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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지리산 편지]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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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편지]   2006-05-22  

“신(神)은 모든 곳에 계실 수 없기에 어머니를 창조하셨다” 는 말이 있다
누구에겐들 어머니가 소중하지 않으랴만 나의 어머니는 남다르게 소중한 어머니다.
2년 전 어머니께서 88세 되던 때에 잠시 병이 든 적이 있으시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그때 어머니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시기를 “하나님 아버지 이제 살만큼 살았고 자식들도 제구실하는듯하니 이제 나는 하늘나라로 데려가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셨다 한다. 그런데 기도 중에 흰옷 입는 천사가 나타나 “지금은 아니고 2년 후 너를 데려가겠노라”는 말을 들으셨다는 것이다.

그 뒤로 어머니는 2년 뒤인 90세에 죽게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올해가 시작되면서 어머니는 ‘금년이 자신이 하늘나라로 가시는 해’라고 하시고는 손수 수의를 장만하시고 지리산두레마을에 계시면서 자신이 묻히실 묘터를 직접 살펴보시곤 하셨다.
그러다 보름 전에 앓아누우시게 되면서 주변을 말끔히 정리하시기 시작하셨다. 자신이 끼고 있던 금반지는 며느리에게 주시고 털목걸이는 딸에게 물러주셨다. 살아오는 동안 신세진 사람들에게는 일일이 고맙다는 인사말을 전했다. 그리고는 혼수상태에 빠지셨다가 어제(21일) 오전 11시 45분께 숨을 거두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어머니께서 혼수상태에 드시기 전에 내가 마지막 들은 말은 짧은 한마디다.

“모든 것이 감사하다”

어머니는 2년 전 흰옷 입은 천사가 일러준 바대로 90세 되시는 해에 소천(召天)당하시니 지금은 아버지와 큰 아들이 먼저 가 있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23일에 지리산 두레마을의 어머니께서 친히 골라 놓으신 산자락에 모시려한다.

나의 어머니 ②
    
누구든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추억이 없으랴만 남달리 고생이 많으셨던 나의 어머니 역시 숱한 추억꺼리를 남기셨다. 그런 추억들 중에 날이 갈수록 잊혀지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

고교생 시절에 나는 별로 모범생이지를 못하였다. 공부도 하기가 싫고 산다는 것 자체가 지겹기만 하여 다 털어버리고 무전여행에 나섰다. 칫솔 하나를 윗주머니에 꽂은 채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의 시집 한권을 든 채로 발 가는데로 여행길에 올랐다.
그렇게 시작된 무전여행이 18개월간이나 이어졌다. 전남 소록도를 지나던 길에 공부하고픈 마음이 들어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여쭈었다.

“어머니 나 이제 맘 잡고 공부 할래요. 공부하려면 참고서가 있어야 하는데, 책값을 마련해 주세요.”
어머니는 반가와 하시며 “그래, 그럼 내일 책값을 마련해 줄게.” 하셨다. 다음날 이른 아침 책값을 마련하러 나가신 어머니는 밤 이슥해서야 돌아오셨다. 마련해 오신 책값을 네게 건내 주시고 어머니는 이내 잠자리에 드셨다. 그런데 밤늦도록 공부하고 내가 우연히 어머니 쪽을 보았더니 어머니께서 수건을 머리에 쓰시고 주무시는 것이었다. 나는 영문을 모른 채로 “어머니는 왜 수건을 쓰시고 주무시나?” 하는 생각으로 수건을 벗겨 드렸다. 그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머니 머리카락이 없는 맨머리였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어머니께서 왠 종일 책값을 마련하시려 이집 저집을 다니다가 끝내 마련치 못하시자 가발가계에 가셔서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팔아 책값을 마련하신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다짐하였다. “내 몸이 부서지더라도 악착같이 공부하여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 드려야지!” 하고 거듭 다짐하였다. 다음 날 나는 서점으로 가서 영어와 수학의 참고서를 사서는 각 권을 7번씩 읽었다. 그 실력이 기초가 되어 대학입학 할 때 수석으로 입학 할 수 있게 되고 장학금을 받게 되어 어머니 짐을 덜어드리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내가 이만큼이나마 사람구실 하며 지낼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공이 밑거름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의 어머니 ③
  
