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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의를 이루라 (약 01: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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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읽은 이 하나님의 말씀은 야고보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목사님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최초의 기독교회였고, 다른 모든 교회의 모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로마제국 각 곳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이 예루살렘 교회 출신이 많았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일어난 박해를 피해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각 곳으로 피난을 갔기 때문입니다. 이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목사님인 야고보 사도께서 로마제국 각 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 이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먼 곳에 나가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는 그 심정이 어떤 것일까요? 가까이에 있으면 주일마다 설교를 통해서 잘 가르치고 심방도 해서 위로하고 말씀으로 권면도 하실 수 있을텐데,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럴 수도 없고,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깝겠습니까? 그런 상태에서 성도들에게 편지를 쓴다고 생각해 봅시다. 정말 간절하고 정성을 담은 편지가 되지 않겠습니까?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 목사님도 그런 심정으로 지금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특별히 당시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다른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야고보 사도는 '사랑하는 내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호칭 속에 성도들을 향한 야고보 사도의 모든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 또한 그들이 당하고 있는 환난과 핍박에 대한 안타까움, 위로와 격려 등 야고보의 마음이 이 한 마디에 농축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렇게 '사랑하는 내 형제들아'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목사는 모든 성도들을 '사랑하는 내 형제들이여'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하고, 성도들은 목사를 '사랑하는 내 형제여'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끼리도 역시 '나의 사랑하는 형제여'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주위를 한번 돌아보세요. 우리 모두가 서로를 정말로 '사랑하는 내 형제여'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린다고 이런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 곳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도 각자 다른 길로 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이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나가는 데 있어서 우리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 이것이 바로 비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듣기는 더디 하면서 말하기는 속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오해가 생기고 다툼과 분쟁에까지 이르게 되겠지요. 우리가 어떤 일을 계획하고 의논하는 일에서 가장 먼저 지켜야 할 법칙이 바로 이것입니다. 말하기를 속히 한다는 것은 내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보다 낫고 옳다고 생각하는 결과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은 들어볼 필요조차 없습니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을 존중하거나 또는 양보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듣기를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그래서 나의 의견을 포기하거나 양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를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사랑이 싹트고 신뢰가 형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자기부인과 희생이 있는 곳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자기주장과 고집만 있는 곳을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정말 우리는 말하기를 더디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잠언에서는 말하기를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렵다고 했습니다(잠 10:19). 말이 많은 사람은 자기 말이 올무가 되어 넘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한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습니다. 저도 종종 안 해도 될 말이나 해서는 안될 말을 해 놓고는 나중에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조금만 더디 했더라면 그런 실수를 안 했을 텐데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그래서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즉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만만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혀를 재갈 물리지 않으면 그 경건을 헛된 것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혀는 재갈을 물려야 할 만큼 길들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혀를 어떻게 우리 입 속에 가두어 두셨는지 보세요. 혀는 이중으로 된 울타리 속에 있습니다. 이빨이 있고 입술이 있지 않습니까? 단단한 이빨로 이 혀를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입술은 부드럽습니다. 이 입술의 울타리를 통과하면서 우리의 말이 부드러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 한 마디를 하더라도 이빨과 입술의 역할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혀를 다스리고 말하기를 더디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더디 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성내는 일입니다. 말하기를 속히 하면 곧바로 성내는 것이 뒤따라 나옵니다. 제가 우리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 살면서 다른 나라 말을 떠듬떠듬 하면서 살다 보니 큰 은혜를 체험한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성내는 일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말이 즉각 나와야 성을 낼 것 아닙니까? 당장 큰 소리를 지를 일이라도 말이 안되니까 큰 소리를 칠 수가 없게 되고 억지로나마 분을 참게 되더군요. 