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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그릇은 담긴 내용물에 따라 이름이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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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 유럽 사회는 노예무역과 아동노동, 대중의 빈곤과 상류층의 타락 위에 세워졌습니다. 당시 영국은 세계 최고의 해군력과 상선을 갖추고 노예무역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영국의 선박들은 서아프리카를 통해 10만 명의 노예들 중 절반 이상을 실어 날랐으며, 1783년부터 1793년까지 리버풀의 노예선만 약 30만 명의 노예를 서인도 제도로 실어 날라 1천 500만 파운드(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약 2억 5천만 파운드)에 팔아넘겼다고 합니다. 영국에서의 노예무역은 1600년대에 국왕의 칙허와 의회의 법령으로 합법화되었습니다.

노예무역은 영국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영향력에 대하여 1791년 리버풀의 의원이었던 탈턴 대령은 "노예무역을 폐지한다면 무역은 순식간에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 무역 때문에 연간 5,500명 이상의 선원이 고용되고, 약 160척의 배가 사용되었으며, 수출 물량도 80만 파운드에 달했습니다. 노예무역을 폐지한다면 서인도제도의 무역도 파국으로 치달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수출량과 수입량은 거의 600만 파운드에 달하며, 약 16만 톤의 선박과 수만 명의 선원들에게 일자리를 창출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예무역을 금하는 것은 반역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는 사명감을 갖고 일어나 이 제도를 폐기 시키고 양심과 정의감이 살아 있는 나라 영국을 만들었습니다. 수많은 반대를 헤치고 “노예무역 폐지”라는 사명을 붙들고 투쟁한 지 20년 만에 노예무역 폐지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뜻을 세운지 56년 만에 무려 150번의 의회 논쟁을 통하여 노예제도가 영국에서 사라졌습니다.

그가 그런 엄청난 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권력을 쥐고 타락한 생활을 하던 160센티미터의 작은 체구를 가진 월버포스는 필립 도드리지의 『영혼에서 종교의 부흥과 진보』라는 책을 공부하면서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완전히 변화가 되었습니다. 상류층 인사가 모이는 다섯 개 클럽에서 탈퇴하고 도박과 춤을 끊었으며, 당시 타락 일로로 흘러갔던 연극 극장에 가는 것도 중단했습니다. 성경책에 몰입하였고 신앙은 그를 지탱해주는 거대한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그의 정치 활동의 목표는 바뀌었습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앞에 두 가지 커다란 목표를 두셨다. 하나는 노예무역을 근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습을 개혁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모시면 새로운 인생이 시작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목사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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