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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지리산 편지] 장준하 선배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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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배를 기리며 ①
  
  요즘 들어 겨레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자주 생각나는 선배님이 있다. 장준하(張俊河 1915∼1975)선배이다. 필자는 그 어른과 1974,75년에 긴급조치위반으로 수감생활을 함께 하면서 그 인격과 지조, 박식함과 경륜에 감탄하며 함께 지낸 적이 있다. 그 시절 옥중생활이 무료하고 갑갑할 때면 장준하 선배의 목민치국(牧民治國)에 대한 경륜을 듣는 것이 우리들 후배 정치범들에게는 큰 낙이요, 특전이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유식한 분들도 많이 만났고 명강의도 숱하게 들었지만 장준하 선배님만큼 큰 경륜과 넓은 식견, 그리고 흥미를 곁들인 이야기꾼을 만난 적이 없었다. 지금 우리나라의 정체성(正體性,Identity)이 혼란스러워지게 되면서 장준하선배가 더욱 그리워지게 되는 것은 선배님이 이점에서는 워낙에 확고하고 일관된 신념을 지닌 분이었기 때문이다.

장준하 선배는 가슴이 뜨거운 민족주의자였고 확고한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였으며 동시에 신앙고백이 분명한 크리스천이었다. 요즘 들어 민족주의가 곁길로 가게 되고, 자유민주주의가 주변으로 밀려나게 되며, 크리스천들이 제 몫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장선배가 더욱 그리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장준하 선배 같은 탁월한 애국자를 비명에 가시게 한 못된 무리들은 그들이 누구이든 간에 민족과 역사 앞에 씻을 수 없는 죄인으로 남게 되었다.

그래서 장준하선배를 기리는 마음과 겨레의 앞날을 염려하는 마음을 합하여 내가알고 있는 장준하 선배에 대한 글을 몇 회에 걸쳐 쓰려고 한다.  

민족주의자 장준하의 삶과 사상 ①
  
  장준하(張俊河 1915∼1975) 선생은 삼일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918년 평북 의주에서 출생하였다. 평북 의주 땅은 압록강의 바람결이 세차고 산세가 험하여 예로부터 힘센 장사들과 명석한 준재(俊才)가 많이 배출된 곳이다. 그곳은 고구려, 발해의 전설이 곳곳에 쓰며 있고 독립군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던 지역이다.

선생이 어린 적에는 집안이 가난하여 초등학교에도  미처 다니지를 못한 체 낮에는 밭에 나가 어른들의 농삿일을 돕고 밤에는 마을 노인들에게서 만주 넓은 벌판을 주름 잡던 고구려, 발해용사들의 무궁무진한 무용담과 독립군들의 용맹스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그러다가 13살 되던 때에야 초등학교 5학년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3·1운동과 독립운동에 지역의 지도자로  교인들과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제작 배포하는 책임자로  활약하였기에 일본 경찰에 쫒기는 몸이 되어 그의 가정 전체가 평북 삭주의 청게동이란 심산유곡으로 귀양살이 하듯 이사하게 된 것이다.

늦게서야  들어간 학교였으나 졸업할 때는 수석으로 졸업을 하고는 1932년에 숭실중학교로 진학하였다. 그의 가정은 철저한 기독교 가정으로 그의 할아버지는 교회의 장로였고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그래서 중학교도 기독교 계통인 숭실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숭실학교를 다니던 중에 아버지를 따라 선천의 신성중학교로 전학하였다. 아버지가 그 학교의 교목으로 전근하였기 때문이다.

장준하는 그의 아버지와는 불과 17세 차이여서 살뜰한 정을 느끼지 못하였으나  한학자이시고 투철한 반일 사상가였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해방후 일가가 월남하여 그의 아버지 장석인 목사는 서울 연희동교회의 당회장으로 시무하였다.

장준하가 일본제국주의와 첫 번째 부딪쳤던 것은 그가 16세에 숭실중학교에 입학한 해였다

민족주의자 장준하의 삶과 사상 ③
  
  방학을 맞아 두메산골의 고향 청계로 간 그를 맨 처음 맞이한 사람들이 엉뚱하게도 두 명의 일본 순사였다. 그들은 ‘브나로드 운동’의 개강 일자, 장소, 내용, 그리고 마을을 떠나는 날짜 등을 꼬치꼬치 묻는 것이었다. 이때 얼마나 불쾌하였던지 장준하(張俊河 1918∼1975)는 훗날 그의 회상기에서 다음 같이 쓰고 있다.

“일제에 대한 나의 반감의 싹이 노골적으로 트게 된 것은 실로 이때부터였으며, 이때 나는 갑자기 어른이라도 된 것같이 그들에게 대한 적개심과 반항심이 굳어져버렸다.”

그들이 장준하를 놓아 준 것은 이런 장면을 보다 못한 할아버지께서 그들을 나무라기를
“이것들 봐요. 그 얘가 무슨 죄라도 지었소? 방학 동안 마을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겠다는 게 무슨 죄가 되는지는 모르겠소만 이 찜통더위에 평양에서 사흘 동안이나 자건거를 타고 와서 더위와 허기로 녹초가 된 아이를 붙잡고 너무들 하지 않소?”

할아버지의 이런 일갈에 두 순사는 머쓱해져서 더 이상 캐묻기를 멈추고 돌아갔다. 한글공부는 그가 도착한 다음 날부터 시작되었다. 마을사람들이 배우는 일에 열심을 내는 모습을 보고 선생인 그가 감동을 받았다. 온종일 산비탈 개간지에서 밭일에 시달린 그들이건만 밤공부 시간에는 입추의 여지없이 모여들어 글자를 익히는 데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공부 시간마다 일본 순사가 번갈아 나타나 수업 내용을 적으며 감시하는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마을 사람들에게 민족 정신을 일깨워 주었기에 우리글 공부에 더욱 열심을 쏟는 것이었다.
그런 중에 한 달이 꿈결처럼 지나가고  강습회가 마치는 날이 되자 학생들이 떡을 빚고 과일을 지게로 져다가 쌓고는 잔치를 벌였다.    
    
민족주의자 장준하의 삶과 사상 ④
  
  숭실중학교를 다니던 장준하는 2학년 때에 선천(宣川)에 있는 신성중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숭실중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가 신성중학의 교목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신성중학교는 교육 목표가 둘이었는데 첫째가 신앙교육이었고 둘째가 민족교육이었다. 그래서 투철한 기독교 신앙을 지닌 애국자를 기른다는 목표로 운영되던 학교였다. 말하자면 ‘예수사랑’과 ‘겨레사랑’을 한 인격으로 실천하는 크리스천 민족 지도자들을 양성한다는 목표로 세워지고 운영되던 학교였다. 이 학교에 아버지가 교목으로 부임하게 됨에 따라 장준하도 아버지를 따라 전학 온 것이다.

