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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마음을] 만일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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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열어주는 이야기>>

  만일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당신이 잃은 모든 것에 대해 당신은 그만큼 어떤 다른 것을 얻은 것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

  레바 맥켄타이어가 <내가 만일 그걸 알았더라면>이라는 노래를 불러 히트시켰을 때
사람들은 그 노래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 궁금해 했다. 그 노래는 만일 내가
다른 모든 친구들과 똑같은 날에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았더라면 결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성장한 뉴멕시코 주의 클로비스에서는 열여섯살이 되면 운전면허증을 딸 수
있다. 단 운전자 교육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수하면 될 뿐이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우리반의 거의 모든 아이들이 열여섯살이 되었다. 중학생 시절의 마지막 날, 운전자
교육 과정을 무사히 통과한 아이들은 모두 자신의 운전면허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날의 흥분과 기대는 우리에게는 거의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우리의
선생님들에게는 거의 참을 수 없을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비록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야 열여섯살이 되긴 했지만 친구들이 차를
운전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온 몸에 전율을 느꼈다. 이제 다시는 우리가 엄마들
뒤를 병아리떼처럼 졸졸 끌려다니지 않아도 되리라. 마침내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손에 넣은 것이다.
  아버지들이 흔히 그렇듯이, 우리 아버지는 그 상황을 다른 시각으로 보셨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더없이 사랑하면서 동시에 더없이 보호하는 분이셨다. 그날 내가
데나, 로리, 데비, 크리스티, 조나 등과 함께 신나는 방학 계획을 떠들면서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나를 앞에 불러 놓고서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절대로 안 된다. 네가 상처를 입는 것은 둘째치고 내가 더 많은 상처를 입을
것이다."
  아버지는 내 친구들이 아직 믿을 만한 운전자가 못 된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가을에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절대로 친구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놀러가선 안
된다고 못받으셨다.
  나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닭똥 같은 눈물이 뺨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아버진 단순하게 딸의 안전만을 생각하실 뿐 그밖의 것은 보시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볼 수 있었다. 그 길고 소중한 여름날들을 혼자서 집안에 처박혀
외롭게 보내야 하는 내 자신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서러움이 목까지 차올랐다. 나는
십대의 아이들이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논리, 이를 테면 "아빠, 그건 공정치
못해요."라든가 "하지만 아빠, 다른 아이들은 다 가잖아요." 같은 주장들을 동원해
아버지를 설득하려고 해 보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는
이미 법안을 통과시킨 뒤였다. 친구들과 함께 놀러가는 것이 완전히 금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친구들의 엄마가 우리를 차에 태우고 갈 경우에만 허락이 떨어졌다.
  열여섯살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한다면, 새 운전면허증을 가진 십대 소녀들
중에 과연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려고 할 것인가도 잘 알
것이다. 그것도 단지 아랫 동네에 사는 엄격한 집안의 소녀와 함께 가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는 그저 친구들의 얼굴이라도 볼 양으로 뙤약볕
아래 집 앞 잔디밭에 나와 앉아서 <세븐틴> 잡지를 읽는 척하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외로운가를 눈치챈다면 친구들이 엄마 차를 빌려 타고 횡 하니 지나가기 전에 잠시
멈춰서 한마디 말이라도 걸 것이라고 난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아이는 거의 없었다.
  물론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할 수도 있었다. 몰래 집을 빠져나와 친구들과 함께 차를
몰고 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그 여름날을
나는 실망과 실의에 차서, 친구가 전부를 의미하는 나이에 친구들로부터 부자연스럽게
떨어진 채로 홀로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고난의 세월은 그만큼의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난 그 여름에 배웠다. 때로
천사는 용감하고 슬픈 얼굴에 감동받는다. 내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천사는 바로
도로시 고모였다. 그 여름의 어느날 고모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화가 나의 모든 걸
바꿔 놓았다.
  도로시 고모는 시보레 자동차 대리점의 경리과에서 일하고 있었다. 큰 고모
도로시와 작은 고모 캐더린은 젊었을 때 뉴멕시코 동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녀들로
손꼽혔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고모들의 아름다움은 얼굴에만 있는 게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서 나온다는 것이 뚜렷해졌다. 도로시 고모는 둥근 갈색 안경을 쓰고
물결치는 금발머리에다 늘 환한 미소를 머금고 다니셨다. 그녀는 항상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위 사람들을 대했기 때문에 그녀 옆에 있으면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나은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고모는 전에는 내게 전화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날 고모는 내게
전화를 걸어 여름 방학 동안 자동차 대리점 일을 도와주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해 여름, 교사이신 엄마가 아침마다 나를 차에 태우고 고모의 회사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래서 나는 도로시 고모와 그녀의 비서들인 크레올라, 소냐, 린과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그 여성들 모두 내게 너무도 잘해 주었다. 아침마다 그들은 내 옷을 칭찬해 주고,
내가 아침으로 초콜릿 도너츠를 세 개나 먹으면서도 여전히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것이 미워 죽겠다고 눈을 흘기곤 했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 크레올라는 내가 언제나
노래를 흥얼거린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내가 잘못한 줄 알고 노래 부르는 걸
