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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월산식당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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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은 추억 속에서 더 아름다워진다. 입지전적인 인물 이야기가 나오면 내
이야기인 듯 행복해지고. 이모 변호사님이 계셨다. 어릴 적부터 은행 사환을 하며 끼니 걱정을 하던 그분은 어느 날 도깨비처럼 고시에 합격했다.… 국회의원에
출마한 그분에게 어른들은 표를 몰아주었고 차관까지 되셨을 땐 고향을 위해
큰 일을 하실 거라고 기대했다. 또 한 분, 병원 김모 원장님. 그분은 범접할 수 없는 고상함의 표본이었다. … 돈을 번 김 원장님은 도시에 빌딩을 짓고 병원을
옮기셨다. 조금 멀어도 고향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서라도 그 병원을 찾아다녔다. “아, 미국 사람들이나 타는 멋진 자가용도 사셨던디 돈을 더 벌면 장학회도
만드신댜”라고 다녀오신 어른들은 자랑스레 말씀하셨다. 권력과 재물이란 사람을 타락시키는 것인가. … 이 변호사님은 이권에 개입해 우리의 자랑을 무색케
했고, 김 원장님은 첩실을 두어 재산 싸움에 휘말렸다는 소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두 분을 생각하다 보면 으레 떠오르는 다른 한분이 계시다. 월산식당 할머니. 가끔 엄마 손을 잡고 저녁 늦게 시장에 가면 주로 나뭇전 주변에서 뵐 수 있었던 머리 허연 할머니. 엄마가 그러셨다. 솔가리 한 짐을 지고 30리 길을 걸어온 시골 남정네, 또는 산나물 한 소쿠리를 이고
20리 길을 다시 걸어가야 할 아낙에겐 하느님 같은 분이라고. 날은 저물어
어둑어둑해지는데 팔리지는 않고 집에서 기다릴 어린것들 생각에 애가 탈 때
할머니가 나오셔서 다 팔아주신다고. … 또 음력 설 땐 보육원생들에게 장갑도 한 켤레씩 챙겨주시고, 큰 가마솥에 떡국을 가득 끓여 먹고 싶은 만큼 주신다고했다. 그분이 돌아가셨을 땐 온 시장 사람들이 다 상여 뒤를 따랐다고 한다.
심지어는 바보 호식이도 뒤따르며 ‘함무이, 함무이’하고 울었단다 ….
- 김정임, 시인, 2001년 12월 3일자 〈국민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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