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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농촌 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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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갑진 교수(서울신학대) 

일제 강점기 때 신학교를 졸업한 어떤 목회자가 처음 택한 목회지는 가난과 무지, 그리고 우상숭배에 젖은 시골이었다.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농촌 사람들의 오해와 냉소보다도 더 큰 어려움은 배고픔이었다.

사모는 전도에 지친 남편을 위해 정성껏 음식을 차려냈는데 늘 밥이 모자라 자신은 밥그릇 안에 작은 그릇을 엎어놓고 그 위에 밥을 펐다. 나중에 그것을 알아차린 목사님은 먼저 사모의 밥그릇을 젓가락으로 찔러보곤 했다고 한다.

목사님은 진실하고 강직한데다 영어와 일본어에 유창했다. 한번은 서울의 유력한 교회에 청빙을 받았는데 그 밤에 산에 올라 밤새 기도한 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가난에 시달리던 자녀들은 그런 아버지가 너무나 야속했다. 자녀들은 아버지를 목사로서는 존경하지만 아버지로서는 존경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일본에 가서 일제 관리들에게 식민지 통치를 꾸짖고 6·25전쟁 때는 공산당 지도원 앞에서 자신이 목사라는 것을 당당히 밝혔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그분을 지켜주셨다.

광복 후엔 분단 조국의 통일과 복음화를 위해, 그리고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틈만 나면 예수님처럼 산에서 기도하며 밤을 지새웠다. 목사님이 산에서 기도하면 사모도 예배당 마룻바닥에서 기도하면서 밤을 지새웠는데 흘린 눈물로 마룻바닥이 파였다.

은퇴하면서 받은 700만원을 모두 예배당 진입로에 아스팔트를 덧씌우라며 내놓았다. 그리고 사랑했던 양 무리를 후임자에게 맡기고 묵묵히 교회를 떠나셨다. 갈 곳이 없어 자식들의 공장 옆에 방 한칸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셨다. 그후 신기하게도 자식들의 사업이 불같이 일어났다고 한다.

성공적인 목회자의 삶은 무엇일까. 많은 신학도가 대형교회의 꿈만을 품고 농촌 목회를 초라하게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는 도시와 시골, 신자의 숫자, 건물의 화려함에 좌우되지 않으신다.

목회자가 서있는 장소와 맡기신 일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확신하는 목회자가 복된 목회자다. 그래서 감사와 충성심을 가지고 전적으로 주께 의뢰하며 감당한다면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주님의 칭찬을 듣게 될 것이다. 어느 곳에 있든지 이런 목회자는 참으로 위대하다. 그 농촌 목회자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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