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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때를 따라 돕는 은혜 (히 04: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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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이문열이라는 소설가가 쓴 '아가'를 읽어보았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가서와 같은 제목을 가지고 있어서 읽어보았는데 결론은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다'로 끝났습니다. 저는 요즘에 나오는 소설을 읽을 때마다 고민이 많습니다. 한참 읽다보면 도무지 모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지난 주에도 신경숙의 '그가 모르는 장소'를 읽었는데 역시 제목대로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멀리 끝없는 길 위에'도 읽어보았는데 끝없이 졸음만 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다 읽는다고 하니까 안 읽을 수도 없고, 다 읽고 나서 잘 모르겠다고 하면 무식하다고 할까봐 그러지도 못하고, 하여튼 어렵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나오는 모든 책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소설이든, 시든, 수필이든, 한 가지 공통점은 한결같이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이든, 부부지간의 사랑이든, 모두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는데 사랑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막상 '사랑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한 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단지 다시는 사람취급을 안할 뿐입니다. 그러면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단편적인 것이 되겠지만 몇 가지만 생각해 봅니다.

첫째로, 사랑은 서로의 높이를 맞추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어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높은 하늘에 계시면서 우리를 내려다보면서 꾸짖거나 심판하시지 않고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습니다. 사랑은 자신을 낮추어 상대방에게 맞추어 주는 것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백화점에 쇼핑을 하러 나갔습니다. 때마침 명절 때가 되어서 곳곳에 아름다운 장식들이 걸려있고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상점마다 바겐세일을 한다고 좋은 물건들을 싼값에 내놓고 팔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구경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자꾸만 징징거리고 보채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장난감 가게로 아이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여전히 짜증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어머니는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얘, 여기 이렇게 재미있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너는 왜 울기만 하는 거냐?' 그래도 아이는 여전히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이를 찬찬히 살펴보니 아이의 신발 끈이 풀어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앉아서 신발 끈을 매어주고 일어서려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커다란 엉덩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름다운 장식들도 보이지 않고, 재미있는 장난감도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은 온통 어른들의 엉덩이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이를 번쩍 들어서 안아주었습니다.
그제야 아이는 눈물을 그치고 웃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이란 같아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서로의 높이를 맞추어 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잘났어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을 낮추어 서로의 높이를 맞추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부부사이에 '당신은 그것도 모르냐? 당신은 왜 그렇게 무식하냐?' 이런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부인이 무식하거든 같이 무식해 지십시오. 남편이 뭘 모르거든 같이 모르는 사람이 되십시오. 공연히 나서서 아는 척 하지 마시고 그냥 마주보고 바보같이 웃으세요. 그것이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사랑이란 같아지는 것입니다. 나를 낮추어 서로를 맞추어나가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열왕기상 8장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한 후에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리시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니까'

성전은 물론이고 하늘의 하늘이라도 감히 하나님을 모시겠다고 나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거룩하신 분입니다.
이 땅의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을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때로는 배고파하시고 때로는 목말라하셨고,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어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두 번째로 사랑은 상대방을 나보다 더 높은 사람으로, 나보다 더 귀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어 우리와 같이 되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보다 우리의 생명을 더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버려 우리의 생명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사랑은 자신보다 남을 더 높여주는 것입니다.

요즘 유행가 가사에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이런 가사가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서면 내가 실제보다 더 크게 보여야 진짜 사랑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데, 나는 배운 것도 별로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는데 저 사람은 나를 자기보다 더 잘난 사람으로, 자기보다 훨씬 가치 있는 사람으로 인정해주는구나. 아,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이렇게 자꾸만 커지는가' 이렇게 되어야 제대로 된 사랑입니다.

여러분들이 부부싸움을 자주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누가 그러는데 부부싸움을 전혀 안 하는 부부는 사랑이 없는 것이라고 해서 저 같은 경우에는 하는 수 없이 날을 정해서 가끔 합니다만 여러분들은 상당히 자주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부싸움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사실 따져보면 이유는 하나입니다. '옛날에는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당신을 만나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자꾸만 자신이 작아지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남편들은 아내들이 잔소리를 하는 것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해서 큰 소리를 지르고, 아내들은 남편이 여자 마음을 몰라준다고 해서 잔소리를 해댑니다. 그래서 잔소리, 큰소리, 잔소리, 큰소리, 끝없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런 싸움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이 꼭 하나있습니다. 서로를 높여주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높여주고, 아내는 남편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이렇게 자꾸만 커지는가' 이렇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나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기는 것입니다.

