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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민들레 홀씨 제137호: 나무 껴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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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호/2005.1.21  발행처: 민들레성서마을 발행 및 편집인: 김재성  


나무 껴안기  
유기쁨/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1.
감리교신학대학에서 <인간과 생태>라는 과목을 강의하던 9월 하순의 어느 날, 추석을 앞두고 들뜬 학생들에게 ‘황당한’ 과제를 내주었다. 말없이 나무를 5분 동안 껴안아보고 그 소감문을 A4 한 장에 써오라는. 학생들은 조금 어이없어 하면서도 순순히 과제를 받아 안고 흩어졌다. 추석 연휴가 지나고 학생들은 소감문을 차곡차곡 제출했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한 장 한 장 읽기 시작했다. 별난 과제라서 그런지 학생들의 소감문도 평소와는 달랐다. ‘나무 껴안기’의 임무 수행을 위한 2주 동안의 분투기를 소탈한 문체로 그려내고 있었다.
막상 나무를 껴안으려니 적잖이 당황스럽고 사람들이 볼까봐 창피하기도 하고, “어린아이도 아니고 말 그대로 다 큰 처녀가 나무를 껴안고 5분이나 있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볼지 걱정스러웠다는 학생도 있다. 그래서 꼭두새벽이나 한밤중에 일부러 산에 올라가기도 하고, 집 근처 공원에서 혹은 버스정류장 옆에서 나무를 기대는 척 하고 한 팔로 껴안기, 벤치에 앉아서 기대는 척 하면서 나무 껴안기 등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었다.
그래도 추석에 시골에 내려갈 수 있었던 학생들은 나은 편이었다. 도시에서 사는 학생들은 껴안을 나무를 찾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현대 도시는 그야말로 자연을 두드러지게 인위적으로 배제하는 구역이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학생들이 껴안은 나무로는 가로수가 가장 많았다. 그 외에도 학교에 심어진 나무, 옥상에 심어진 나무, 심지어 집 안 화분에 심겨진 나무까지 껴안을 나무로 선택되었다. 도시의 나무를 껴안은 학생들과 시골에서 혹은 산에서 나무를 껴안은 학생들의 소감문은 그 내용이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가로수를 껴안은 학생들은 무엇보다 나무를 뒤덮은 먼지를 먼저 경험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무 껴안기를 통해서 일차적으로 의도한 것은 생명의 발견이다. 우리 주위의 나무를 비롯한 비-인간 생명체들을 우리는 흔히 무심하게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나무를 껴안는 경험을 통해 적극적으로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2.
현대 산업 문명의 논리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대다수의 우리에게 나무는 단지 이용 가능한 재화, 곧 목재일 뿐이다. 현대 산업 문명은 비(非)인간 자연, 곧 나무를 비롯한 여러 생명체들을 이용할 수 있는 물건으로 취급하게 만든다. 개발 및 상업적 이윤을 목적으로 나무를 베고 숲을 파괴하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여겨진다.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벌목과 산림파괴가 가속화되는 이즈음에, 나무를 껴안는다는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숲 살리기에 나서서 성공을 거둔 ‘칩코’(껴안는다는 뜻을 가진 말) 운동을 생각해본다. 히말라야 산악지대의 여성들은 상업적 착취에 대항해서 자신들의 목숨까지 희생해가면서 숲을 보호하기 시작했는데, 그 방법은 벌목꾼들의 도끼 혹은 불도저에 맞서서 살아 있는 나무들을 품에 안는 것이었다. 삼림 공무원들은 숲을 지키려는 여성들에게 “이 어리석은 여자들아, 벌목을 방해하는 당신네들이 숲의 가치를 도대체 알기나 해? 당신들은 숲이 무엇을 품고 있는지 아냐구? 숲은 이윤과 송진과 목재를 생산하는 곳이야” 하고 말했다. 그러자 여자들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고 한다.

숲이 무엇을 품고 있는가?
땅, 물, 그리고 맑은 공기.
땅, 물, 그리고 맑은 공기는
지구와 지구가 품는 모든 것을 보존하지.

소수 여성들의 나무 살리기 운동으로 시작한 칩코 운동은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숲을 살리기 위한 비폭력 저항운동의 모델로서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3.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나무를 베고 산을 깎는 일은 우리나라에서도 비일비재하다. 우리는 대체로 무심히 그런 일들을 지나치지만, 목숨을 내어놓고 현대 문명의 논리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속철도 천성산 관통을 막아서 천성산에 살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들의 살 권리를 지키기 위해, 산의 파괴를 막기 위해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몇 차례나 단식하였던 내원사 지율스님이 그 한사람이다. 생명 살리기를 위한 지율스님의 노력은 눈물겹다. 마침내 지율스님은 단식 58일째 되던 날, 환경단체와 공동으로 전문가 조사를 실시하겠다는 환경부의 약속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엊그제 환경부에서는 또 그 약속을 어기고 개발업자 쪽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참 답답한 노릇이다.
인간 이외의 수많은 생명들의 생존권까지는 생각이 못 미치더라도, 나무가 잘리고 숲이 파괴되면 정작 위협받는 것은 인류의 생존 자체이다. 숲은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각종 온실가스를 정화해주는 참으로 고마운 존재로서 인류와 공존해왔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속도로 산림 파괴가 이루어지고 인간사회가 생성하는 온실가스의 양이 줄어들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온실가스를 정화해주던 숲은 한계에 도달하게 되고, 오히려 숲이 온실가스를 내뿜게 된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지구온난화가 가속화된다면, 각종 기상이변과 그에 따른 후속효과들로 인해 인류의 생존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숲을 살리기 위해서는 생명체들을 이용할 수 있는 재화로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로 느낄 수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하다. 그들이 모여서 작은 파도를 만들 때, 모든 것을 경제적 가치로 환원해서 판단하는 현대 산업문명의 논리를 거슬러서 생명의 물결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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