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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반향없는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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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부터 장애가 있었다면 그래도 조금은 나을 듯하다. 어머니의 도움으로 열심히 공부하였다. 수학능력시험에서 전국 석차 1% 안에 들었다. 어머니는 서울대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연세대에 특차로 입학하였다. 쉽고 안전하게 대학에 들어가고 싶었다. 어머니가 입학하기 전에 턱 부정교합 수술을 해 주신다고 했다.
“엄마, 나중에 하지.”
“아니야, 대학 친구들 만나기 전에 해. 대학은 공부도 중요하지만 좋은 신랑도 만나야 해.”
수술을 받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수술을 받으면서 구강 내 과다출혈로 기도가 막혀 약 3분간 질식 상태에 빠지는 의료사고를 당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온몸을 끈으로 묶어놓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눈앞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희미했다. 어머니는 정성을 다해 보살폈다.
“엄마,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해. 이제 대학에 들어가 자유롭게 살고 싶었는데 ”
어머니는 나를 안으면서 말했다.
“염려마라, 의사 선생님이 그래도 노력하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회복된다고 하더라.”
눈물겨운 재활의지로 운동신경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시력은 영영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앞은 보지 못한 체 8개월 만에 퇴원했다. 머릿속엔 '어떻게 죽을까?'란 생각만 맴돌았다. 어머니가 없는 틈을 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옥상에 올라갔다. 막상 죽으려고 하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23년밖에 살지 못했는데 내 인생이 불쌍해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나왔다. 순간 '정말 지옥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 교회에 나갔을 때 지옥에 대한 설교를 들었다. 만약 자살을 한다면 절망스러운 세상을 떠나 홀가분하지만, 지옥에 가서 고통 받을 생각을 하니 더 없이 괴롭고 분했다. 자살을 포기하였다. 1급 시각장애인으로 등록하였다. 장애인 학교에 들어갔다. 중도 실명자를 위한 기초재활훈련을 받았다. 거기에서 전수를 만났다. 그도 대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 건축 공사장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어릴 적 꿈이 ‘하얀집’을 짓고 사는 것이었다 한다.
“야, 너는 어떻게 실명했냐?”
“목재를 나르다 뒷머리를 다쳐 머리 뒤쪽 시신경이 상해 시력이 사라진 거야.”
“그 때 넌 어떤 생각이 들던.”
“죽고 싶지, 신경 안정제를 수십 알 먹었어. 그런데 깨어 보니까 병원이고, 다시 넥타이로 목을 매었지. 재수 옴붙었지. 넥타이가 끊어졌어. 죽는 것도 쉽지 않더라고.”
“그래서 또 자살을 시도했어.”
“아니, 그렇게 죽으려고 해도 죽지 않는 것을 보니 누군가가 나를 살라고 하는 것 같았어. 그래서 이곳에 왔지.”

나와 전수는 열심히 공부했다. 3년 동안 같이 있다 보니 정이 들었다. 서로 격려해 주는 좋은 친구이며 경쟁자가 되었다. 전수는 인체의 600여 경혈을 다 외웠다. 침술도 배웠다. 졸업하여 안마원을 차렸다. 허리가 불편해 안마치료를 받으러 온 처녀를 치료하면서 사랑이 싹터 그녀와 결혼하여 아들딸을 두었다. 나는 보스턴 대학교 재활 상담학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공부했다. 가끔 전수와 전화 연락을 하였다.
“야, 너 어떻게 사냐?”
“살기 좋아. 아내가 너무 잘 해 주고, 안마원 손님도 많아 살만해.”
“야, 너 공부하기 힘들지 않아.”
“응 교수님들이 잘 해 주어 전과목 A 야. 너 신앙생활을 하니,”
“아니, 장애인 학교에서는 다녔지만 직업을 갖다 보니 어려워, 일요일 손님이 많고, 다닐만한 교회가 없어. 우리 같은 사람 다닐만한 교회가 어디 있어. 장애도 서러운데 교회 가면 더 서러워.”

나는 졸업을 하면 장애인을 돕기 위한 인생을 살고 싶었다. 유학을 와서 교수로부터 제자 훈련을 받았다. 같은 반 학생 중 믿음 좋은 한국 학생이 있었다. 그는 장애가 없었다. 평생 장애인을 위해 살기 위해 공부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이며, 장애인학교 교장이었다. 아버지는 비장애인이었지만, 어머니는 시각장애인이었다. 아버지 집에서 반대하였지만 아버지는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그의 어머니와 결혼하였다고 한다. 그는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다. 나의 눈이 되어 주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결혼은 쉽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반대했다. 그러나 시아버지는 결국 시어머니를 설득하여 우리는 양가의 축복 가운데 결혼을 하였다.

결혼하고도 계속 전수와 연락을 하였다.
“요즈음 어떠냐? ”
“야, 말마라. 너무 힘들어. 손님이 없어. 스포츠 마사지, 휴게텔과 같은 멀쩡한 사람이 안마를 하는 퇴폐성 업소들이 생겨 손님이 없어. 2만원 하던 안마비를 1만원으로 깎아 주어도 안와.”
“그래 어떻게 하냐? 데모라도 해야지.”
“데모해도 우리 힘이 있어야지. 헌법재판소에서 맹인에게만 안마사 자격증을 주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단다. 내가 다시 목매야 할 것 같아”
“야, 너 딴 맘 먹지 마, 그래도 살아야 해, 너 홀몸이 아니잖아. 그렇게도 너를 좋아하는 아내와 아이들은 어떻게 하라고.”
“야, 미안하다. 빚 갚을 길도 막막하고, 가족을 부양할 방법도 이젠 없어. 막다른 골목이야.”
“그래도 안돼, 살아만 있으면 다 길이 있어. 너 기도해 봤어. 기도해. 기도하라고, 우리 그 어려운 때도 다 극복했지 않아.”
“아니야 내 죽음이 친구들에게 희망이 된다면 내가 죽음을 택하겠어. 나의 죽음으로 친구들에게 희망이 생긴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겠어. 너도 도와줘”
그는 세 번째 자살 시도했다. 신문에 그의 말이 적혀있었다.
“제발 이 죽음이 헛되지 않게 도와달라” ♥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 목사/ 콩트집 하늘 바구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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