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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십자가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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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재 목사(별세목회연구원장, 분당 한신교회 담임)

예수님이 오시기 전, 이미 수백 년 전에 한 선지자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과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작은 나귀새끼를 타고 이스라엘 도성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이것이 종려주일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도성 사람 중 어느 누구도 그 다음 반전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다던 그분은 이내 죽어야만 하는 죄수의 신분으로 바뀌었습니다. 손과 발이 묶인 채 서슬퍼런 종교 지도자들의 단 아래에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그 자리가 끝났는가 싶었더니 곧 빌라도 앞에 끌려가서는 모진 수모를 받으셨고, 유대왕 헤롯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빌라도 앞에 서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던 무리들로부터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선고를 받아야 했습니다.

로마의 웅변가이자 수사학의 대가였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는 “십자가, 단순한 그 말만이라도, 로마인의 입술뿐 아니라 생각과 눈과 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게 해야 한다. 십자가형은 가장 잔인하며 무서운 선고”라고 했습니다. 유대인 제사장이자 역사학자 요세푸스(Joseph ben Matthias)는 “십자가형은 가장 참혹한 죽음의 방법”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앞두신 예수님께서는 무척이나 긴장이 되셨고 힘드셨던 것 같습니다. 의사 누가는 이때의 예수님 모습을 이렇게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눅22:44).” 겟세마네의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자신을 통제하고 계셨지만(눅22:42), 인간으로서 경험하는 슬픔과 고통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심각한 고통과 두려움으로 이미 땀보다 훨씬 진한 농도의 분출을 하신 예수님께 로마병사들은 가공할 위력의 채찍을 사정없이 휘둘렀습니다. 고증에 의하면 당시 로마병사가 휘둘렀던 채찍은 네 갈래였고, 각 갈래의 끝에는 날카로운 뼈나 쇳덩이가 박혀 있었습니다. 그 채찍만으로도 이미 커다란 충격을 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많은 진액을 쏟아내셨으니 채찍의 충격은 몇 배로 가중되었습니다. 채찍으로 살점은 뜯겨져 나갔고, 피가 터져 나왔으며, 정신은 흐려져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마름’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목마름이란 혀와 입천장의 뿌리에 대한 감각입니다. 목마름은 입과 목이 건조하여 물을 마시고 싶은 갈망의 단계, 입과 목 안에 있는 침과 점액이 없어져 서로 달라붙는 단계가 연이어 진행됩니다. 특히 둘째 단계가 진행될 때는 숨은 뜨거워지고, 혀는 이와 입천장에 달라붙습니다. 몸은 그것을 없애려는 듯 끊임없이 삼키려는 동작이 일어나고 서서히 부어오릅니다. 만일 이 단계에 물 몇 방울만 떨어뜨려도 그 고통은 경감됩니다. 기억하십시오. 그 며칠 동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나눴던 최후의 만찬 이후 한 모금의 물도 입에 대지 않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내가 목마르다(요19:28)”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극한 상황에서 하신 힘겨운 탄식이었습니다.

이 모든 고통 끝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패배의 죽음이 아니라 승리의 죽음이며, 미완의 죽음이 아니라 완성의 죽음인 것을.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19:30)”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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