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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서거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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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어머니와 사촌인 노미 누나는 곧잘 툇마루 끝에 앉아 ‘서거프다’는
말을 하곤 했다. 서글프다는 말의 사투리로 보이는 이 말은 서글프다는 말과는 뉘앙스가 많이 다르다. 설거지와 빨래, 집안청소가 대충 끝난 시간, 아직
오종(午鐘)이 불기 전, 마지막 빨래를 빨랫줄에 걸고 바지랑대로 받쳐올리고
나면 툇마루에 오전 볕이 따스하게 드는 시간이 온다. 이제 일도 끝나고 잠시
손이 쉬는 고요한 시간, 따뜻한 봄볕이 장독을 달구고 혹은 가을날이면 바지랑대 끝에 빨간 고추잠자리가 앉을 듯 말 듯 맴도는 모습을 넋놓고 바라보는 그런
시간에 어머니와 노미 누나는 곧잘 이 ‘서거프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그것은 무언가 한가하면서도 쓸쓸하고 그러면서도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마음의 한순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 말에서는 삶의 고단함,
우리 존재의 황량함이 묻어났다. 그것은 일상적인 모든 관심을 거두어들임으로써 잠시 홀로 된 우리 존재의 쓸쓸한 실체를 의식했을 때 나오는 말이다. …
이 고요를 우리 시대는 잃어가고 있다. … 의식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그리하여 전체를 돌아보는 일은 희귀한 일, 드물게만 발생하는 일이 되었다. 아니
그런 순간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대체로 그런 순간을 견뎌내지 못한다.
우리는 그런 순간이 다가오면 그것의 의미를 미처 깨닫기도 전에 텔레비전을
켜거나 인터넷에 접속하거나 잠을 자버린다.
고요 속에서 미세하게 가물거리는 속삭임에 귀 기울이기를 우리의 의식은
이미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 이수태, 생각의 나무, <어른 되기의 어려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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