평양의 숭실중학교와 선천의 신성중학교는 기독교계 학교들 중 배일(排日)독립사상이 가장 강력했던 학교들이었다. 숭실중학은 1897년에, 신성중학은 1906년에 개학하였다. 두 학교가 다 미국 북장로교회가 세운 학교이다. 선천은 기독교의 고장이면서 애국자들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었다. “선천에 사는 목사나 장로치고 애국자 아닌 사람이 없다”는 말이 전해지던 때였다.

당시에 안창호는 평양에서, 이승훈은 정주에서, 양전백은 선천에서, 세 사람의 민족 지도자가 마치 서로가 솥발같이 민족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하였다. 선천을 근거지로하여 항일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세칭 ‘105인 사건, 선천3.1만세 사건, 선천경찰서 폭탄투척사건’등이 연이어 일어난 곳이다.

선천에서는 일요일이면 교회를 가느라 읍내 전체가 철시되고 하늘에서는 교회의 종소리만 들렸다. 선천 인구 3천여명 중에 2,600여명이 교인이어서 선천서는 일본인들이 교인들의 세(勢)에 눌려 꼼짝을 못하던 곳이었다.  

민족주의자 장준하의 삶과 사상 ⑤
  
  장준하가 신성중학교 2학년에 편입하던 때의 교장은 장이욱(1895∼1983) 박사였다. 후에 서울대학 총장을 지낸이이다. 그는 1912년에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는 미국에 유학하여 교육학을 공부하였다. 미국유학 시절에 안창호 선생이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하여 도산 선생의 지기가 되었는데 1928년에 귀국하여 신성중학 교장이 되었다, 장이욱 교장이 장준하의 어버지 장석인 목사를 교목으로 모신 것이다. 신성중학 시절의 장준하에 대하여 일년 후배였던 계훈제(桂勳悌)는 다음 같이 회고하였다.

“준하 형은 그때도 피부가 하얗고 잘생긴 미소년이었다. 여자처럼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때로는 폭포를 거슬러오르는 잉어처럼 용맹스럽고 활달하였다. 그는 자주 창공을 올려다보는 버릇이 있었다”

당시 신성중학 학생들은 ⅓이 전도사고, ⅓이 애국투사고, ⅓은 문학가들이었다는 말이 있었던 때이다. 장준하는 문학에 소질이 있어 중국 문학의 선구자 노신(魯迅)에 심취하면서도 전도자로서도 두각을 나타내었고 동시에 애국투사이기도 하였다.

1937년 장준하가 5학년 졸업반이 되던 해였다. 장이욱 교장이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일본경찰에 잡혀 갔다. 다음날 전교생들이 장준하의 주도에 따라 동맹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방법이 특이하였던 것이 전교생이 일본어 교과서를 모두 찢어 버린 후에 운동장에서 열을 짓고는 장준하를 선두로 교문 밖으로 나서며 “장이욱 교장 선생님을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긴급 출동한 일본경찰에 차이고 맞으며 전진하였다. 일본경찰에 밀린 데모대는 산 위로 올라가 거기서 애국가와 아리랑을 부르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결국은 일경이 들이닥쳐 총검으로 위협하며 주모자가 누구냐고 위협하였다.

장준하가 선뜻 나서며 “그만들 하시요. 아무도 손대지 마시요. 내가 주모자요”하고 나서니 각 반대표들이 서로가 자신이 주모자라고 나서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 뒤로 계속된 장준하 선생의 투옥 구금의 처음이 되었다.    
    
민족주의자 장준하의 삶과 사상 ⑥
  
  1938년 3월 장준하(張俊河 1918∼1975)는 신성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숭실전문학교를 들어가하였으나 때맞추어 숭실학교가 폐교되고 말았다. 일본 경찰이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학을 포기하고 있을 때에 한 사립 소학교에 교사직으로 가게 되었다. 정주군(定州郡)에 있는 신안소학교였다. 이 학교는 3·1만세운동 때에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신 이명룡(李明龍 1873∼1956)이 설립한 학교로써 학생은 5백 여명이 되었으나 학교의 설비나 사기는 바닥에 덜어져 있는 학교였다.

장준하의 아버지는 진학을 못하게 된 아들에게 그나마 그런 일자리가 생긴 것을 기쁘게 여기며 집을 떠나는 전날 아들을 앉히고는 세 가지 지켜야할 것을 당부하였다.
1)교회에 잘 나갈 것 2)여자를 조심할 것 3)낭비하지 말 것

부임하여 5학년 담임이 된 그는 먼저 여학생들의 긴 머리채를 가위로 무조건 잘라 버리고 치마저고리 대신에 신식 브라우스에 통치마를 입히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정주지역은 보수성이 대단히 강한 지역이었다. 정주지역은 배일(排日)사상이 강하기로는 평양이나 선천과 다를 바 없었지만 평양과 선천에 비해 보수성이 강하였다.

정주의 오산학교는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가 아니라 도산 안창호의 영향을 받은 이승훈이 세운 학교이다. 역대 교장들 중에도 선교사가 없었다. 그래서 개화가 늦었다. 이런 보수성이 강한 지역에서 새로 부임한 어린 교사의 이런 튀는 행동에 반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장준하는 막무가내였다. 모두가 반대를 해도 할 것은 하여야 한다고 흔들림이 없었다.    
    
민족주의자 장준하의 삶과 사상 ⑦
  
  장준하(張俊河 1918∼1975)의 일에 대한 집념과 추진력은 이미 그때부터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신안소학교의 교사 신축이 그 한 예가 된다. 신안소학교는 학교 건물이 마치 창고처럼 허름한데다 초라하기 이루 말할 수없는 터였다. 그런데 학교 곁에 이사장 소유의 2천평 과수원이 있었다. 그간에 자금이 없어 학교 건물을 짓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장준하는 “자금이 문젠가 성의와 의욕이 없는 거지” 하고는 어느 날 동료 교사들에게 “내일부터 내가 학교 교사를 지어야겠네”하는 것이었다.

