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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요일 02: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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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에는 '세상'이라는 단어가 스물 세번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세상은 언제나 하나님과 반대편에 서있고, 우리 그리스도인들과는 서로 대적되는 관계로 표현이 됩니다. 세상은 언제나 성도들을 미워하고 성도들은 이러한 세상과 싸워 이겨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세상'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정확한 뜻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내릴 때에 오늘 본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세상이라는 단어는 산이나 바다 같은 창조된 세상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돈이나 기타 재물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 세계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또한 세상이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태복음 10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이 말씀에 근거해서 세상이라는 단어가 가족들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려면 부모도 버리고 아내도 버리고 자식도 버려야 하고 아예 결혼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세상'이라는 단어는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세상이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본능과 욕구에 따라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며 사는 삶이 바로 '세상'이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내 욕심대로 그 일을 처리한다면 여러분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말을 할 때 그 말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하는 말이 아니라 내 기분대로 하는 말이라면 여러분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주머니에 돈이 생겼습니다. 그 돈을 사용할 때 '과연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가?'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내 욕심을 따라 사용한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은 이러한 세상의 특징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줍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첫째는 육신의 정욕입니다. 먼저 정욕이라는 말을 생각해 봅니다. 정욕이란 '강한 욕망, 절실히 바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원하고 바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히려 그런 마음이 없다면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지나치면 문제입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 욕심은 가질 수 있으나 지나치게 집착하고 과욕을 부리면 그것이 바로 정욕이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의 정욕이란 감각적인 욕심을 말합니다. 식욕이라든가 성욕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먹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그것이 정욕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먹는 것도 전문가가 있습니다. 와인 맛을 보고는 몇 년도에 어느 지방에서 담근 것이라고 알아 맞춥니다.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박수를 치는데 세상에 이것보다 웃기는 직업이 없습니다. 병에 붙은 상표를 보면 다 써있는데 그것을 보면 되지 그거 알아 맞추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겨울에 한국에 갔다가 어느 선배 목사님이 점심 먹으러 가지고 해서 따라 나섰더니 자동차를 타고 한 시간을 갑니다. 대단한데 가는 줄 알았더니 가보니 갈비탕 집입니다. 그런데 갈비탕 한 그릇 먹겠다고 사람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그 집 갈비탕이 유난히 맛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름대로는 미식가라고 자랑할지 모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먹고 마시는 일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그것이 육신의 정욕이 되는 것입니다. 성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성욕이 없으면 자식을 낳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지나치면 문제입니다. 요즘 인터넷 시대라고 하는데 나라마다 청소년 문제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습니다. 성적인 그림이나 동영상들이 무방비 상태로 청소년들에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서울에 가보면 아시겠지만 길이 너무 막히기 때문에 곳곳에서 운전자들을 대상으로 김밥이나 샌드위치를 파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커피도 팝니다. 길이 막혀 서있는 사이에 다 먹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서울에 가니까 새로운 장사가 하나 더 생겨났습니다. 봉고차 창문에 '성인용품 판매'라는 광고를 써 붙이고 서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정욕이 됩니다. 우리는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육신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사람은 그 욕망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욕망에 끌려 다니지 말고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안목의 정욕입니다. 안목의 정욕이란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것에 욕심을 내는 것입니다. 사람이 눈이라는 것이 참 간사합니다. 저희 집에서 20인치 짜리 TV를 보다가 몇 해전에 29인치로 바꾸었습니다. 그때는 화면이 왜 그렇게 커 보이든지 하여튼 극장에 온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참 작다고 느껴집니다. 어쩌다가 전자제품을 파는 곳에 가면 어마어마한 TV들이 있는데 하나 들여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나 이런 욕심이 지나치면 안목의 정욕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분수에 맞게 살아야지 좋다고 해서 다 욕심을 부리면 그것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여러분들이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쇼 윈도우에 진열된 상품을 보고 욕심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인가를 생각하십시오. 꼭 필요한 것도 아닌데 욕심을 부린다면 그것은 분명히 안목의 정욕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TV 연속극을 밤새워 보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만 보고 자야지 하면서도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또 한편 보고 그러다가 날새고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 보니 온 몸이 다 찌뿌둥하고 그래서 결국은 성경공부 빼먹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것도 역시 안목의 정욕입니다. 또한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쳐다보면서 마음속으로 멸시하는 마음, 무시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도 역시 안목의 정욕입니다. 나보다 못난 사람을 쳐다보면서 은근히 우월감을 가지는 것, 나는 얼마 짜리 옷을 입었는데 너는 또 남대문 옷이냐 하면서 은근히 교만한 마음을 갖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안목의 정욕입니다. 지난번에 서울에서 온 손님이 저를 보고 김복남씨를 닮았다고 해서 상당히 기분 나빠 한 적이 있습니다. 김복남씨가 누군지 아시죠? 패션 디자이너인 앙드레김 말입니다. 제가 어디를 봐서 김복남을 닮았습니까? 저는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듭니다. 패션디자인을 하려면 서민들이 입을 수 있는 값싸고 질 좋은 옷을 만드는 일에서 보람을 찾아야지, 말도 안 되는 옷을 말도 안 되는 가격에 파는 것이 잘하는 일입니까? 그런 사람하고 저하고 닮았다고 해서 상당히 기분이 나빴습니다. 