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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백만명구령운동의 전개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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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부흥운동(1903년)과 평양대부흥운동(1907년)의 열기가 소멸되기 시작한 1909년 여름, 이를 안
타깝게 여긴 개성의 남감리교 선교사들이 산기도를 떠났다. 이들은 소강 상태에 빠진 한국 교회를
위해 “1년 안에 교인 5만 명을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당시 개성 교인은 5천 명 수준이었다. 그
해 10월 서울에서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연합공의회를 열었는데 그 자리에서 ‘백만명구령운
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당시 한국 개신교인 수는 20만 명이었다.
선교연합공의회에서 백만명구령운동을 결의하던 그날,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채프먼(J. C.
Chapman)이 이끄는 아시아 순회 전도단이 내한했다. 이들의 집회가 한국 교회의 전도 운동에 불
씨를 당긴 것은 물론이다. 이후 지역과 교회마다 부흥 운동과 전도 운동의 열기가 되살아났다. 교인
들은 원산부흥운동 직후부터 전도에 사용할 시간을 구별해 드리는 ‘날연보’를 적극 실시했고, 여기
에 ‘쪽복음 전도’를 가미했다. <마가복음>과 낱장 전도지를 대량 인쇄해 날연보인들을 통해 살포한
것이다. 날연보에 참가하지 못한 사람들은 인쇄 헌금을 내서 전도에 참여했다. 백만명구령운동이
적극적으로 실시된 1910년 1년 동안 전국 교회에서 <마가복음> 70만 부와 낱장 전도지 수백만 장
이 뿌려졌다. 또 교인들은 예배를 마치면 거리로 나가 전도했다. ‘노방 전도’, ‘심방 전도’, ‘사랑방
전도’ 같은 토착 전도 방식이 이때 정착됐다. 그 결과 전국 방방곡곡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
었다. 그 주역은 물론 평신도들이었다. 이들은 선교사나 유급 전도자들이 못 가는 ‘땅 끝’까지 들어
가 복음을 전했다.
- 「한국 교회 처음 이야기」/ 이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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