동료 교사가 “아니, 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 지난 번에 물리지도 않았나?”하였더니 장준하가 말했다. “물릴 게 뭐야? 지난 번에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여자얘들 머리가 지금처럼 되었겠나? 얘들 옷 입은 것도 한결 산뜻해지지 않았나?”하고 의욕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다음 날부터 오후부터 장준하의 일이 시작되었다.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6학년 학생 80명 전원이 손에 낮과 톱을 들고는 사과밭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이어서 사과나무 밑둥을 톱으로 자르기 시작하더니 금새 나무들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한두달 있으면 따낼 수 있는 사과나무들이 잠깐 사이에 모두 넘어졌다. 다음에는 등걸을 캐내는 작업이 이어지고 정지작업에 들어가게 되니 주위에서 모금 활동이 벌어졌다.

7월이 지나 여름 방학 철이 되어도 학생들이 나서서 건축 일을 도왔다. 학교 부근의 산에서 아름드리 낙엽송 나무들을 베어다 나무껍질을 벗기고 햇빛에 말려 목재로 사용하였다. 일단 공사가 이렇게 진척이 되니 그간에 보고만 있던 지역의 교회, 주민, 학부형 모두가 나서서 돕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장준하가 과수원에 들어가 나무를 베기 시작한지 1년만에 근사한 학교가 세워졌다.

이때부터 장준하에게 ‘도사 선생’이란 별명이 붙게 되었다. 일을 추진하는 데에 도사란 뜻이었다.  

민족주의자 장준하의 삶과 사상 ⑧
  
  1941년은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해다. 그해에 24세가 된 장준하는 3년간 봉직하던 신안소학교를 사임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 동경에 있는 동양대학 철학과에 입학한 것이다. 이듬해에 장준하는 동양대학에서 일본신학교로 옮기게 되었다. 그가 일본신학교로 가게 된 데에는 그의 아버지의 권유가 큰 영향을 미쳤다.
“신학은 자기와 타인 사이에서 자기를 희생시키는 것을 진리로 하는 학문이다. 고행에 장소의 구별이 없듯이 신학 훈련의 장소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일본신학교에 꼭 들어가거라”
그가 일본으로 건너가던 때에 그의 아버지가 당부하던 말이었다.

때는 일본이 전쟁 초반의 연이은 승리에 도취되어 기고만장하던 때였다. 그때 동경에서는 박영출 목사가 일본신학교의 학생으로 있으면서 조선인 유학생을 위한 숭덕학사(崇德學舍)를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숭덕학사는 동경에서 배일(排日)민족운동의 요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장준하의 친구 김준엽이 쓴 장정(長征)에서 숭덕학사를 방문하였던 이야기를 다음같이 쓰고 있다.

“최기일 형과 함께 숭덕학사로 박영출 목사를 찾아간 일이 있다. 박 목사는 유학생의 숙소로 숭덕학사를 경영하면서 학생들에게 기독교를 설명하고 예배를 보면서 은근히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있었다.”

장준하는 숭덕학사의 일꾼이 되어 정열적으로 일하였다. 일요일이 되면 학사 주위의 어린이들을 모아 와서는 하루 종일 찬송가와 동요를 가르치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을 하든 열심에 열심을 다해서 하는 것이 그의 체질이었다. 그러나 1943년이 들면서 숭덕학사는 문을 닫게 되었다. 조선인 유학생들을 일본군으로 끌어가는 일 때문이었다. 많은 조선인학생들이 일본군으로 끌려가거나, 만주, 중국으로 도망가거나, 감옥으로 갔다.    

민족주의자 장준하의 삶과 사상 ⑨

학도병제의 정식 이름은 ‘반도인 학도 특별 지원병제’였다. 당시 게이오대학생으로 학도병이 되었다가 뒤에 장준하와 더불어 광복군 동지가 된 김준엽은 그가 쓴 '장정'이란 책에서 학도병제에 대하여 다음 같이 쓰고 있다.

“일제가 소위 반도인 학도 특별 지원병제를 강행하여 약 4,500명에 달하는 조선인 전문·대학생을 전쟁터로 끌고 가기로 한 것은 1943년 10월의 일이다. 1943년 4월에 일본인 대학생들을 징집하기로 결정할 때 일본 정부는 처음에 한국인 전문.대학생들을 제외하였던 것인데 이는 물론 한국 학생이 소중하거나 귀여워서가 아니었다. 불령선인(不逞鮮人)학생을 황군(皇軍)에 끼우게 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 상황이 점차 불리하여지게 되자 일본은 불령선인을 가릴 여유가 없게 되었다.
1943년 10월에 학도지원병제를 실시하다가 1944년에는 아예 징병제로 바꾸었다. 이 무렵 동경에 이광수, 최남선 등이 나타나 학병 권유 강연을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들의 강연이 끝나 집으로 오는 길에 장준하가 “나는 학병에 가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고향의 부모와 가족을 생각하여 내린 생각이었다. 이때 본국에서의 장준하의 가정은 아버지 장석인 목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신성중학교에서 쫒겨난후 초야를 전전하며 숱한 고생을 하고 있었다. 이런 판에 아들이 학병거부까지 하게 되면 그의 가정에 닥칠 어려움이 혹독할 것이었다. 그는 '돌벼개'에서 그때의 사정을 다음 같이 썼다.

“일인들이 가장 주목하고 또 가장 미워하던 목사 가운데한 분이 나의 아버지님이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는 죄목으로 신성중학교 교직에서 축출 당한 뒤에도 계속 요시찰 인물로 형사들이 뒤를 따르는 형편이었다. 나는 장남이다. 나는 우리 집안의 불행을 내 한 몸으로 대신하고자 이른바 그 지원에 나를 내던져버렸다.”

민족주의자 장준하의 삶과 사상 ⑩

장준하는 일본군에 입대하기 전에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는 신안소학교에서 가르친 제자인 김희숙으로 나이는 17세였다.

1944년 1월 5일에 결혼하고 20일에 입대하였다. 그가 입대한 부대는 평양에 있는 조선군사령부 42연대였다. 입대 후 소식을 들으니 훈련을 마친 후 부대가 “중국 서주로 배치 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다른 학도병들은 중국으로 가는 것을 마치 죽을 자리로 가는 듯이 염려하였지만 장준하에게는 더없이 기쁜 소식이었다. 그가 입대할 때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것이 중국으로 파견되어 탈출하여 독립군 부대를 찾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면회 온 아내에게 일러주었다. 중국에서 보내는 편지에 성경 구절이 쓰여 있으면 부대를 탈출한다는 신호이니 그리 알라고 일러주었다.

