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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고리키의 어느 가을날: 민들레 홀씨 제1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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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호 / 2004 년 8월 13일 발행 (부정기 발행)

고리키의 "어느 가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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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심 고리끼에 대해 기억나는 것은 그의 소설『어머니』이다. 80년대에 사회과학 서적 열풍이 불 때 그 책도 교양 필독서로 꼽히곤 했다. 거기에 나오는 성직자들의 일그러진 모습은 신학도인 내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였고, 한없이 순박한 어머니가 세상에 눈을 떠가는 모습은 민중이 역사의 희망임을 보여주었다.

오늘 우연히 “어느 가을날”1)이라는, 고리끼의 또 다른 소설 을 읽게 되었다. 이번에는 아주 짧은 소설이다. 아마도 작가의 청년 시절의 체험이 배어 있는 듯한 아름답고도 슬픈 사랑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열일곱 청년이다. 대개 그 나이가 그렇듯이, 그는 이상은 원대하지만 주머니에는 끼니를 때울 동전 한 푼 없는 빈털터리다. 10월의 마지막 날, 그는 도시를 떠나 나루터가 있는 작은 시골 마을에 도착한다. 거리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조용하고 을씨년스런 분위기였다. 날은 저물어 차가운 바람이 불고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데,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그는 어디 먹을 것이 없는가 하고 강변의 텅 빈 가게며 창고들 사이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그와 같이 비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먹을 것을 찾고 있는 한 여인과 마주치게 된다. 그 여자는 두 손으로 노점 아래쪽의 모래를 파내 구멍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뭘 하는 거죠?”

내가 옆에 쪼그리고 앉으며 묻자 그녀는 나직이 비명을 지르며 튕기듯 일어섰다. 치켜 뜬 잿빛 두 눈이 두려움에 차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가 내 또래 소녀임을 알아보았다. 귀염성스러운 얼굴, 그러나 가엾게도 그녀의 얼굴에는 세 개의 커다란 상처가 나 있었다.

소녀가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 그녀의 두 눈에서 조금 전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없었다. 소녀는 손에 묻은 모래를 털고 나서 머릿수건을 매만지며 말했다.

“당신도 배가 고픈 모양이군요? 그럼 여길 파 봐요. 난 손의 힘이 다 빠져 버렸어요. 저 안에---.”

그녀는 고갯짓으로 노점을 가리켰다.

“틀림없이 빵이 있을 거에요. 이 노점은 아직 장사를 하고 있으니까.”

둘은 한참동안 같이 땅을 판 끝에 마침내 젖은 빵 한 덩어리를 찾는다. 그것으로 허기를 때운 그들은 추위와 비를 피하기 위해 버려진 쪽배가 있는 곳으로 간다.

그곳은 앉아서 쉴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배 안은 비좁고 눅눅했으며, 바닥에 난 구멍을 통해 찬 비와 바람이 끊임없이 새어들었다. 그들은 추위에 떨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가 졸음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을 때, 나타샤는 뱃전에 등을 기댄 채 쪼그리고 앉아서, 내뱉듯이 자기 얘기를 들려준다.

그녀는 술집에서 일하는데 파슈카라고 하는 빵 굽는 사람과 친해지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그녀에게 선물도 주고 잘해 주었지만, 이내 돈을 뜯어가기 시작했고, 다른 여자와 놀아나고, 술에 취하면 손찌검까지 했다. 그녀의 얼굴의 상처도 그래서 생긴 것이다. 그녀는 낙망과 체념 속에서 이제 죽을 생각까지 하는 것 같다. 그녀는 너무나 속이 상하여, 꼭 누구에게 향한 말은 아니지만, “어째서 당신네 남자들은 다들 그 모양이죠?” 이런 넋두리를 한참동안 늘어놓았다.

주인공은 몹시 고통스러워했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의 이야기 때문이라기보다 추위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참으려고 해도 신음 소리가 절로 새어나왔고 아래윗니가 서로 부딪쳐 소리를 냈다. 바로 그때였다.

바로 그 순간, 차갑고 자그마한 두 손이 내 몸에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한 손을 내 목덜미 아래 밀어넣고 다른 한 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는 근심에 싸인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는 것이었다.

“왜 그래요?”

나는 그렇게 묻고 있는 사람이 방금 남자들을 싸잡아 욕하던 그 여인이 아니라 다른 누구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짬을 두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네? 추워서 그래요? 몸이 얼고 있는 건가요? 오, 별난 사람 같으니! 추우면 춥다고 말을 해야지, 그렇게 잠자코 앉아만 있으니! 자, 이리로 누워 봐요. 몸을 쭉 펴고---나도 누울게요. 자, 이렇게---날 안아봐요. 더 꽉---금방 몸이 더워질 거에요. 그 뒤엔 따로 따로 누우면 되니까. 어쨌든 밤을 새워야 하지 않겠어요? 왜 그래요, 당신? 술을 마셨나요? 아니면 일터에서 쫓겨났나요? 괜찮아요, 그깟 일이 무어 대수라고!”

그녀는 나를 위로해 주었다---그녀는 나를 격려해 주었다---.

