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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함이 있는 믿음 (약 01: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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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제직 사진 촬영을 했습니다. 지난 주에 사진을 가져왔는데 그것을 보고 난 다음에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좋은 기술을 가진 사진사를 부르지 말아야겠다.' 싸구려 사진기로 찍었을 때는 몰랐는데, 좋은 기술을 가진 사진사가 좋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은 것을 보니까 얼굴에 있는 점 하나, 주름살 하나까지 사실 그대로 나왔습니다. 사실 그대로, 모양 그대로, 색깔 그대로 나왔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9년 전에 홍콩에 왔을 때 사진관에 가서 찍은 사진 가지고 지금까지 버텨왔습니다. 사진의 번호를 수첩에 적어놓았다가 사진이 필요할 때마다 사진관에 가서 추가주문을 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9년만에 다시 사진을 찍었는데 이건 제가 보아도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말 그대로 '타향살이 십여 년에 청춘만 늙어 늙어'입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잊어버리고 사는 것 같습니다. 나이는 점점 더 들어가는데 자신은 아직도 청춘인 것처럼 생각하고, 아직은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사진을 찍거나 거울을 들여다보면 그게 아닙니다. 거울을 보면 갑자기 아버님 얼굴이 거기에 있습니다. '아니, 아버님이 웬일이십니까?'

옛날에는 구리판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어 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거울이 귀한 물건이 되어서 보통 사람들은 평생동안 거울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한번도 거울을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나는 이렇게 생겼을 것이다.' 생각하고는 그대로 믿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평생 처음으로 거울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 내가 이렇게 생겼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뒤돌아서니까 금방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서 지금까지 자기 스스로 생각해왔던 모습이 자기의 모습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니까 내 자신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아, 이게 내 모습이구나, 내가 생각했던 내 모습보다는 훨씬 더 못생겼구나. 내 눈은 세상의 욕심으로 초점을 잃어버리고 있구나, 내 코는 교만과 독선으로 높이 솟아있구나, 내 입은 시기와 질투로 삐뚤어져 있구나. 내 귀는 세상의 즐거운 것들을 향해 크게 열려있구나.'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모습 그대로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세상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애를 쓰고, 교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세상의 즐거움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3절은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이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말씀했습니다.

자기자신이 어떠한가를 알고 자신을 아름답게 가꿀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오늘은 본문 19절에 기록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는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거울을 통해 여러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듣기는 속히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듣는 것도 빨리 듣는 사람이 있고 늦게 듣는 사람이 있느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듣기는 속히 하라는 말의 본래의 뜻은 '이것저것 다 듣지 말고 잘 가려서 들으라.'는 말입니다. 들을 것은 반드시 들어야 하고, 안 들어야 할 것은 안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뀌면 안됩니다.

제가 주일마다 예배시간에 광고를 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이번 주간에 제직세미나를 한다고 광고를 했습니다. 거기다가 꼭 나오라는 말도 몇 번이나 덧 붙였습니다. 그리고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분들에게 몇 명분이나 준비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50명분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내심 속으로는 불만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제직이 총 116명인데 그 중에 출장간 사람이나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참석 못하는 사람을 빼면 백 여명, 그 중에서 못해도 80여명은 참석할 텐데 50명분을 준비하다니, 여전도회가 이렇게 믿음이 없어서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제가 워낙 마음이 넓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50명도 안나왔습니다. 수요일 날은 평상시에 모이는 숫자보다도 적게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내년에는 바꿔 바꿔, 몽땅 다 바꿔.'

아무리 광고를 해도 못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귀가 어두워서 못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닫혀서 못 듣는 것입니다. 제직세미나로 모인다는 소리는 잘 안 들려도 어디 모여서 놀자고 하는 소리는 잘 들립니다. 교회에 모여서 성경공부한다는 이야기는 안 들려도 어디 모여서 점심 먹자고 하면 귀가 활짝 열립니다. 제가 그런 분을 몇 사람 마음속에 새겨두고 있습니다. 앞으로 그 분들을 위해 기도할 계획입니다. '하나님, 알아듣게 혼 좀 내주십시오.' 하고 말입니다.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멀게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오늘날 교회성장이 둔화된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를 저는 두 가지로 봅니다. 하나는 자동차이고 또 하나는 TV입니다. 자동차와 TV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유익도 많지만 해를 가져다 준 것도 많이 있습니다.

옛날에 자동차가 없었을 때는 전부 교회 곁에 모여 살았습니다. 그때는 싫으나 좋으나 아침에도 나가고 저녁에도 나가고 갈 데가 교회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눈부시게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자동차가 생기고 나서부터는 전부 멀리 이사를 가버렸습니다. 교회도 멀어지고 학교도 멀어지고 직장도 멀어지고 친구 집도 멀어졌습니다. 예전에는 이웃집 순이네 집에 모여서 계를 했는데 이제는 자동차 타고 강남 삼원가든에 모여서 계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에 동네에서 모일 때에는 월남치마에 고무신신고 가면 됐는데 삼원가든에서 모이니 미장원에 가서 머리도 해야하고 화장도 예쁘게 해야 하고, 할 일이 많아졌습니다. 해야 할 일도 많고 갈 데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교회에 가는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한국교회의 성장이 멈추어졌는데 이 때는 한국의 자동차 보유대수가 급격하게 늘어나던 시기입니다.

또 한 가지는 TV입니다. 김수현 극본의 '불꽃'이 새로 시작되었습니다. 두 남녀가 있는데 서로 약혼자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연히 만나서 서로 사랑을 하게 됩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보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드라마의 결론이 어떻게 나느냐 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새가 없습니다. 저야 여러분들이 무엇을 보는가 궁금해서 보지만 여러분은 왜 보십니까? 이 두 가지, 자동차와 TV가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가장 큰 적입니다. 이것들이 우리의 귀를 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사용하셔야 합니다.