장준하가 속한 부대가 중국 서주에 닿은 것은 1944년 2월 16일이었다. 그가 중국으로 배치되기를 바랐던 것은 오로지 탈출하려는 것이었는데 탈출이 쉬운 것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탈출의 기회를 노리며 정보를 수집하던 그는 7월 7일에 마침내 탈출에 도전하였다. 일본군들이 모처럼의 축제일을 맞아 천황이 하사하였다는 술이 나오고 잔치 분위기로 떠들썩한 분위기를 틈 타 4 명의 동지들과 함께 탈출하였다. 탈출하기 전 날에 고국의 아내에게 신약성경 로마서 9장 3절을 적어 보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다”

복음의 사도 바울이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을 위한 일이라면 자신은 저주를 받을지라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그의 뜨거운 겨레사랑의 마음이 담겨진 글귀이다. 부대의 철조망을 넘은 그들은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날이 새기 전에 부대에서 멀리 도망쳐야 했다. 그들이 방향을 잃고 광활한 수수밭을 헤매던  중에 수색대를 만나 숨을 죽인 체 밭고랑에 엎드려 있어야 했다. 대륙의 햇볕은 뜨거웠고 그들은 목이 말라 죽을 것만 같은 처지를 참으며 달리고 달렸다.

민족주의자 장준하의 삶과 사상 ⑪

일본군 부대를 탈출한지 3일 만에 드디어 중국 국부군(國府軍:국민당군)을 만나 구조 되었다. 그 부대에서 장준하(張俊河 1918∼1975) 일행을 마중 나온 사람이 반갑게도 같은 학도병 탈주병인 김준엽(金俊燁 1920∼)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푸짐한 식사에다 그칠 줄 모르는 고국 이야기로 밤늦게까지 즐거움을 나눌 수 있었다. 얼마 후 그들 일행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있는 중경(重慶)을 향하여 다시 출발하였다.

중경까지는 무려 6천리의 머나먼 길이였다. 가도 가도 콩밭, 옥수수밭 뿐인 길을 걷고, 또 걸어 40여일 만에 중경까지 가는 길의 중간쯤에 있는 임천(臨泉)에 이르렀다. 그곳에 중국군의 사관학교가 있고 그 학교에 대한민국 광복군 간부훈련반이 설립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장준하는 독립군 장교가 되는 군사훈련을 받게 되었다.

후일에 그가 한 대 독립군을 토벌하던 일본 육사출신 박정희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가 강탈로써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것이 민족적 수치라고 서슴지 않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정식 광복군 사관학교출신의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훈련을 받는 틈틈이 그는 시간을 쪼개어 『등불』이란 제호의 잡지를 내었다. 이 잡지가 훗날에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사상계』의 시초에 해당한다. 조동걸 교수는 ‘장준하와 독립운동’이란 글에서 그 시절을 다음 같이 소개하고 있다.

“돌베개는 이때의 일을 두고 ‘이것이 나의 잡지와의 첫 인연이 되었다’고 쓰고 있는데 후일의 『사상계』를 생각하면 그것도 그것이지만 이때의 교육과 『등불』편집을 통하여 장준하의 민족의식과 논리가 체계화 되었다.고 이해된다.”

장준하의 삶과 사상 ⑫

중국군의 군관학교는 4개월 과정이었다. 장준하와 그의 동료들은 4개월 만에 장개석의 명의로 된 졸업장을 받고 육군 소위가 되었다. 그들은 독립군 소위이자 중국군의 소위가 된 것이다. 그렇게 소위 계급장을 달게 된 10명의 동지들이 임천을 떠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수천리 길을 떠나는 그들에게 지급된 것은 약간의 밀가루와 소금국을 끓일 수 있을 정도의 부식비였다. 이미 철이 바뀌어 엄동설한이었다. 사방이 얼어붙는 추위에 내복도 입지 못한 채로 그들은 파촉령 높은 구비를 넘어야 했다. 그때의 어려웠던 사정을 박경수가 쓴 『장준하 전기』중에서 다음 같이 표현한 대목이 있다.

“어둠이 깔리기 전에 일행은 다소라도 움푹한 곳을 찾아 나뭇가지를 꺾어다 둥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장준하는 자신도 모르게 흘린 눈물이 얼어서 눈시울이 시렸다. 매서운 칼날 같은 밤바람만 막으면 동사는 면할 수 있겠는데 그 바람이란게 몇 개비의 나뭇 가지로 막아질 일이 아니었다. 일행은 졸음을 물리치느라 안간힘을 다했다. 잠들게 되면 동사를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장준하와 그의 동료들이 중경 임시정부에 닿은 것은 1945년 1월 31일이었다. 일본군부대를 탈출한 지 5개월 24일 만이었다. 그들이 임시정부 청사에 닿아 옥상에서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는 순간 온 몸이 마비되는 듯하였다. 마침내 청사의문이 열리고 대한민국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李靑天, 1888~1957) 장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군은 일행을 찬찬히 살피며 사열하였다. 그리고는 다음 같이 말했다.

“수고들 많이 했소이다. 앞으로 나와 이곳에 같이 있을 것이므로 차차 많은 애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요. 오늘은 피로한 여러분에게 긴 애기를 하지 않겠소이다. 곧 우리 정부의 주석(主席)이신 김구선생께서 나오실 것입니다. 이만 끝.”

장준하의 삶과 사상 ⑬

중경(重慶)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하였던 다음 날 일본군 탈주병 일동에 대한 임시정부 측의 환영회가 열렸다. 신익희(申翼熙 1894∼1956) 내무부장에 이어 김구(金九 1876∼1949) 주석의 환영사가 있었다. 평생을 민족 독립에 삶을 바치고 이미 70이 넘는 나이임에도 건장한 몸으로 주석직을 감당하고 있는 김구 주석의 환영사가 이어지는 동안 모두들 숨을 죽인 채로 듣고 있었다.  

“오랫동안 해외에 나와 있었기에 국내소식이 아주 감감하였습니다. 그동안 일제의 폭정 밑에서 온 국민이 모두 일본인이 된 줄로 알고 염려하였더니 여러분들이 왜놈들에게 항거하여 이렇게 용감하게 탈출하여 이곳까지 찾아와 주었으니 더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낍니다. 지금까지의 착잡하고도 깊었던 고민이 한꺼번에 사라집니다. 조국의 혼이 살아 있는 하나의 증거가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한국사람은 한국사람 이외에 아무 것으로도 변하지 않는다는 산 증거로써 여러분은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멀고 먼 타향에서 아버지 같이 느껴지는 김구 주석의 환영사는 학도병 탈주병들의 심금을 울렸다. 김구 선생에 이어 학도병 중에서 답사를 장준하가 맡았다.  