화려한 것, 번쩍번쩍 하는 것, 멋있는 것, 이런 것 찾아다니느라고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물론 제가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여러분들은 절대로 듣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안목의 정욕을 따라 살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럴 돈이 있으면 소년소녀 가장에게 보내주시고 그럴 시간이 있으면 교회에 나와서 의자라도 닦으십시오. 적어도 여러분들만은 세상 사람들처럼 안목의 정욕을 따라 살아서는 안됩니다. 세 번째는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자기자신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십시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예로부터 가문에 대한 자랑이 대단했습니다. 본관이 어떻고 누구의 몇 대 종손이고 하는 것을 최고의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런 것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로 만나면 족보를 캐고 그래서 서로 대단하다고 치켜세우는 일을 보게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양반 때문에 망했습니다. 지금도 정치권력을 잡은 사람들 때문에 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몇 대 할아버지가 아무개다, 우리 삼촌이 아무개 국회의원이다, 이런 것을 절대로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될 수 있으면 아무도 모르게 숨겨야 할 일입니다. 오직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이것을 자랑하고 다니셔야 합니다. 또 우리들이 늘 자랑하는 것은 학벌입니다. 세상에서 하는 결혼식에 가보면 사회자가 신랑을 소개할 때 어느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고 하는데 한번도 '어느 대학을 겨우 졸업했으며' 이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전부 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또 우리는 일류대학을 나오면 삼대가 우려먹습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일제 때 와세다를 나왔다.' 그러면 우리가 얼마나 기가 죽어 살았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학벌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류대학을 나오고도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을 얼마든지 보았습니다. 또 초등학교를 중퇴한 학력을 가지고도 존경받을 만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학벌을 자랑하는 것도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외에도 우리가 자랑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가족에 대한 자랑이 있습니다. 우리 남편이 어떻고 자식들이 어떻고 하는 자랑이 있습니다. 또한 소유에 대한 자랑이 있습니다. 부동산이 얼마나 있고, 이번에 온 가족이 얼마를 들여서 어디 여행을 다녀왔고 하는 자랑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어느 클럽의 멤버라고 하는 자랑도 있습니다. 자동차에다가 '라이온스 클럽' '로터리클럽' 이런 표를 잔뜩 붙이고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긴 저도 클럽 카드를 몇 개 가지고 있습니다. 주유소에서 주는 No. 1 클럽카드도 있고, YMCA 멤버십 카드도 있습니다. 알고 보면 저도 꽤 괜찮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랑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런 자랑들이 우리 영혼에 무슨 도움이 됩니까?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런 부분들이 없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육신의 정욕 때문에 어떤 일에 집착해서 시간과 노력을 낭비한 일이 없는지, 안목의 정욕 때문에 분수에도 맞지 않는 욕심을 부리다가 뒤늦게 후회하는 일은 없는지, 세상에서의 자랑 때문에 교만했던 일은 없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렇게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본문 15절을 보십시오.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말씀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믿으면 좋고 안 믿어도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믿으면 살고 안 믿으면 죽습니다. 믿으면 영생을 얻고 안 믿으면 멸망합니다. 여기에는 타협이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선택만이 있을 뿐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세상을 사랑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말씀했습니다. 야고보서 4장 4절은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말씀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의 말씀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통하여 내치리라.' 여러분들이 무엇을 입에 물었다가 토하여 내치는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비위가 상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아니한 믿음은 하나님의 비위를 상하게 하다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내일은, 내일은' 하면서 게으름을 피우는 믿음생활, 아무런 생각 없이 예배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무의미한 믿음생활, 찬송을 부를 때 감격이 없고, 기도를 드릴 때 간절함이 없이 습관적으로 드리고, 말씀을 들을 때에 오늘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는 것, 열심히 없이 마지못해 하는 봉사,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면서 세상에서 복을 받으려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속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 같은 것을 구원해 주신 그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 나와 머리를 숙일 수 없는 나 같은 것을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이 시간 주의 전에 나와 예배드릴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연히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게 됩니다. 본문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안에는 본질적으로 그런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 속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여전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있습니까? 분명히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내 속에 하나님이 계시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들이 있어야 하는데 왜 세상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이 들어 있습니까? 깊이 생각하고 회개해야 할 문제입니다.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제가 골동품 하나를 갖고 있는데 미국 콜롬비아사에서 제작한 쌍 나팔 축음기입니다. 제작연대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한 40년은 넘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그 축음기를 볼 때마다 이 축음기를 처음 산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겠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아마 당시에는 상당히 많은 돈을 주고 샀을 것입니다. 너무 좋아서 며칠 잠을 못 이루었을 것입니다. 친구들을 불러모아서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며 파티를 열었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젊고 멋진 남자들과 아름다운 여성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마다 인생의 미래에 대한 알찬 계획을 이야기하며 흥겨운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은 지나갑니다. 젊음도, 아름다움도, 그렇게 자랑했던 모든 것들도 다 지나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약속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위해 살고 있다면 지금 당장 그 발걸음을 멈추십시오. 그곳은 여러분들이 가야할 길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십시오. 여러분이 사는 순간 순간, 여러분이 만나는 일들 속에서, 여러분들이 마주치는 사람들 속에서 내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지나가고 훗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영원한 천국에 거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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