'오 헨리' 라는 사람이 쓴 '크리스마스 선물' 이라는 소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가난하기는 하지만 서로를 너무도 사랑하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마침 크리스마스가 되어서 선물을 하려고 하는데, 남편은 아내의 아름다운 머리에 꽃을 머리핀을 하나 사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고민을 하다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회중시계를 팔아서 머리핀을 샀습니다. 한편 아내는 남편이 그렇게 아끼고 자랑하는 회중시계에 줄이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시계 줄을 사주려고 머리카락을 잘라 팔았습니다. 드디어 크리스마스날이 되고 부부는 서로 선물을 교환했습니다. 이제는 아무 소용도 없는 선물을 서로 주고받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답고 귀한 선물을 주고받았습니다. 그것은 서로를 가장 귀하게 여기는 진실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나보다 더 귀한 존재로 여기고 그를 기쁘게 할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것, 내게 가장 귀한 것을 희생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당신의 아들의 생명보다는 우리의 생명을 더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위해서 가장 귀한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사랑,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세 번째로, 사랑은 상대방을 이해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15절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체휼'이란 '불쌍히 여긴다, 긍휼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도 우리와 똑같이 인간의 몸을 입고 배고픔을 경험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고통을 아십니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말씀했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시험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아니, 예수님도 시험을 받는가?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그 분도 시험 앞에서 마음이 흔들린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의 말씀입니다.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도 인간의 몸을 입으셨기에 그 고통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당신의 뜻 사이에서 갈등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마음이
흔들리실 때가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마음이 흔들이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갈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마음에 시험이 있기에, 괴로움이 있기에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수제자답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크게 기뻐하시면서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시면서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때만큼 예수님께서 기뻐하시고 흐뭇해하신 예가 없습니다.

그런데 곧 이어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실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말씀하셨습니다. 여기를 잘 보십시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예수님도 시험이 다가올 때에 흔들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도 시험을 받아 넘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은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갖고 계셨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온갖 어려움을 체험하시고 시험을 당하시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신 예수님은 여러분들이 당하는 어려움과 시험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여러분들이 경제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당할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네 어려움을 안다. 내가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할 때에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모른다. 네 배고픔을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육신적인 고통을 당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네 고통을 안다. 내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에 그 사람들이 내 손에 못을 박았었지, 발에도 못을 박고, 창으로 허리를 찔렀단다. 그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른다. 지금 네가 겪고 있는 육신적 고통을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안다'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인간관계 속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네 괴로움을 안다. 내 제자 중에 가롯 유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삼 년 동안이나 그렇게 사랑하고 정성껏 가르쳤는데 나를 배신하고 팔아 넘겼단다. 베드로라는 제자도 나를 그렇게 사랑한다고 하더니 제 목숨이 위태로우니까 나를 버리고 도망가더라. 지금 네가 괴로워하는 그 배신감과 실망을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안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이 시험에 들어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갈등을 안다. 내가 광야에서 금식할 때에 사단이 이렇게 말했었지.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천하만국을 다 네게 주겠다'고, 만약 내가 그렇게 했다면 십자가를 지지 않고도 이 세상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 유혹을 물리치는 것이 참 어려웠단다. 네가 지금
당하고 있는 시험이 얼마나 이기기 어려운 것인지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해하십니다. 누구보다도 우리를 잘 아시고 우리가 겪는 고통과 시험을 이해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들로 하여금 그 고통과 시험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본문 16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풀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떤 고등학생이 있었는데 그만 대학입시에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부모님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뒷바라지를 해주셨고, 어머니는 날마다 새벽에 교회에 나가서 아들의 합격을 위해 기도를 드리셨는데 차마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 끝에 가출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일단 일자리를 구해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자그마한 방도 한 칸 얻어서 그럭저럭 살고 있었습니다.

한편 졸지에 아들을 잃어버린 부모는 사방으로 수소문하여 아들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난 후에야 아들이 있는 곳을 알아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당장에 아들이 사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일을 하러 가서 안보이고 방은 엉망으로 어질러 있었습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냉장고에 먹을
것을 가득 채워 넣었습니다. 그리고 냉장고 문에다가 아들의 백일잔치 때에 어머니가 아들을 끌어안고 웃고있는 모습의 사진을 붙여놓았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윽고 저녁이 되어 돌아온 아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아직도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계시는구나' 그리고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과 육신적인 고통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마음의 상처와 번민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시험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이 모든 문제들을 주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소망과 기쁨으로 새롭게 일어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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