“저희들은 왜놈들의 통치 밑에서 태어났고, 자랐고, 교육을 받았기에 조국의 국기조차 본 일이 없는 청년들입니다. 저희는 우리나라의 국기가 보고 싶었습니다. 전국에 나부끼는 국기가 일장기(日章旗)가 아니라 태극기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던 소원이 이번에 중경에서 더욱이나 우리 임시정부의 청사에서 보게 되어 그 감회를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장준하가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여 말을 이어 가던 도중에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는 말을 멈추었
.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나 노(老)혁명가 김구 주석께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그런 모습을 보자 말하던 장준하마저 울먹이는 소리로 변하여 흐느끼며 감사의 말을 하는 중에 급기야는 온 좌중이 울음바다로 바뀌어 통곡의 자리가 되고 말았다.

장준하의 삶과 사상 ⑭

당시의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에는 파벌 다툼이 심하였다. 이에 대하여 장준하는 그의 저서 『돌베개』에서 다음 같이 표현하였다.

“셋집을 얻어 정부 청사로 쓰고 있는 형편에 그 정파의 수는 의자 수효보다 많았다”

당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들의 정당별 구성은 다음 같았다.
한국독립당 : 주석-김구, 외무 국무위원-조소앙, 재무-조완구, 선전-엄항섭, 국무위원-박남파, 차이석, 황학수, 조성환, 조경환.
조선민족혁명당 : 부주석-김규식, 군무-김원봉, 김상덕, 성주식, 최석순.
한국무정부주의자연맹 : 유림
한국청년당 : 내무-신익희.
한국민족해방동맹 : 김성숙.
천도교 : 최동오.
무소속 : 유동열, 김붕준(金朋濬).

이렇게 난립하게 된 파벌들이 장준하 일행을 서로 자기들 파벌에 포섭하려는 모습을 대하고 그들은 실망 끝에 배신감 같은 마음이 들어 허탈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회의를 열어 합의하기를 학도병 탈영병 일동은 파벌 단체의 환영회나 초청에는 응하지 않기로 하였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 민족을 낮추어 빈정거리기를 “조센징(朝鮮人)은 둘만 모여도 모임은 셋이 된다.” 고 하였다. 식민지 지배를 받은 민족의 국민적 특성 중의 하나가 분열과 다툼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런 풍토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선진국이 되거나 일류 국가가 되기가 어려울 것이라 생각된다

장준하의 삶과 사상 ⑮

그 해 4 월 어느 날 청산리(靑山里) 전투의 영웅 이범석(李範奭 1900∼1972) 장군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이 장군이 그들을 감격케 하는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은 강요나 명령이 아니고 귀관들 각자의 자유 의지에 맡기는 것을 전제로 한다, 왜적을 고국산천에서 몰아내는 길은 무력밖에 없다. 이제 연합군이 총공격을 시작하였고 우리 광복군 제2지대에서는 곤명(昆明)에 있는 중국 전구 미군 사령부와 합작으로 우리의 본국 침투를 위한 특수훈련을 계획하고 있다.
국내에 잠입하여 지하공작을 전개하다가 연합군 상륙시 국내의 항일세력을 총궐기케 하고 상륙군에 호응하여 왜적을 멸살시키는 데 목적을 둔 훈련이다. 그리고 지금 중국에 있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 중에 그 같은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적임자가 귀관들이다.

귀관들은 조국을 떠나온 지 얼마 안 돼 국내 사정에 밝다. 또한 귀관들은 대학 출신으로 한국인 최고의 인텔리들이다. 그 훈련에 여러분보다 더 적합한 후보자들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곳에 왔다. 국내 잠입은 목숨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니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 이 훈련에 지원 할 수 있다”

이범석 장군의 이런 말에 모두가 환성을 지르며 박수를 보내고 전원이 기꺼이 지원하였다. 일행 50명이 훈련장이 있는 서안(西安)으로 출발하는 날이 공교롭게도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의사가 일본군 백천(白川) 대장을 죽인 4월 29일이었다. 출발에 앞 서 김구 주석이 두루마기에서 윤봉길 의사가 죽음의 자리로 떠나면서 맡겼던 회중시계를 꺼내 보이면서 말했다.

“오늘 4월 29일은 내가 23년 전에 윤봉길 군을 죽을 자리에 보냈던 바로 그날이오. 또 지금이 바로 그 시각이요. 그 날 윤봉길 군이 ‘이 시계가 선생님 시계보다 훨씬 새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는 쓸 데가 없으니 이 시계를 선생님이 가지시고 선생님의 시계를 저에게 주십시요.’ 하고 시계를 바꿔 넣고 떠나던 윤봉길 군의 모습이 지금도 내 눈에 선하오. 바로 그 날과 같은 날짜 같은 시각에 윤 의사와 꼭 같은 임무를 띤 여러분을 또 떠나보내고 있소.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반드시 하늘이 정한 뜻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싶소.”

장준하의 삶과 사상 (16)

장준하 일행 50명이 서안에 도착하자마자 훈련은 시작 되었다. 미국의 OSS 대원이 되기 위한 고도의 훈련이었다. OSS란 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의 약자로 미국의 전략 첩보대를 말한다. 이 조직이 바로 미국 CIA의 전신이다. 주 임무가 정보와 유격 작전을 통한 적 후방의 교란 공작이었다.

7월 말 3개월간의 정규교육이 끝나고  1기생 졸업자 전원이  대한민국 광복군 육군 대위로 진급되었다. 이에 이범석 장군이 미군 측과 협의하여 국내 침투 반을 편성하였다.

5,6명씩을 한 반으로 하여 6반을 만들고는 8월 20일까지 한반도 전역에 걸친 각 반의 담당 지역으로 침투시키기로 결정 되었다. 조선 8도에 각 팀의 팀장으로 선정된 사람들은 다음 같았다.

