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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마음을] 우주에서 가장 근사한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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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우주에서 가장 근사한 아버지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쉰살이셨다. 그리고 아직 아무도 그런 이름을 갖고 있지
않았을 때 아버지는 이미 '미스터 맘마'로 통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무슨 이유 때문에
엄마 대신 집에 계셨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어렸고, 친구들 중에서 늘
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유일한 아이였다. 나는 내 자신을 매우 행운아로 여겼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나를 위해 많은 일들을 해주셨다. 먼저
아버지는 스쿨버스 운전사를 설득해 원래는 버스가 몇 블럭 떨어진 곳에 서도록 되어
있었지만 우리집 바로 앞에서 나를 태워 가도록 했다. 아버지는 내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언제나 나를 위해 점심을 준비해 놓으셨다. 점심 메뉴는 대개 땅콩
버터와 계절에 맞게 만든 샌드위치였다. 샌드위치는 나무 모양으로 잘라져 있고, 그
위엔 초록색 설탕이 뿌려져 있었다.
  내가 좀 더 자라서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나는 아버지의 그러한
'유치한' 사랑의 표시로부터 달아나고자 애썼다. 하지만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으셨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더 이상 집에서 점심 먹을 필요가 없게 되면서부터 나는
도시락을 싸갖고 다니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서 나를 위해 도시락을
만드셨다. 나는 어떤 메뉴가 들어있을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도시락 봉지에는
아버지의 트레이드 마크인 산 풍경이 그려져 있거나, '천사 아빠 K.K.로부터'라는
글씨와 함께 하트 모양이 그려져 있곤 했다. 그리고 안에 든 냅킨에도 똑같은 하트
모양이나 '널 사랑한다'라고 써 있곤 했다. 또 대부분의 경우에 아버지는 '왜
마마보이는 있는데 파파보이는 없을까?'라는 농담 한 줄이나 수수께끼 같은 것들을
적어 놓곤 하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언제나 나를 미소짓게 만드는 말들, 또 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을 써 넣으셨다.
  나는 다른 학생들이 내 도시락 가방이나 냅킨을 보지 못하도록 그것들을 숨기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하루는 친구 하나가 그 냅킨을 보았고 그것을
빼앗아 교실 전체에 돌렸다. 나는 창피해서 얼굴이 확 달아 올랐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음날 점심 시간이 되자 같은 반 친구들 모두가 내 냅킨을 보려고 몰려든 것이었다.
친구들의 그런 행동으로 보아 그들도 그런 종류의 사랑을 누군가로부터 받기 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 내내 나는 그 냅킨들을 받았고, 아직도 그것들
대부분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내가 대학을 다니기 위해 집을 떠났을 때 나는
그 메시지가 중단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은 계속되어 나와 내
친구들을 기쁘게 했다.
  나는 날마다 수업이 끝나면 아버지를 못 보는 것이 아쉬웠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자주 전화를 했다. 따라서 내 전화요금 고지서는 언제나 최고 금액을 기록했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셨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난 단지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대학 첫해부터 우리는 이런 의식을 계속했다. 내가 작별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으려고 하면 아버지는 언제나 나를 부르셨다.
  "앤지?"
  내가 대답했다.
  "네, 아빠."
  "널 사랑한다."
  "저도 아빠를 사랑해요."
  그리고 나는 거의 매주 금요일마다 아버지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내가 사는 아파트
경비원은 그 편지들이 누구한테서 오는가 잘 알고 있었다. 겉봉에는 항상 '멋진
남자'라고 적혀 있었다. 봉투는 종종 크레용으로 주소가 써 있었고, 안에 든 편지에는
대개 우리집 고양이나 강아지, 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그린 그림이 동봉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주말에 집에 들렀을 때는 친구들과 어울려 동네를 돌아 다니는 모습을
그려 놓곤 하셨다. 아버지는 또 산 풍경과 하트 모양과 '천사 아빠 K.K.로부터'라고 써
놓으셨다.
  우편물은 매일 점심시간 직전에 배달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카페에 갈 때면
아버지의 편지를 들고 가곤 했다. 나는 그것들을 감추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왜냐하면 내 룸메이트는 아버지의 냅킨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생이었기 때문이다. 머지 않아 그것은 금요일 오후의 의식처럼 되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읽어 주었으며, 그림과 봉투는 친구들 손을 거치며 모두에게 돌려
읽혀졌다.
  아버지가 갑자기 암에 걸리신 것이 이 무렵이었다. 금요일마다 오던 편지가
끊어졌을 때 나는 아버지가 몹시 편찮으셔서 편지를 쓸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는 보통 새벽 4시에 일어나셔서 조용한 집안에 혼자 앉아 나에게 편지를 쓰곤
하셨다. 만일 금요일에 편지가 오지 않으면 그 편지들은 대개 하루나 이틀 뒤면
도착했다. 늦어지긴 해도 편지는 어김없이 왔다. 내 친구들은 아버지를 일컬어 '우주
공간에서 가장 근사한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리고 하루는 친구들이 아버지에게 그
타이틀을 수여하는 카드를 보낸 적도 있었다. 카드 밑에는 친구들 모두가 서명을 했다.
  나는 아버지가 우리들 모두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가르쳤다고 믿는다. 내 친구들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사랑의 표현이 담긴 냅킨을 보내기 시작했다고 해도 나는 별로
놀라지 않으리라. 아버지는 친구들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새겨 놓았으며, 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자녀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도록 만드셨다.
  내가 대학 4년을 다니는 동안 정기적인 간격을 두고 아버지로부터 편지와 전화가
왔다. 하지만 마침내 내가 집으로 가서 아버지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릴
시기가 찾아왔다. 아버지가 점점 더 편찮아지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시기는 우리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다. 언제나 젊게 행동하셨지만 아버지는 이제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다.
마지막에 가서는 아버지는 내가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했으며, 나를 당신이 여러 해
동안 만나지 못한 어떤 친척으로 착각하곤 하셨다. 나는 그것이 아버지의 병 때문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내 이름조차 기억 못하시는 것은 나한테 큰
슬픔이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나는 아버지와 함께 병실을 단 둘이서 앉아 있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텔레비전을 보았다. 내가 떠나기 위해 일어섰을 때 아버지가 나를 부르셨다.
  "앤지?"
  "네 아빠."
  "너를 사랑한다."
  "저도 아빠를 사랑해요."
  <앤지 K. 워드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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