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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따르라 (막 1: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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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라(1:16-34)

 

예수님의 목적은 사람을 살리는 어부를 찾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어부의 자격은 헌신과 순종입니다.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건강하거나 병들었거나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언제 어디로 부르시든지 주님의 뜻에 따르기로 결단하십시오.

성령님이 여러분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신앙과 복음은 공부해서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복음은 듣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5)

 

지난 주일에는 복음과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복음과 예수님이 마가복음 전체의 주제입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의 두 번째 주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갈릴리 호숫가를 거닐다가 시몬과 그 동생 안드레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셨는데 그들은 어부였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6~17)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는 모습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혼자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모두 가진 예수님께서 일하는데 왜 사람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훈련시키고 동역자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는 동역자이며, 하나님의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들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를 때 자격이나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어떤 단체에 들어가려면 자격과 돈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현대사회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사람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신학자나 성직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높은 학력을 갖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상식과는 거리가 있는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닷가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어부가 예수님이 찾은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자격이 아닌 목적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사람을 낚는 어부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는 돈을 많이 벌거나 큰 조직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제자의 자격, ‘순종과 헌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제자들은 어떻게 응답했을까요.

 

시몬과 안드레는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예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동생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것을 보시고 곧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그들도 아버지 세베대와 일꾼들을 배에 남겨 두고 곧바로 예수를 따랐습니다.”(18~20)

시몬과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곧장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따르는 것과 순종은 생각한 이후에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곧바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르심을 받자마자 순종했습니다. 저 사람이라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가겠다는 결단이 생긴 것입니다. 왜 그런 마음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마음은 굳건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은 헌신과 순종입니다. 헌신과 순종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그 사람하고 한 공간에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좋고 그 사람의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뜁니다.

예수님께서는 생각이 많고 복잡한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지 않습니다. 인생을 사는 것은 분명 복잡합니다. 그렇지만 크리스천들의 삶은 단순한 삶이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계산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제자로 부르지도 않습니다. 계산적인 사람들은 순종하고 헌신해야 할 순간에 자신의 유익을 따지느라 결정 내리기를 주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바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모습이나 능력을 보지 않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자신이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결정합니다. 왜냐하면 자신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모습을 보면 자신감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겉으로 아무리 좋게 포장을 한다 해도 본인은 자신의 본 모습을 정확하게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정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르심 앞에 즉각적으로 순종했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사랑, ‘포기와 희생

 

여러분은 언제 감동을 받습니까. 감동을 받는 순간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할 때입니다. 자기 것을 움켜지고 있는 사람은 감동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살면서 재벌에게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유명한 대학이 여러분에게 감동을 줍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랑이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사랑을 받을 때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이것이 치유입니다.

 

그토록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차가워집니다. 왜 그럴까요. 이기적인 사랑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은 사랑을 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랑이 식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위한 사랑이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조종하면 사랑이 끝납니다. 그저 포기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진짜 사랑을 받은 사람은 목숨을 걸고 그 사람을 따르게 됩니다. 반대로 상대방이 자신을 조종하고 이용하면 절대 따르지 않습니다. 절대로 상대방을 조종하지 마십시오. 자신이 상대방에게 준만큼 보상을 받으려고 하면 균형은 무너지고 원망이 가득하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려면 모든 것을 내려놓으십시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감동이 밀려올 것입니다.

 

삶으로 가르치는 참 교육

 

예수님께서는 훈련된 제자들을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훈련받은 사람만이 일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신 이후에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훈련은 강의실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이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강의가 아닌 삶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곧 안식일이 돼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치심에 놀랐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달리, 예수께서는 권위 있는 분처럼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21~22)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사용하셨고 안식일에 성경을 가르치셨습니다. 회당은 교회가 생기기전 유대인들이 모이는 장소입니다. 그렇다고 구약에 나오는 성전과 같지 않습니다. 구약의 성전, 예수님 당시의 회당, 사도행전 이후의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장소입니다.

 

회당은 성전처럼 거룩하거나 권위가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장소였으며 교육, 결혼, 장례식이 이뤄지는 생활공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유대인 랍비들이 가르치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반전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씀을 예수님을 통해 듣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권위가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은 빠져들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누구든지 단숨에 배우지 못합니다. 가르쳐주는 사람과 오랜 시간을 보내야만 배울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배우는 사람이 가르쳐 주는 사람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악한 영의 지배에서 벗어나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싶으신 것은 귀신과 관련된 일입니다.