멈췄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노래를 부르면서 일하라고 성화였다. 대부분의 많은
어른들이 일하는 동안 노래 부르는 걸 두려워 한다고 그들은 말했다.
  또한 그들은 운명이라든가 종교, 정치와 같은 무거운 주제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알고 싶어했다. 그들은 언제나 내 얘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크레올라,
소냐, 린은 내가 운전면허증도 갖고 있지 않은 어린 나이라는 것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내게 맡겨지는 어떤 일이라도 해냈다. 그 결과 그들은 나를 신뢰했다.
  나는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했다. 무거운 서류 상자를 들고 좁은 계단을 올라
다녔으며, 온갖 정리 안 된 서류들로 가득한 먼지 낀 캐비닛을 청소했다. 나는 또
어른들이 일하는 방식을 배웠다. 서류를 넘길 때 호치키스에 손톱이 부러지지 않도록
교묘히 손가락을 구부리는 법, 물품 구입서 용지를 흡입관에 집어넣어 다른 부서로
보내는 방법을 배웠으며, 또 어떤 판매사원이 누구와 연애를 하고 있는가를 놓고 수다
떠는 법도 배웠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신나는 일은 일과를 마친 뒤에 타자기를 갖고 놀면서 혼자서
타자치는 법을 배우는 일이었다. 나는 장차 작가가 되려는 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내게 타이프 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멋지게 디자인 된 시보레 자동차 회사의 서류용지를 타자기에 끼우고 서투른 솜씨로
이런저런 문장들을 타이핑하곤 했다.
  나의 이름 자나 리 스탠필드입니다. 별들이 내 머리 위에서 반짝입니다. 나는 다시는
아침식사로 닭다리를 먹지는 못할 것입니다.
  도로시 고모는 종종 나를 데리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뭐니뭐니해도 쌍둥이 크로니였다. 쌍둥이 크로니가 무엇인지 내게 묻지 말라.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그곳이 차를 탄 채로 주문을 하는 식당이고, 커다른 간판에
먹음직스런 핫도그 두 개가 춤을 추며 그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감자 튀김과 텍사스 토스트와 함께 큰 상자에 담긴 후라이드 치킨을
주문했다. 고모의 차에 앉아서 점심을 먹으며 우리는 중요한 대화들을 나눴다. 이를
테면 1943년에는 고등학교가 어떠했는지, 죠 고모부가 전쟁에서 어떻게 폐 한 쪽을
잃었는지, 그리고 고모의 딸인 내 사촌 주디는 왜 그토록 일찍 결혼해야만 했는지
하는 것들이었다. 이따금 내 친구들이 잔뜩 차에 올라타고 그곳에 들르곤 했다. 나
역시 그들과 어울리고 싶긴 했지만 나는 내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고,
또 도로시 고모가 내 친구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 여름이 끝나갈 무렵 나는 학교에 입고 갈 옷들을 살만큼 충분한 돈을 모았다.
나는 작은 꽃이 수놓인 티셔츠, 세가지 색상의 헐렁한 바지, 가느다란 허리띠 등을
샀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며칠 전에 나는 머리를 <세븐틴> 잡지에 나오는
여학생들처럼 짧게 잘랐다. 우리 여학생들에게 있어서 헤어 스타일의 갑작스런 변화는
곧 인생의 변화를 상징한다는 것 쯤은 누구나 알고 있으리라.
  나는 정말 좋은 의미에서 다른 느낌을 갖고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전보다 더
나이를 먹었고, 강해졌으며, 더 자신감이 생겼다. 가장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내
생애에서 최초로 나는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학생이 되었다. 가까스로
운전면허증도 땄으며, 동창회 임원과 학생회 간부로 선출되었다. 그 다음에는 반에서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아이로 뽑혔다. 내가 보낸 그 고독한
날들 이후에 찾아온 너무도 뜻깊은 영광이었다.
  십대 여학생의 생활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잘 알 것이다. 그 여름 이후에 나는
도로시 고모를 별로 자주 만날 수 없었다. 고작 일년에 한두 번씩 고모의 사무실에
들러 고모와 함께 쌍둥이 크로니로 프라이드 치킨을 사먹으로 갔을 정도였다.
크레올라와 소냐와 린은 그 초콜릿 도너츠들이 마침내 내 몸매를 망쳐놓기 시작했음을
알고 만족해 했다.
  내가 대학을 졸업했을 때, 도로시 고모와 죠 고모부가 나를 축하해 주러 졸업식장에
오셨다. 도로시 고모는 휴가 여행에서 산 아름다운 금팔찌를 내게 선물했다. 팔찌가
들어 있는 상자 안에는 팔찌보다 훨씬 더 소중한 선물이 들어 있었다. 조그맣게 접혀
있는 그것은 낡고 때묻은 시보레 자동차 회사의 서류 용지였다.
  <나의 이름은 자나 리 스탠필드입니다. 별들이 내 머리 위에서 반짝입니다. 나는
다시는 아침식사로 닭다리를 먹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로부터 6년 뒤 나는 내슈빌(컨트리 음악의 본고장)에서 살고 있었다. 싱어송
라이터로 일하고 있었지만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도로시
고모가 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모는 암과 용감하게 싸웠으며 아름다운
금발머리를 잃는 것을 혐오했다. 하지만 뻣뻣한 금발 가발을 쓰고서도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내가 고모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크리스마스 때였다. 그 얼마 전에 나는 사촌
주디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도로시 고모가 곧 돌아가실 것 같지만 그래도 아직
전화를 받을 기운이 있으니 나더러 작별인사를 하라는 것이었다. 주디는 내게 도로시
고모가 입원한 뉴멕시코에 있는 병원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손에 들고서 나는 누군가 사랑을 갖고 해주는 아주 작은
일이 우리의 삶에 매우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날 도로시
고모에게 전화를 거는 일은 나로서는 가장 고통스런 일이었다. 나는 고모에게 내가
얼마나 고모를 사랑하는가를 말했다. 내가 누군가 필요했을 때 내게 손길을 내밀어 준
것에 대해 나는 고모에게 감사드렸다. 또 고모가 주위 사람들에 대해 언제나 좋은
점만을 보아 준 것에 대해 감사드렸다. 나는 전화를 끊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이
영원히 계속 되기를 나는 바랬다. 아예 시간이 멈춰 서서 우리가 옛날로 돌아가
고모와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도로시 고모와 나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작별 인사를 했다. 고모는 내게 말했다.
  "난 널 사랑한다. 그걸 알고 있니?"
  나도 말했다.
  "저도 고모를 사랑해요."
  그리고 나서 나는 전화를 끊었다. 텅 빈 아파트 안에 내 흐느낌만이 채워졌다.
친절한 마음씨로 우리의 삶을 채워 주고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거나 그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가를 말해 주기도 전에 우리 곁을 떠나가 버리는 모든
아름다운 사람들에 대해 나는 생각했다.
  그로부터 이삼 주일이 지난 어느 외로운 일요일, <만일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의
가사들이 눈물이 펑펑 흐르는 가운데 내 안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아직 노래 가사의
멜로디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완성인 그 가사를 내가 아는 가장 재능이 뛰어난
작사가인 크레이그 모리스에게 가져가서 그것들을 다듬어 멋진 가사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열다섯살이었을 때 도로시 고모는 내 삶을 바꿔놓았다. 그리고 그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또다시 <만일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으로 내 삶을 바꿔 놓은 것이다.

