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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아는 것과 증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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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일본의 낌새가 수상함을 감지한 조정에서는 두 사람을 일본으로 보내어 사정을 알아 오라고 하였습니다. 다녀온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일본의 동향이 전혀 문제가 없고, 전쟁을 일으킬 염려가 없다고 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일본의 군사 조정이 군대를 일으켜서 침략해 올 가능성이 높으니 이에 철저히 대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정파적인 이익에 눈이 먼 조정 대신들은 전자의 증언을 받아들여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비극적인 침략을 맞고 말았습니다. 한 사람의 증언이 이렇게 큰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습니다.
 사실을 보고 사실대로 증언할 수 있는 것도 그 사람의 진실성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역사상 수많은 거짓 증언들이 등장했고, 그 때마다 진실은 왜곡되어 가슴을 치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예수님은 처형당했습니다. 이 사실을 미리 알아 차렸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서
“그래서는 아니 되옵니다!”를 외쳤고, 급기야는 예수님이 수난하시기 전날 밤에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역시 거짓 증언입니다. 아니 비굴함과 나약함이 그대로 나타난 모습입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육신의 목숨은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또 다른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건을 보고 사실대로 증언할 수 있는 것은 용기입니다. 자기를 포기하고 진실을 살리고자 하는 용기와 믿음이 없다면 ‘나는 모릅니다.’로 책임을 회피해서 도망가거나, 사실과는 다른 증언을 함으로서 거짓의 권세에 편입되거나 둘 중에 하나가 될 것입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증언의 용기까지도 훈련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견진성사의 의미도 그런 것이겠습니다. 믿음이 단단해졌으니 언제 어딜 가서도 크리스천으로서 증언하며 산다는 뜻이겠습니다. 단단한 돌은 어디에 던져져도 여전히 그 모습의 돌인 것처럼 말입니다.
 소설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꼬가 어느 날 식사를 준비하면서 당근을 자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당근은 가로로 잘라도, 세로로 잘라도 여전히 그 속에는 같은 색이라는 것입니다. 역시 자신의 생활을 이리 저리 잘라본 단면도 그럴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증언자로서 말입니다.

?생활과 묵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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