지역    도별 팀장

경기도    장준하
강원도    김준엽
함경도    김용주
평안도    강정선
황해도    송면수
전라도    박 훈
경상도    허영일
충청도   정일명

그러나 이 침투 계획은 실시를 앞둔 불과 며칠 전 허망히 끝나고 말았다. 일본이 손을 들어 버린 것이다. 우리 민족사에 몇 번이나 이런 억울하고도 안타까운 고비가 있었지만 일본이 항복케 된 시기 역시 참으로 좋지 않은 때에 손을 들고 말았다. 몇 달만 늦게 일본이 손을 들었더라도 장준하 팀이 조국에 들어가 조선 8도에서 게릴라전을 펼친 후에 우리들 자신의 손으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킬 수 있었더라면 그 후의 우리 현대사의 전개는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 스스로의 힘에 의한 해방이 아닌 외세(外勢)에 의한 해방이 지금까지 우리들의 올무가 되어 있다. 참으로 억울하고 분한 민족사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장준하의 삶과 사상 (17)

일본이 두 번의 원자탄 투하로 인하여 항복하게 되자 자력으로 민족 해방의 큰 뜻을 품고 OSS 훈련에 임하였던 장준하 일행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 중에서도 김구 주석은 항복한 일본의 무장 해제를 광복군이 맡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온갖 노력을 다하였으나 워낙 힘이 없는 처지였다.
광복군에게는 비행기도 함정도 가진 것이 없으니 귀국 작전을 펼 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미군의 배려로 미군들이 오는 비행기에 광복군의 대표 자격으로 이범석,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넷이 동승하였으나 그것마저 도착한 김포비행장에서 일본군의 착륙 거부로 인하여 중국으로 되돌아 가야하는 수모까지 당하였다. 우리 민족의 해방 이후의 역사는 이때부터 꼬일 대로 꼬인 형세였다.

당시에 광복군 전체가 다그러하였지만 조국해방에의 꿈을 품고 OSS 훈련에 임하였던 그들이 이제는 더 이상 쓸모없는 부랑대원들 같이 되고 말았다. 만약 그들이 제 때에 귀국하여 한국군의 중추세력이 되었더라면 우리의 현대사는 완전히 다르게 전개 되었을 것이다.
해방 후 3개월이나 지난 후에야 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가 보낸 C47 수송기 한 대가 상해로 날아 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호송하는 목적으로 보내진 수송기였다. 그때 장준하는 김구 주석의 수행 비서자격으로 동승하여 귀국케 되었다. 1945년 11월 23일이었다.

김포 비행장에 도착하니 나부끼는 태극기도 환영하는 인파도 들리는 만세소리도 아무것도 없었다. 미군정 당국이 임정 요인들의 귀국을 국내에 일체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대목이 참으로 슬픈 민족의 현실이었다.

장준하의 삶과 사상 (18)

김구 주석 이하 임시정부 요인들이 서울에서 묵을 곳은 서대문의 경교장(京橋莊)이었다. 김포공항에 내린 일행이 경교장에 도착하는데 1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김구 선생의 도착을 아는 이가 없으니 환영하는 인파가 없어 직행해 왔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6시경에서야 미 군정청 공보과는 조선 주둔군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의 이름으로 김구 선생 일행의 도착을 다음 같이 짧은 글로 공식 발표하였다.

“오늘 오후 김구선생 일행 15명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오랫동안 망명하였던 애국자 김구 선생은 개인 자격으로 서울에 돌아온 것이다.”

일행이 김포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4시니까 6시에 도착을 발표한 것은 미 군정 당국이 일행의 귀국을 반가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래서 김구 선생에 대하여 임정 수반이자 광복군 통수권자인 사실을 부정한 채로 개인 자격의 입국임을 내세운 것이다.

미 군정이 이렇게 고의적으로 김구선생을 푸대접한 이유는 미 군정이 끝난 뒤에도 김 구같은 인물이 지도자가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는 미국이 해방시킨 이 식민지의 피지배 민족과 민중에게 섣불리 그 주체성을 인정하는 과오를 범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해방 직후 미 군정의 이런 바람직스럽지 못한 정책이 이 땅의 젊은이들을 반미 정서 내지 반미운동에로 유인하는 좋지 못한 근거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유럽의 아이젠하워 사령부가 2차 대전 전후에 프랑스의 망명 지도자 드골에게 베푼 대우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장준하의 삶과 사상 (19)

경교장에서 장준하가 맡은 일은 임정 주석이고 한국독립당 당수인 김구를 만나기 위하여 모여드는 인사들을 안내하는 일과 김구의 성명서와 회견문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장준하의 안내를 받으며 김구 선생을 맨 처음 만난 사람이 이승만 박사였다. 이승만은 개인의 정보력으로 임정 요인들이 도착하는 시간을 알고 있었기에 맨 처음 방문자가 될 수 있었다. 이승만은 김구가 도착하기 며칠 전에 서울 중앙방송 라디오를 통하여 다음 같이 발언하였었다.

“나는 임시정부의 한 사람이다. 임시정부가 들어와서 정식 타협이 있기 전에는 어떤 곳과도 관계할 수 없다. 며칠 안에 그들이 귀국하면 전 국민이 환영할 줄 믿는다.”

이승만이 김구를 만나고 간 후 8시경에 임시정부 선전부장 엄항섭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이 회견에서 발표한 김구 선생의 성명문은 역사적인 성명이라 생각하여 장준하가 심혈을 기울여 작성하였다는 내용이다.

“27년간 꿈에도 잊지 못하던 조국 강산을 다시 밟을 때 나의 흥분되는 정서는 형용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경건한 마음으로서 우리조국이 독립을 전취하기 위하여 희생되신 유명무명의 무수한 선열과 아울러 우리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피를 흘린 허다한 연합국 용사들에게 조의를 표합니다.......나와 나의 동사(同事)는 각각 일개의 시민 자격으로 입국하였습니다. 동포 여러분의 부탁을 맡아가지고 27년간을 노력하다가 결국 이런 정도로만 여러분과 대면하게 되니 대단히 죄송합니다. 조국이 통일과 독립을 위하여 유익한 일이라면 불 속이나 물 속이라도 들어가겠습니다. 우리는 미국과 중국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기쁨으로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장준하의 삶과 사상 (20)

김구(金九 1876∼1949) 선생의 귀국 성명서는 다음 구절로 끝이 나고 있다.

“......완전히 자주 독립하는 통일된 민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공동 분투합시다.”

이 성명서에는 비록 해방이 되었다고는 하나 앞날이 불확실한 조국의 현실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이 성명서의 낭독이 있은 후에 ‘임시정부의 당면 정책 14개 조항’이 낭독 되었다.
이들 14개 조항 중에 특히 중요한 부분을 들자면 아래와 같다.

“ 2항 : 우리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혈전한 중·미·소·영 등 우방 민족과 더불어 절실히 제휴하고 연합국 헌장에 의하여 세계 일각의 안전 및 평화를 실현함에 협조할 것.