  그것이 비를 맞으며 걷는 우리의 마지막임을 만일 내가 알았더라면
  나는 폭풍 속에서도 몇 시간이나 당신을 지켰으리.
  내 가슴에 연결된 생명줄처럼
  당신의 손을 잡았으리.
  그리고 폭풍 아래서 우린 따뜻했으리.
  그것이 비 속에서의 우리의 마지막 만남임을 만일 내가 알았더라면.

  다시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는 걸 만일 내가 알았더라면
  난 당신이 말하는 모든 것을 전부 기억했으리.
  그래서 이 고독한 밤에 그것들을 다시 한번 추억할 수 있으리.
  당신의 말들이 내 마음속에서 계속 살아 있게 했으리.
  다시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는 걸 만일 내가 알았더라면.

  당신은 내 가슴의 보석이었네.
  당신은 언제나 내 곁에 서 있던 사람이었네.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나는 어리석게도 당신이 영원히 그곳에 있을 것으로 믿었네.
  그러나 어느날 내가 눈을 감고 있는 사이에
  당신은 내 곁을 떠나갔네.

  그것이 당신 곁에서 보낸 나의 마지막 밤이었음을 만일 내가 알았더라면
  나는 기적이 일어나 새벽을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 했으리.
  그리고 당신이 내게 미소지었을 때
  당신의 두눈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으리.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이 언제까지나 계속 되리라는 걸
  당신에게 알게 했으리.
  만일 내가 알았더라면, 만일 내가 알았더라면.

  내 사랑을 보여 주었으리
  만일 내가 알았더라면

  레바 멕켄타이어가 비행기 사고로 숨진 자신의 뮤직 그룹 동료들을 추모하며 이
노래를 취입했다. 그 이후 이 노래는 세인트주드 아동 병원의 자선 모금 운동, 십대
청소년들에게 음주의 위험성을 교육하는데 필요한 기금 마련 운동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에이즈 환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불러모으는 데에도 이 노래가 불리워졌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장례식에서 이 노래가 불려지고 인용되었으며, 심지어 고등학교
졸업식장에서도 불리워졌다. 또한 영화 <8초간>의 삽입곡으로 쓰여져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 결과 나는 초등학생과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순회 콘서트를 미국 전역에서 실시하게 되었다. 만일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자나 스탠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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