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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나의 슬픔을 등에 진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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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희 아버지는 전형적인 무뚝뚝한 ‘경상도 사람’이었습니다. 하루에 나눌 수 있는 대화라고는 불과 몇 마디 되지 않았습니다.
 “밥무읏나? 밥묵자. 불 꺼고 자라….”
 그래서 늘 대하기가 어렵게만 느껴졌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아버지를 ‘아빠’라고 불러본 기억이 없습니다. 초등학교 때 가장 부러웠던 모습은 옆집의 친구들이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었고, 아빠와 함께 배드민턴을 치고 있거나 야외 나들이를 같이 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제 아버지는 함께 놀아줄 수 있는 분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어떤 상담자가 연구한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아이들에게 ‘어떤 아빠가 가장 좋은 아빠인가?’라는 질문을 한 결과 아이들의 한결같은 대답이 ‘친구 같은 아빠’였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생각하기에 아이들이 존경하거나 좋아하는 아빠상이 ‘성공한 사람’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아빠가 결코 유명하거나, 권력 있는 사람이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함께 놀아주고 대화의 상대가 되어주는 ‘친구 같은 아빠’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눈높이라는 말이 상업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이 말이 바로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친구의 눈높이에서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것이 참된 친구였던 것입니다. 인디언의 말로 친구라는 단어는 ‘나의 슬픔을 등에 진 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답니다. 친구는 기쁨보다 슬픔을 함께 할 수 있는 벗인 것입니다.
 오늘 성서를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를 ‘벗’이라고 부르며 우리의 친구가 되시겠다 하셨습니다. 어쩌면 먼 여행길을 함께 떠나는 벗으로 여기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그와 함께 떠나는 여행은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의 아이들과 이웃들에게도 슬픔을 함께 나누는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생활과 묵상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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