8항 ; 국내에서 건립될 정식 정권은 반드시 독립 국가, 민주정부, 균등 사회를 원칙으로 한 신 헌장에 의해 조직할 것.

14항 :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와 매국적에 대하여는 공개적으로 막중히 처벌할 것.”

우여곡절을 거쳐 1948년에 수립 된 이승만 정권이 범한 치명적인 과오가 있다. 14항의 반민족 행위를 한 매국노들을 처벌한다는 조항을 철저히 깨뜨린 점이다. 이승만 정권은 그들을 처벌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의 협력을 받아 그들을 비호하며 정권을 유지하였던 점이다. 물론 이승만 정권이 이런 과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승만 정권이 남긴 가장 큰 공로는 이 나라의 체제를 자유민주주의 기초 위에 세운 점이다.

그날에 열렸던 김구 선생의 첫 기자 회견은 밤 10시가 지나서야 마칠 수 있었다. 기자들의 마지막 질문은 국민들이 김구선생의 육성을 언제 들을 수 있게 되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들 일행이 김포 공항에 내려서부터 받은 미 군정 당국의 냉담한 태도를 보아서는 그에 대한 대답을 아무도 할 수 없었다.

장준하의 삶과 사상 (21)

김구 선생 일행이 조국에 도착하였던 그 다음 날에 미 군정 당국에서 연락이 왔다. 김구의 육성 방송을 2분간만 허락하겠다는 연락이었다. 이에 장준하가 고심하여 쓴 다음의 2분짜리 방송이 김구 선생의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방송을 타고 나갔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27년간이나 꿈에도 잊지 못하고 있던 조국 강산에 발을 들여 놓게 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나는 지난 5일 중경을 떠나 상해로 와서 22일까지 머물다가 23일 상해를 떠나 당일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앞으로는 여러분과 같이 우리의 독립 완성을 위하여 진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전국 동포가 하나가 되어 우리의 국가 독립의 시간을  최소한도로 단축시킵시다. 앞으로 여러분과 접촉할 기회도 많을 것이고 말할 기회도 많겠기에 오늘은 다만 나와 나의 동사 일동이 무사히 이곳에 도착되었다는 소식만을 전합니다.”

일본의 패전으로 한국이 해방은 되었으나 우리 힘으로 이루어진 해방이 아니였기에 독립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 독립의 여부를 미 군정(軍政)이 틀어쥐고 있었다. 더욱  통탄스러운 것은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때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분단이라는 비극이 현실로 대두 되게 되었다.

장준하의 삶과 사상 (22)

장준하(張俊河 1918∼1975)가 김 구(1876~1949)주석을 모시고 귀국하여 경교장에 머물고 있는 소식이 신문에 보도 되자 고향 삭주 대관학교의 후배인 최기일(崔基一)이 달려왔다.  2년 전 장준하가 학병으로 출정하던 때에 대관역에서 울먹이며 “꼭 살아서 돌아오시오” 라고 하였던 사람이었다. 그가 이화장(梨花莊)에서 이승만 박사를 모시고 있노라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장준하는 크게 고무 되었다. 절친한 친구 사이에 한 사람은 김구 선생을 다른 한 사람은 이승만 박사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이 우연한 일같이 여겨지지 않았다.  당시의 정세가 해방 직후의 극심한 혼란기여서 남북과 좌우의 대립이 심각하던 때였다. 그런 때에 김구와 이승만 양 거두가 힘을 모으고 뜻을 하나로 하게 되면 그 자체가 민족에 희망을 주게 되는  사건이 되겠기 때문이었다. 그때 최기일을 만난 뒤의 생각을 장준하는 『돌베개』에서 다음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한 일같이 생각되지 않았다. 내가 김구 선생을, 최 형이 이승만 박사를 각각 비서로서 모시게 된 이 우연은 어떤 필요충분조건 같이 해석되기도 하였다.  곧 이 박사와 김구 선생을 연결시키는 교량 역할의 책임이 주어지는 것이구나 하고 스스로 단정하였다.”

실제로 당시의 정세로 보아 김 구 선생과 이승만 박사의 협력이 건국의 기초를  놓는 기본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때 모두가 간절한 마음으로 그렇게 기대하였던 바대로 이 두 거인이 일심동체가 되었더라면 이 나라의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참으로 아쉽고 애석한 역사의 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장준하의 삶과 사상 (23)

장준하는 이승만 박사의 비서로 있는 친구 최기일을 통하여 이승만 박사가 거처하는 돈암장을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김구 선생과 이승만 박사가 서로 협력할 수 있는 길을 열어 가려고 최선의 힘을 다하였다. 그러나 장준하가 그런 꿈에서 깨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김구 선생과 이승만 사이는 끝내 멀어지게 되었고 김구 선생은 누군가가 보낸 사람 안두희에 의해 서거하고 말았다.

45년 11월 27일 김구 선생은 국내 정치인 거두들과의 회담 일정을 잡아 두고 있었다. 한국민주당 당수 송진우,  한국국민당 당수 안재홍,  인민당 당수 여운형, 인민공화국 총리 허헌 등과 차례로 만날 계획이었다. 이 회담을 앞두고  엄항섭이 장준하에게 다음의 준비사항을 지시하였다.

첫째, 각 회담에 장준하가 반드시 입회할 것.
둘째, 회담 내용을 기록할 것.
셋째, 회담을 위한 예비지식을 위해 자료를 작성하여 주석님께 브리핑할 것.

그 해 12월 6일에 경교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에서의 첫 국무회의가 열렸다. 이 국무회의에 대하여 모든 매스컴들이 집중 보도하였다. 그리고 온 국민들의 시선이 그 국민회의에 집중되었다. 회의장은 경교장의 아래층 응접실이었고  장준하는 기록을 위하여 참석하였다. 참석한 20여 명의 국무위원들 중에 이승만 박사는 임시정부 구미위원단(歐美委員團)의 단장 자격으로 참석하고 있었다.

장준하의 삶과 사상 (24)

김구선생의 사회로 시작된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김구 선생의 국내 정세에 대한 간단한 언급에서부터 시작 되었다.

“국내 사정이 유동적입니다. 미군의 대 임정 태도가 썩 좋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런 요지의 발언이 있고 난 후 선전부장 엄항섭이 임정 제1진이 귀국한 이후로 겪게 된 여러 가지 사정을 설명하는 중에 난립을 이루고 있는 각 정당의 동태, 미군정의 견제를 받고 있는 임시정부의 고충 등을 보고하였다. 이어서 이승만 박사가 발언을 하면서 좌파와 공산주의자들의 움직임을 상세히 설명하고는 그들에 대한 엄격한 경고의 발언을 하였다. 좌중에는 공산주의자들도 있었던 때였기에 그들이 몹시 언짢아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이어서 동석한 각 계파들 간에 서로에 대한 비난과 규탄이 뒤를 잇게 되어 국무회의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로 마치게 되고 말았다.
이런 분위기에 너무나 실망하였던 장준하는 『돌베개』에서 그 때의 심정을 다음 같이 쓰고 있다.