 

바로 그때, 회당 안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 한 명이 울부짖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를 망하게 하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나와라!’ 그러자 더러운 귀신은 그 사람에게 발작을 일으키더니 비명을 지르며 떠나갔습니다.”(23~26)

 

여기서 귀신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귀신이 회당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귀신의 공격은 언제 어디서든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성전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귀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귀신이 사람 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음란한 생각이나 누군가를 헐뜯는 등 자신도 하기 싫어하는 행동을 멈추지 못할때가 있습니다. 무엇이 그 행동을 계속하게 할까요. 그것은 귀신입니다. 귀신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하고 싶지 않지만 그 행동을 계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도 이상으로 화를 자주 내는 것 또한 귀신의 영향 때문입니다. 만약 화가 자주 나는 분이 있다면 거울 앞에 서서 화내는 귀신은 떠날지어다!’라고 외쳐보십시오. 화가 가라앉을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과 귀신은 상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귀신이 예수님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우리를 망하게 하기 위해 왔느냐고 묻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보면 떠나게 돼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망하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여러분, 귀신은 이론이 아닙니다. 동화책에 나오는 상상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모두 너무나 놀란 나머지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로군. 저가 더러운 귀신에게 명령까지 하고 귀신도 그에게 복종하니 말이야.’ 그래서 예수에 대한 소문이 갈릴리 온 지역으로 삽시간에 퍼졌습니다.”(27~28)

 

당시 사람들은 귀신들린 사람과 발작하는 사람을 많이 봤는데 귀신이 떠나는 모습은 한 번도 본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자 귀신이 떠났습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귀신을 어떻게 쫓아 내셨습니까. “조용하라!”, “그 사람에게서 나와라!”며 꾸짖었습니다. 귀신에게 부탁하면 안 됩니다. 명령을 해야 합니다. 또한 귀신을 환영하면 안 됩니다. 귀신이 들어오는 이유는 내가 환영하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살인을 했거나, 간음한 사람을 자신들이 거할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귀신이 들어올 만한 환경을 만들지 마십시오. 귀신이 여러분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화가 나도 웃고, 미움이 생기면 감사하며 찬양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귀신이 거할 자리가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이러한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만 귀신을 쫓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도, 우리도 귀신을 쫓을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그것을 누리십시오. 귀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거역하지 못합니다.

요즘 크리스천들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예수님 당시 사람들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의 지배를 받으면 교회에 나와 설교를 듣고 성경공부를 해도 기쁨이 없습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악한 영을 내쫓으십시오.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십시오. 그것은 예수님의 권세로 가능합니다. 말씀을 보면 가짜가 보입니다. 성경을 보면 자신이 얼마나 잘못돼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고치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변하고 고쳐져야 합니다, 우리가 변화되면 그때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임하셔서 주신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쫓아 낼 수 있습니다.

 

기독교 믿음의 본질 말씀

 

셋째,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고쳐주셨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 곧바로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갔습니다. 이때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즉시 이 사실을 예수께 말씀 드렸습니다.(29~31)

 

예수님의 마음에는 언제나 긍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아가페적 사랑입니다. 2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집에서 심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선택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고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직장의 상사가 부하직원의 집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까. 드문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방의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고열에 시달리는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심방을 하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일입니다. 그 여인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셨습니다. 여러분, 은혜를 받고 기적을 체험하면 대접하고 싶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역훈련을 시키면서 문둥병자를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등 굉장한 기적을 목격하게 하셨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제자들은 충격을 받고 진리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날 저녁 해진 후에 사람들이 아픈 사람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을 전부 예수께로 데려왔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많이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귀신들도 내쫓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예수가 누구신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귀신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32~34)

 

당시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그동안 귀신들린 사람들을 아무도 도와주거나 고쳐주지 못했는데 예수님께서 고치셨기 때문입니다. 이 소문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들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할 것이 하나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고, 귀신도 나가고 병이 낫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교회가 타락한 이유가 복 받고, 병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일에만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언하고 병 고침을 받고 이러한 일들에만 치우치지 마십시오. 생각해보십시오. 복 받는 것이 목적이라면 우리의 신앙은 기복신앙이 될 것입니다. 또한 병을 고치는 것이 목적이라면 신비주의 신앙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귀신을 쫓는 것이 목적이라면 무당신앙과 다를 게 없습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값싼 종교가 아닙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위해, 내 병을 고치기 위해, 자녀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기도하는 곳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만 그것이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기적을 일으켰을까요. 기적은 하나님 나라의 싸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해 영광 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과 교회를 이용하지 마십시오. 믿음을 수단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본질에서 벗어나면 인간은 모두 죽게 됩니다. 이단에 빠지거나 귀신의 지배를 받게 되고 신앙이 신비주의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 믿음의 근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에서 벗어나면 악한 영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신비스러운 종교지만 신비주의가 아니고,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지만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분명하게 구별해야합니다. 믿음을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에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나를 따르라!’ 이 말씀에 헌신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것은 여러분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결정해 주십니다. 우리 스스로 길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조각하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갈 길을 알지 못했지만 순종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디로 보내든지 무슨 일을 시키시든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맡겨 순종하기로 서약하십니까. ‘아멘이라는 대답은 신앙적 결단입니다. 어떤 분들은 두려워서 대답을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만큼의 역량대로 보내십니다. 다시 한 번 눈을 감고 고백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언제 부르시든지 주님의 뜻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건강하거나 병들었거나 상관없이 우리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이러한 결단을 하신 분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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