이렇게 말하기를 더디 하면 성내는 것도 더디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만 말을 못해서 더디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성품이 그렇게 변화돼서 말하기를 더디 해야 하겠지요.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성내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아직도 혈기가 남아 있습니까? 그래서 참지 못하고 화부터 내는 경우가 많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서로가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 존중해 주며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의 주장을 펴기 위해서 큰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기보다는, 정말 누가 보아도 잘못된 일을 꾸미려는 사람들과 맞서다 보니 큰 소리도 나고 성내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 사도는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옳지 못한 일을 보고 화를 참지 못한 행동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 있을 때 한번은 바알 종교에 빠져서 이방 여인들과 더불어 음행을 일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염병이 퍼졌는데 무려 24,000명이나 죽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바알 종교에 빠진 사람들을 다 죽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 와중에 족장 한 사람이 이방 여인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을 보고 아론의 손자인 비느하스가 분을 참지 못하고 창을 들고 따라 들어가 그 두 사람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러자 백성 가운데 창궐하던 그 끔찍한 염병이 즉시 그쳤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비느하스의 행동을 보고 하나님의 질투심을 대신 나타낸 것으로 인정하시고 그와 평화의 언약을 맺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당히 특별한 경우지요. 우리가 제직회 하면서 누가 잘못한다고 큰소리치고 성내면서 이것이 하나님을 위한 질투라고 말하기는 좀 곤란하지 않겠어요?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아무리 우리가 성낼 만한 이유와 근거가 있더라도 성내는 것이 그리 유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지요. 지난 주에 제 친구 한 사람이 한국에서 저에게 전화를 했어요. 아주 친한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이 친구가 돈을 떼어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 잃고 친구 잃었다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겁니다. 도저히 그 친구를 용서할 수도 없고 또 분을 참을 수가 없는데 이럴 때는 성경의 어디를 읽어야 되느냐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마태복음 5장을 읽으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이 속옷을 가져가려고 하면 겉옷까지 주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했더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거나 공부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고 수긍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 그 말씀을 적용하여 순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22절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입니다. 성내지 말라고 했으면 그것이 어렵더라도 성을 내지 말아야죠.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하는 사람,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성을 내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속옷을 뺏어 가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주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것이 그저 어떤 교훈집에 나오는 격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그것이 쉽지 않더라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을 듣고 배웠으면서도 그대로 행하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은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거울을 왜 봅니까? 얼굴에 뭐가 묻지 않았나, 더 예쁘게 보이려면 어디에 어떤 화장품을 발라야 하나 보려고 거울을 보는 것 아닙니까? 자, 거울을 보고 자기 얼굴에 얼룩이 묻은 것을 보았습니다. 거울이 없었다면 얼룩이 묻었는지 몰랐을 텐데, 거울을 보고 그것을 알았으니 거울이 얼마나 유익합니까? 그런데 돌아서서 거울이 안보이니까, 자기 얼굴에 얼룩이 안보이니까 그걸 잊어버렸어요. 그러면 거울을 보았다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은 감격에 눈물도 흘립니다. 그 순간만은 정말 신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말씀 듣는 시간이 끝남과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다시 정욕과 거짓된 삶으로 돌아가 버린다면 그 들은 말씀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그래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 들은 바 도를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로마 제국 각 곳에 흩어져 사는 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동족으로부터의 핍박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성을 내면서 대적해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핍박자들을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들은 영혼을 구원할 도를 마음에 간직한 사람들입니다. 그 도를 듣기만 하지 말고 그대로 실행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가장 친했던 친구가 배신하고 빌려 간 돈을 떼어먹었다면 정당한 절차를 밟아 조치를 취해야겠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성을 내고 절제하지 못해 가지고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억울한 일을 참아야 할 때도 있고, 손해를 보아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고통을 감수하기도 해야 합니다. 이어서 야고보 사도는 경건, 즉 그리스도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삶의 형태에 관해 말합니다. 경건은 스스로 경건한 척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아와 과부, 즉 사회에서 가장 힘없고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힘이 되고 친구가 되어 주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의 믿음의 도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지식이 많은 것이 경건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도를 실천하는 경건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저나 여러분이나 모두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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