오, 나는 저주받을 인간이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당시 나는 참으로 심각하게 인류의 운명을 걱정하고 있었고, 사회 개혁과 정치적 변화를 꿈꾸고 있었으며, 온갖 현명한 사상들이 담긴 이런저런 책들을 탐독하고 있었다. 저자 자신조차도 그 사상의 궁극에는 도달할 수 없으리라 여겨지는 그런 종류의 책들 말이다.

그 무렵 나는 스스로를 어떤 ‘거대하고도 적극적인 힘’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사회에서 멸시받고 쫓겨난 비천한 존재, 웃음을 팔아서 연명하는 가엾은 여인이 자신의 몸으로 나를 데워 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를 도와 줄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는데, 그녀는 나를 도와주었다. 하긴, 돕고자 한들 무엇으로 그녀를 도울 수 있었으랴만!

아, 나는 이 모든 것이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라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차가운 빗방울은 끊임없이 살갗을 파고들었고, 여인의 탐스러운 가슴이 나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으며, 따뜻하고 생기 넘치는 숨결이 향기로운 술 냄새처럼 내 얼굴에 서려오고 있었던 까닭이다---.

바람은 울부짖으며 신음하고 있었다. 서로 꼭 껴안고 누워 있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추위에 떨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 고통스러운 현실보다 더 괴롭고 진저리나는 꿈을 꾸어 본 사람이 있을까!

나타샤는 오직 여자들만이 구사할 수 있는 정겹고 부드러운 말투로 줄곧 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의 순진하고 편안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내 가슴 속에서는 한 가닥 따스한 불꽃이 피어올랐고, 얼어붙었던 심장도 봄눈처럼 녹아내렸다.

갑자기 내 두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눈물과 함께 그 밤 나의 심장에 들끓고 있던 온갖 괴로움과 원망과 어리석음과 더러움이 깨끗이 씻겨나가는 것을 나는 느꼈다. 나타샤는 다시 나를 위로하려 했다.

“울지 말아요! 자, 그만---하느님이 당신을 축복해 주실 거에요. 곧 다시 일터에도 나갈 수 있을 거구요. 자---.”

그녀가 나에게 입맞추었다.

그것은 인생이 나에게 베푼 첫 키스였다. 또한 그것은 더없이 알뜰한 키스였다. 뒷날 내가 얻을 수 있었던 키스들은 하나같이 너무나도 값이 비쌌고, 그러면서도 나에게 거의 아무 것도 주지 않았으니.

“아이 참! 울지 말라니까. 당신은 정말 별난 사람이야. 정 갈 곳이 없다면 내가 무슨 수를 찾아볼 테니까 그만--- 그만 울어요---.”

그 조용하고 정성 어린 속삭임을 나는 꿈결인 듯 듣고 있었다. 다음 날 새벽까지 우리는 그렇게 껴안고 누워 있었다.

날이 밝자 우리는 쪽배에서 기어 나와 거리로 나갔다. 그리고 친구처럼 헤어졌다.

그후 반 년 동안이나, 그 가을날 나와 함께 하룻밤을 지낸 그녀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의 빈민가들을 샅샅이 누비고 다녔으나 나는 끝내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혹 그 사이 그녀가 죽었다면---그것은 그녀를 위해 오히려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었으리라! 고이 잠들기를!

또 혹시 그녀가 살아 있다면---영혼이여, 평화롭기를! 부디 그녀의 영혼에 자신이 타락한 여자라는 죄책감 따위는 깃들지 말기를! 왜냐하면 그것은 인생에 있어 아무런 가치도 없는 부질없고 헛된 괴로움에 지나지 않으므로.

“어느 가을날”은 이렇게 끝난다.

참 푸근하고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인류를 위한 사명, 사회와 정치 개혁, 뭐 이런 거창한 구호들과 저자 자신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어려운 책들 속에서 구원을 찾아 헤매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그를 녹여주지 못했고 오히려 더 춥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는 이 세상에 사람 하나 없고 그 혼자만 버려진 듯한 느낌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때 그를 안아주고 위로해주고 따뜻하게 품어준 사람은 놀랍게도 세상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고 버림 받고 상처를 받은 한 여인이었다. 그 여인의 품에서 그는 눈물을 쏟았고, 그 눈물과 함께 그를 괴롭히던 온갖 괴로움과 원망과 어리석음과 더러움이 깨끗이 씻겨나갔다. 구원은 무슨 거창한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상처 입은 한 영혼에게서 오는 것이다.

이제 내가 이러저러한 일을 해서 세상을 구하겠다고 하는, 이를테면 복음으로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하는, 오만은 버려야겠다. 구원은 그런 거창한 일을 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작고 소박해도 마음으로부터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데서 오는 거니까.

쪽배 속에서 서로의 온기로 언 몸을 녹이고 한없이 쓰다듬고 위로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그들이 오늘날 TV에서 비춰주는 그 어느 화려한 연인들보다도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만의 또 다른 나타샤로부터 “인생이 나에게 베푼 첫 키스”, “더없이 알뜰한 키스”를 받아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원을 거창한 것에서 찾는 동안, 그런 것은 어두운 기억 속에 오래 오래 가두어 두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것들을 새장에서 나오게 해주어야겠다. 내게도 그들같이 착하고 아름다운 기억이 있다는 것이, 내가 살아 있음을 한없이 감사하게 해 줄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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