'듣기는 속히 하라.' 하였습니다. 들을 것은 놓치지 말고 들어야 합니다. 몰론 여러분들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놓쳐서는 안되겠습니다. 사무엘서를 읽어보면 사무엘이 밤에 잠을 자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즉시로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어느 때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일에 바빠서, 세상일에 빠져서 하나님의 음성을 놓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말하기는 더디 하며' 말씀했습니다.

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자신에 대한 말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에 대한 말입니다. 먼저 여러분은 자기자신에 대한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자기자신을 자랑하는 말, 남이 가지지 않은 것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말을 피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2차 대전에서 독일군이 미군에게 진 이유가 무엇이냐? 그 이유가 이렇답니다. 독일군이 걷는 것을 보면 무릎을 구부리지 않고 다리를 쭉쭉 뻗으면서 걷습니다. 그런데 미군은 껌을 씹으면서 어슬렁어슬렁 제멋대로 행군해 왔답니다. 드디어 독일군하고 미군하고 전투가 붙었습니다. 누가 이겼겠습니까? 멋있게 걸어 온 독일군은 전부 관절염, 류마치스에 걸려서 누워 계시고 어슬렁어슬렁 걸어온 미군은 힘이 넘쳐서 잘 싸워 이겼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만함, 우리의 허영심, 이런 것들이 우리를 병들게 만듭니다. 겉으로는 멋있게 보이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병들게 만듭니다. 영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낮추는 사람,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사는 사람은 겉으로는 무기력해 보이나 사실은 강한 사람입니다. 겉으로 멋있게 보이는 것을 좋아하지 마십시오. 겸손한 사람이 결국에는 승리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자기자신에 대해 자랑하는 말을 피하셔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말씀했습니다.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사람, 내가 잘난 것을 드러내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칭찬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덕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또 한 가지는 다른 사람에 대한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을 살면서 다른 사람이 내게 한 말 때문에 깊은 상처를 입은 기억을 누구나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 기억은 좀처럼 잊어버려지지 않습니다. 시시때때로 생각나서 괴롭게 만듭니다. 그래서 말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은 우리가 하는 나쁜 말에 세 가지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누추한 말,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말의 공통점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말이 아니라 상처를 주고 절망하게 만드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주 쓰는 말 중에서 '잘난 척 하지마.' 이 말만큼은 여러분의 사전에서 빼버리시기 바랍니다. 이 말만큼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도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누가 열심을 내면 꼭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 너무 잘난 척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의 열심에 찬물을 끼얹는 것입니다.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말입니다. 누가 열심히 하거든 격려해 주십시오. 더 열심히 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는 말을 하셔야 합니다.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연못에 돌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연못 속에 살고 있던 개구리들이 나와서 항의를 합니다. '제발 돌을 던지지 마십시오.' 그러자 아이들이 대답합니다. '우리는 그냥 장난으로 돌을 던지는 것 뿐이야.' 그러자 개구리가 대답합니다. '당신들이야 장난으로 던지지만 우리는 목숨이 왔다갔다합니다.'

우리가 쉽게 하는 말들, 남을 비난하는 말, 비웃는 말, 흉보는 말들이 한 사람을 절망가운데 몰아갈 수 있습니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잠언 26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내가 다툼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닌가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세 번째로, '성내기는 더디 하라.' 말씀했습니다. 사실 이 문제만큼 어려운 문제가 없습니다. 제가 심방을 다녀보면 집집마다 TV 리모콘이 성한 집이 없습니다. 어디가 깨져 나갔거나 테이프로 덕지덕지 붙여놓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남편들이 집어 던져서 그렇습니다. 남편들이 퇴근해서 집에 들어와서 TV를 보면서 쉬고 있는데 아내들이 잔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왜 우리 친정에 그렇게 무관심하냐? 장모님 생일도 기억 못하는 사위가 어디있느냐?' 이렇게 바가지를 긁는 바람에 홧김에 던져서 깨진 리모콘이 집집마다 수두룩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화를 내어서 남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깨진 리모콘 테이프로 붙이느라고 애만 썼지 않습니까? 사람이 화를 내어서 남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후회와 눈물 밖에는 없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은 참 훌륭하신 분입니다. 서울에서 크게 목회를 하고 계신데 얼굴도 잘생기고 말씀도 참 잘하십니다. 그런데 이 분에게 아픈 상처가 있습니다. 사모님이 대학에 다닐 때에 퀸으로 뽑힐 정도로 미인이었는데 어느 날 말다툼을 했답니다. 그런데 하도 화가 나서 순간적으로 뺨을 한 대 때렸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사모님은 그 날로 보따리를 싸 가지고 일본으로 가버렸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어린 아들 하나 데리고 60세가 넘도록 혼자 살아왔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한번만 참으면 될 것을, 그때 한번만 그냥 넘어갔으면 좋았을 것을, 그것을 참지 못해 화를 자초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중에 주워담느라고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렀습니까?

우리가 화를 안낼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피해를 입게 되면 화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마음속으로 화는 낼 수 있으되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어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입을 열어 악한 말을 하지 말고 손을 들어 리모콘을 던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밤에 잠들기 전에는 분을 풀고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 내 이 뭉쳐진 마음을 풀어주소서.' 기도하고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분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 '너는 다른 사람은 구원한다고 하면서 왜 너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느냐?'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침 뱉으며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기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분에 못 이겨 잠을 이룰 수 없을 때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도 입을 열어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주님처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평강으로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듣기는 속히 하라. 말하기는 더디 하라. 성내기도 더디 하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을 듣고 뒤돌아 서서 잊어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고 그대로 행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소유하고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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