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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하나님의 법을 신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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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7).

 수년 간 나는 하나님이 나의 개인적인 자유에 역행하는 활동을 하신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하나님을 나의 자유를 더 제한하기 위한 갖가지 새로운 방법들을 창안해내기 위해 그의 대부분의 시간을 활용하는 신령한 입법자로 생각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의 말씀 같은 구절들은 내게 별 의미가 없었다. 나는 그러한 말씀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면서도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오셨다면 내가 왜 이토록 종인 것처럼 느끼는 것일까 하고 의아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갈라디아서의 첫 세장을 읽고 있을 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담과 하와는 오직 한 가지 규율만을 받았을 뿐이다.”오직 한 가지 규율만이 있는 세상에서 사는 것을 상상해 보아라. 그것은 의미심장한 삶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가 보시기에 선하게 만드신 완벽한 환경 속에서 오직 하나의 “너희는 하지 말라”는 규율을 선포하셨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의 하나님은 규율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유의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그는 아담과 하와를 아름다운 동산에 두셨으며 실질적으로 “너희는 너희 마음대로 즐겁게 생활하여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은 왜 그리 많은 도덕과 선악에 관한 금기사항이 있는 것인가?”, “자유롭던 지난날들은 어디로 간 것인가?”라고 물을 것이다. 그 해답은 창세기 3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초기 선조들은 하지 말라는 바로 그 잘못을 저질렀으며 그리하여 죄악이 세상에 들어오는 문을 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죄악과 함께 죽음도 같이 들어왔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죄악과 죽음의 종노릇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자유라는 것은 모든 제한을 벗어 던짐으로 말미암아 얻어질 수 있다고 가르치는 반면에 성경의 가르침은 그와 완전히 상반된다. 인류는 절대적인 자유를 얻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 속에서 상당한 자유를 상실했다. 우리가 이러한 두 사실을 더하여 볼 때 자유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때에 얻어지고 유지된다는 사실이 보다 명백해진다. 선한 아버지가 그의 자녀를 위한 사랑의 제한을 정해 두듯이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위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경계를 설정해 두신다.
 다시 한번 말하건대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신뢰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다고 신뢰할 수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최고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가? 아담과 하와는 믿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죄악이 보장하리라 확신했던 자유 그 자체를 상실했다.
 나는 어떤가? 나는 하나님이 자유의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법은 나를 보호하고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는가? 만일 그러한 용의가 있다면 내가 지배하고자 했던 내 삶의 부분들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시간을 지금 가지라. 나의 믿음이 부족함을 고백하라. 이제 하나님께서 이 죄악이 만연한 세상에서 나에게 주실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를 주시리라는 확신 속에 평안히 거하라.

「하나님의 자유의 손길」,찰스 스탠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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