“환국한 임정 각료들 안에서까지 일치구국의 염이 저렇듯 허사가 된다면 이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이 난국에 온 백성들의 기대가 임정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단 한마디가 없는 국무회의가 된 것이 무엇보다 가슴 아픈 일이었다.”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는 마당에 임시정부의 여러 요인들은 제 각기 자기 파벌의 세 확장과 입지를 닦는 일에만 열중하였기에 그런 사실이 해방 이후 한반도 역사의 굴절과 아픔을 상징적으로 말해 주는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1945년은 넘어가게 되고 해가 바뀌게 되면서 장준하는 북한에서 월남한 가족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17세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결혼 하자마자 남편을 학병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의 아내 김희숙은 이제 19세가 되어 남편과 재회할 수 있게 되었다.

장준하의 삶과 사상 (25)

아내의 뒤를 이어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까지 38선을 넘어 월남하여 와서 온 가족이 서울에 모이게 된 것은 좋았으나  많은 가족이 서울 바닥에서 살아 갈 생계가 막연하였다. 1946년 말까지 장준하는 김구 선생의 비서로 있었으나 이미 임시정부는 빛이 바래지게 되고 김구 선생은 임정의 주석직에서 한독당이란 한 당파의 대표에 머물게 되고 말았다.

정국은 테러와 암살이 연이어 일어나 45년 12월에 송진우가 암살되고, 47년 7월에는 여운형이, 47년 12월에는 장덕수가 암살  되었다. 그리하여 정치계는 갈수록 혼미하여져 가게 되고 백성들의 정치인들에 대한 기대는 날로 무너지게 되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장준하의 고민은 날로 깊어만 갔다. 이때에 1946년 6월까지 중국에 남아있었던 이범석이 이승만 박사의 부름을 받아 귀국하게 되었다. 그는 귀국 후 국내의 얽히고 섥힌 혼란상을 일신해 보겠다는 이상을 품고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하였다.
족청으로 잘 알려진 이 조직은 칡넝쿨처럼 얽히고 설킨 당시의 정치 현실을 일신하겠노라는 포부를 안고 시작되었다. 이범석은 장준하의 손을 잡고 간곡히 부탁하며 다음 같은 대화가 둘 사이에 오갔다.

“장 동지 서안(서안)에서의 일을 생각하고 나를 도와주시오”
“하지만 저는 경교장에서 김구주석을 돕는 일에 매인 몸입니다.”
“그런 일이라면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지 않소. 그러나 이 일은 장 동지같은 일꾼이 없이는 안되는 일이요. 김구 선생께 내가 말씀 드리겠소. 선생님께서도 쾌히 허락하실 거요.”
  
철기 이범석 장군의 부탁을 들은 뒤로 장준하는 자신의 거취 문제로 고민하다가 김구 선생께 의논드렸다. 선생께서는 기꺼이 다음같이 말해주었다.

“철기가 장 목사를 탐내는 거야 당연하지. 본디 중경에서도 장군은 정치판이 싫다고 서안으로 철기를 따라가지 않았나. 가서 열심히 도와주시오.”

이에 경교장을 나온 장준하는 그가 30세 되던 해인 1947년에 민족청년단의 교무처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이 자리 또한 오래가지 못하였다. 족청에 발을 들여 놓고 보니 이범석은 옛날의 이범석이 아니었다. 그의 언행에서 계략과 술수가 비쳐지는 것이었다. 민족 재건을 위한 순수정예를 추구하는 장준하와 세력 확대에 열중하는 이범석 사이에 의견 대립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장준하의 굽히지 않는 고집에 이범석이 성가셔 하게 되었다.

장준하의 삶과 사상 (26)

알고 보니 족청의 이범석은 경교장의 김구 주석 편이 아니라 이승만의 편이었다. 이승만의 명을 받아 반공운동을 표방하면서도 좌익세력들과도 거리낌 없이 타협하곤 하는 것이었다. 민족과 민주를 위한 순수한 정신운동을 목표로 족청에 몸담았던 장준하는 이미 다른 정당 단체들과 다를 바 없어 더 머무를 수 없었다. 이에 그는 단복을 벗어 단정하게 개어 단모와 함께 책상 위에 놓고는 말없이 나오고 말았다. 후에 이범석은 이승만의 사람이 되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설칠 때에 혹시 만나게 되면 그냥 목례만으로 지나치는 사이가 되었다.

1948년 장준하는 일본신학교에서 못다 한 것을 계속하기 위하여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하여 반년만에 졸업하였다. 47년, 족청에서 나온 이후로 장준하는 문화운동에 주력하면서 정치계에는 멀리하였다. 48년 정부수립과정에서도 그는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그러던 ‘49년  그가 정성을 다하여 보좌하였던 김구 선생이 암살당한 후로는 임정 세력은 완전히 국내 정치에서 몰락하였다. 김구 선생께서 심혈을 기울였던 남북협상도 종말을 고하고 임정 세력은 뿔뿔이 자기 살길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김구 선생이 서거하게 된지 꼭 일년만에 6.25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일어났으나 국군은 일본군 출신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에 광복군 출신들은 참여하지를 못하였다. 그는 속절없이 피난민들 속에 떠밀리다시피 하여 부산까지 가게 되어 그곳에서 그 유명한 『사상계』를 창간케 되었다.

지금까지 27회에 이르도록 장준하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내가 장준하 선생에 대하여 다소 장황하게 쓴 것은 그의  삶과 사상이 뉴라이트 운동에 하나의 이정표가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뉴라이트 운동의 사상적 배경으로 3가지 흐름이 있다.
바로 자유민주주의와 민족주의, 공동체주의이다. 그리고 뉴라이트운동이 지향하는 민족주의의 흐름에는 다섯 분을  본보기로 삼고 있다.

1) 다산 정약용 선생  2) 도산 안창호 선생  3) 백범 김구 선생  4) 유일한 회장  5) 장준하 선생

모름지기 이 땅의 젊은이들은 이런 소중한 선배들의 삶과 사상에서 배우고 익혀 자신의 인격과 실력을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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