이들은 외모에 얼마나 많은 신경을 쓰는지 모릅니다성형수술은 보편화되었다고 합니다. 남자들도 외모에 치중하는 것에는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옷 잘 입는 남자가 성공한다’는 말도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지만 적어도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세상은 외모로 평가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다른 기준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1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세상 것을 사용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것도 교회에서 힘으로 작용해서는 안됩니다.

겉 모습과 속 모습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면 세상과는 달라야 합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외모로 취하면 안됩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외모로 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모로 취하셨다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실 때의 상황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윗 집안 사람들의 외모는 남달리 출중한 듯 합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라든가 다윗의 형들의 이야기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들의 외모에 대한 평가가 탁월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별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적어도 외모를 보면 가장 빠지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 조차 외모로 사람을 판단할 뻔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중심을 본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이 등장하는 영화도 보고 그림도 보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비슷한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이사야 53장에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 묘사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외모로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이 흠모할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실족한 경우 중의 하나가 예수님을 외모로 취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고, 갈릴리 출신이고, 목수의 아들인데 우리가 그를 구원자로 믿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듭나면 사람을 보는 관점이 달라집니다. 더 이상 육체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받아들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에 대한 좋은 예화를 야고보 사도가 들려주고 있습니다. 2,3절입니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우리가 안내위원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두 사람이 들어옵니다. 한 사람은 손에 금가락지를 끼고 좋은 옷을 입었습니다. 당시 풍습을 보면 가락지는 하나만 끼는 것이 아니라 열 손가락에 다 끼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부를 자랑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누추하고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요즘에는 옷 구하기가 쉬웠지만 옛날에는 새 외투하나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였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장례 비용이 없으면 겉옷을 팔아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겉옷은 전당포에 맡길 수 있을 만큼 담보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금가락지를 낀 사람은 좋은 자리에 앉히고,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은 관심도 가져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예화가 아닙니다. 유대인 회당에는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이 앉는 상석이 따로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앉든지 말든지 관심조차 갖지 않는 일들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적어도 교회는 이런 일들이 없어야 합니다. 시험에 드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간혹 전도집회나 좋은 프로그램을 할 때 가장 좋은 자리에 초신자들과 몸이 좀 불편하신 분들이 앉아야 합니다. 그런 분들은 자리를 챙겨 드려야 하지만 세상에서 유명하고 지위가 높다고 해서 대접해달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안되는 말입니다.
교회에 오실 때에는 검소하게 입고 오십시오. 좋은 옷이 있고 치장할 것이 많다고 할지라도 검소하게 입고 오십시오. 물론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분수에 맞게 사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한 가지 더 생각할줄 알아야 합니다. 내 분수에는 맞지만 혹시 내 옷차림 때문에, 행동 때문에 실족하는 믿음의 형제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절제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과시하거나 자랑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생각하면서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죄’

사람들은 자기 보다 부자에게는 비굴할 만큼 잘 하려고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무시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자에게 잘 하는 것은 뭔가 이득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무시합니다. 또 하나는 부자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그 부자처럼 되겠다는 열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을 할 때 가장 많이 겪는 것이 차별입니다. 교회마저 부자를 대접하고 권력을 좋아한다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시험에 듭니다. 행여라도 부자와 세상의 힘 있는 사람이 교회에서 세상의 힘을 사용하게 했다면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에 오면 하나님의 품을 느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열 두 지파 모두에게 하늘 문이 열립니다. 차별없이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교회는 누구든지 와서 사람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차별하고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4절을 보십시오.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서로 구별하고 판단하는 것, 가난한 형제들을 무시하는 것은 악한 생각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외모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사람 대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지식도 많고, 은사도 있고, 교회 봉사도 많이 하지만 약하고 힘없고 어려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올바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올바르지 못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 누구도 무시하지 않습니다.
저도 간혹 교회 간사님들이나 함께 사역하는 분들을 무시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 자신은 압니다.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려고 하지만 제 자신도 모르게 그분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우리는 동일하게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고 동등하게 존중해야 합니다. 겸손은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높여주는 것입니다. 외적인 조건때문에 비굴하지 않는 것이 겸손입니다.
외모로 취하는 것은 악한 생각일 뿐만 아니라 죄를 짓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것은 명백한 죄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우리가 외모로 어느 사람을 판단하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됩니다. 5-7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이 본문은 자칫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편이다’라는 오해를 갖게 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난하다고 해서 더 용납하지 않고, 부자라고 미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세상에 거들떠 보지도 않는 가난한 자들마저 하나님은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차별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의 중심입니다. 우리 영혼의 가치를 보시고 속 사람을 보십니다. 외모를 보는 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마저 택하셔서 동일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3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라도 육체대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외형적인 것, 외모를 가지고, 인간적인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아무런 육체도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오직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영혼을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장애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혼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부자를 찾지 않습니다. 세상의 권력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습니다.
영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적으로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더라도 영혼이 가난한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영혼이 풍성한 사람을 존경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앞으로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너는 내 자녀다. 너는 내 소유다. 너는 왕같은 제사장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무시하고 괄시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여러분의 자녀를 멸시하면 여러분의 마음이 얼마나 아픕니까? 내가 멸시당하는 것보다 더 아프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심정이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세리와 죄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사람들이 다 무시하는 그들을 찾아가셔서 친구가 되어 주신 것은 그들도 똑 같이 구원받아야 할 존재들이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긍휼을 행하라

8-11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 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것이 죄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큰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우리가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았더라도 우리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았다면 가장 큰 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웃도 구별합니다. 적어도 어느 수준이 되어야 자기 이웃이라고 여깁니다. 그것도 죄입니다. 하나님이 구별하지 않는 것을 구별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이웃은 모든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죄가 간음하고 살인하는 것 같은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모두 중요합니다. 다 지키다가도 하나를 어기면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많이 책망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도 흠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구별되게 산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살았습니다. 스스로의 의로움을 내세우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구분하며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은 예수님이 용서하셨지만, 형제를 판단한 교만한 바리새인은 꾸짖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누구도 외모로 취하지 않습니다. 장애인이면서 시인인 송명희 자매는 세상을 향해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나’라는 시를 통해 ‘하나님은 공평하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공평하고 신실하신 사랑의 하나님을 나타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12절입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앞에서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세상을 본받지 말고 늘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를 세워갈 때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긍휼히 여기는 자가 심판을 이깁니다. 우리도 긍휼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꿈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존중받고, 대접받고, 사랑받고, 차별이 없이 하나가 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가정에서, 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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