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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우찌무라 간조의 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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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이 한번은 야이로의 입장에 섰던 자이다. 그리고 성서의 이 기사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나는, 야이로의 실험이 반드시 나의 경우에도 되풀이 거듭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나의 딸의 불치의 병이 반드시 낫는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의사가 단념해도 나는 단념하지 않았다. 위독해져도 위독은 도리어 영광을 드러내는 때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나의 귀에 들리는 것은 다만 예수의 말씀이었다. ‘두려워 말라. 다만 믿기만 하라’고.

 

하지만 나의 신앙은 마침내 무효로 돌아갔다. 나의 딸은 의사의 진찰대로 죽었다.

 

야이로의 실험은 나의 실험으로 되지 않았다. 나는 매우 실망했다. 내게는 그 때에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없는 고통이 있었다. 그것은 회의의 고통이었다. 나의 신앙은 그 근저에서 흔들렸다. 나는 암흑의 심연에로 던져졌다. 그리고 교회의 비평가는 일층 나의 이 고통을 더했다. 그들의 어떤 이는 말했다. ‘그에게 아직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기 까닭에 이 고통이 임한 것이다‘라고. 어떤 다른 이는 말했다. ’그의 신앙에 커다란 흠점이 있기 때문에 그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이다‘라고. 기타 여러 가지 잡다한 비평이 가해져 나는 충혈되어 피 뿜는 상처위에 머리 지지는 열 인두(curling irons)를 대는 것 같이 느껴졌다. 실로 일생 잊을 수 없는, 쓰라린 경험이었다.

 

하지만, 나는 후에 홀로 고요히 생각했다. 나보다 훨씬 신앙이 높은 사람으로 나와 같은 경험을 가진 많은 사람의 실험을 읽고, 또 들었다. 특히 또 다시 깊이 성서를 연구했다. 그리고 야이로의 딸의 이 경우는 결코 누구에게나 거듭 되풀이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신자의 부활의 교의를 보여 주기 위한 커다란 기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누가복음 7장에 있는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신 것이 다른 예이다. 요한복음 11장에 기록된 죽은 나사로의 부활의 경우는 그 가장 현저한 것이다. 모두 예수에게 기도하는 자에게 죽음의 쓴 경험은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다. ‘끝날에 내가 이것을 다시 살릴 것이다’라는 교훈이 실물교훈인 것을 알았다. 즉 내 딸의 경우에 있어서도, 나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 아니다. 응답되고 있는 것이다. 끝날(마지막 날)에 있어서, 예수께서 모두 그를 믿는 자를 다시 살리시는 때에, 그는 내 딸에게 향해서도 달리다 구미, 달아 일어나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딸은 이 음성에 따라서 다시 살아나, 그녀는 다시 우리들 부부의 손에 넘겨주신바 되신 것이다. 그 때까지는 비평가가 무엇이라 하든,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다만 믿어야 할 것이다. 물론 내가 이렇게 말하면, 세인은 물론의 일, 교회의 사람까지가 조소하리라. 그러나 나는 예수를 믿는다. ‘내게 온 사람은 끝날에 이것을 다시 살릴 것이다’라고 하신 주 예수의 말씀을 믿는다. 그리고 이렇게 믿어 날로 날로 그 기쁨의 날이 이르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해석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예수의 기적은 모두 기적 이상의 높은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빵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로서 5천인을 먹이신 기적은, 육의 식물로서 사람을 먹이기 위한 기적이 아니라, ‘나는 생명의 빵(양식)이다’라는, 그 자신에 관한 커다란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요한복음 6장 참조). 야이로의 딸의 부활에 있어서, 모든 신자는 그 기도에 의해 그 사랑하는 자의 병을 치유 받고 사자를 부활케 하실 것이라 믿는 것은, 모든 신자는 기적적으로 그 육체를 키울 것으로 믿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죽음은 끝 날까지 제거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육체에 있어서 다시 살리신바 되어도, 다시 죽음을 맛보지 않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야이로의 딸로 베다니의 나사로도, 예수께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바 되어 영구히 죽음을 면제받은 것은 아니다. 썩어야 할 육체의 부활은 가장 소망스러운 부활은 아니다. 가장 소망스러운 부활은, 다시 죽는 일없는 부활이다. 그리고 예수는 자기에게 이 능력 있음을 보이시기 위해, 이 기적을 행하신 것이다. 하지만 이 기적은 끝날의 부활을 가르치기 위한 조작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것은 참으로 있었던 일이다. 그것은 기사 그것이 증명한다. 예수는 이때에 아람어(8권 239역주)를 사용하여 달리다구미(9권 201역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 등, 특히 최후의 일절에 ‘또 딸(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명하셨다’고 있는 것 등, 이것은 목격자에 의해 전해진 사실 그대로 보는 길 외에는 방도가 없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동시에 또 인자였다. 그에게 인간미가 담뿍하셨다. 그는 허다한 종교가가 하듯 주술을 소녀에게 베풀지 않았다. 그녀가 해득할 수 있는 말로서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딸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하셨다. 하나님다운, 사람다운 그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들 약한 자를 구원하시어 이것을 자신에 닮은 하나님의 자녀로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또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예수는 지금도 야이로에게 베푸신 치료와 동양의 치료를 실시하신다. 우리들은 그 능력을 끝 날에 국한(localization)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끈은 대이고 지금은 소이다. 우리에게 야이로 이상의 신앙이 없어서는 안 된다. 즉 내 딸은 치유 되거나 치유 못되거나, 최후의 치유, 즉 구원을 믿고, 감사하여 그날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 사랑하는 자의 죽음에 직면하여, 이 신앙을 가지기는 아주 어려운 바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의 신 없음을 불쌍히 보신다. ‘주여 믿음 없음을 도우소서’ (마가복음 9:24)하는 기도에 응답하신다.

 

우찌무라 간조의 ‘갈릴리의 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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