그저께(23일 화요일) 지리산 두레마을의 양지바른 산기슭에 어머니를 안장하였다. 어머니께서 손수 고르신 묘터였다. 60년 전인 1947년 10월에 작고하신 아버지 묘지를 경북 청송의 고향 땅에서 이장해와서 어머니와 합장하여 모셨다. 묘를 꾸밀 때에 평장(平葬)으로 하였다. 그 자리에 감나무, 살구나무, 매실나무, 복숭아나무를 심어 과일동산으로 꾸미려는 마음에서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아버지께서 작고하실 때에 마지막 유언을 다음 같이 남기셨다.
“자녀들의 교육을 부탁합니다. 특히 셋째 홍이 교육에 신경 써주세요.”
나를 일컬어 ‘셋째 홍’이라 이르신 것이다. 어머니는 살아 생전에 가끔 이르시기를 “다같은 자식인데 왜 하필이면 셋째인 너에게 신경을 쓰라”하였는지 모를 일이다고 하시곤 하였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때에 중학교로 진학할 처지가 못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버지께서 남긴 유산이라곤 재봉틀 한 대 뿐이었다. 그것으로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하셔서 우리들 4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마치게 하였다. 그러니 그 과정에서 어머니가 겪은 고생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집안 어른들이 대장간에 심부름꾼으로 내 일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때 어머니께서 나를 앞에 앉혀두고 우시면서 나에 대한 아버지의 유언을 일러주시는 것이었다.

“너의 아버지가 숨을 거두면서 특별히 너의 교육에 마음 써 달라 하였거늘 어찌 너를 대장간 심부름꾼으로 보낼 수 있겠느냐. 내가 어쩌든지 너만은 공부를 시킬테니 너도 힘들더라도 잘 이겨 내야 하느니라.” 하시고는 고향의 안덕 중학교에 입학금을 외상으로 하고 입학시켰다. 3월에 그렇게 입학한 내가 입학금을 9월에야 낼 수 있었으니 그간에 입학금 가져오라고 학교에서 시달린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머니께 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생각하고는 참고 견뎠다.

그때 어머니의 눈물어린 당부가 없었더라면 나의 삶은 전연 달라졌을 것이다. 어머니들의 지성(至誠)이 자식의 장래를 결정짓는 것이다.

나의 어머니 ④
  
나의 어머니가 내게 가르쳐주신 것들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이 책 읽는 습관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어린 시절부터 독서습관이 몸에 베이게 하셨다. 어머니는 4 남매인 우리 형제들이 책 읽지를 않고 잡담을 하고 있으면 엄하게 꾸지람하셨다.
일본에 9년간이나 사셨던 어머니는 일본 사람들의 독서습관을 자주 말씀하셨다. “일본 사람들은 공원에서나 열차에서나 시간만 나면 조용히 책을 읽는데, 우리 조선 사람들은 모이면 화투놀이나 잡담으로 헛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하시면서 우리 조선이 일본에 뒤지게 된 것은 책을 읽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흉이나 보면서 살았기 때문이라 하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나의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에게 읽을거리를 열심히 구해다 주셨다. 그러나 그 시절에 두메산골에서 어린이에게 읽을거리가 흔할 리 없었다. 어머니는 친척들 집을 다니며 심리학개론이니 법학통론이니 하는 책들을 가져다주시는 것이었다.
초등학생인 내가“그런 책들은 한자가 많고 어려워서 못읽겠습니다.”고 여쭈면 어머니께서는 “못 읽어도 책을 들고만이라도 있어라. 책읽기는 습관인 것이니 책을 들고만 있어도 장래 유익한 밑천이 되는 것이니라.”하고 일러주시곤 하였다.

어머니의 그런 열성에 힘입어 나에게 독서는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지금 이 나이가 되어도 손에 책이 없으면 마치 몸에 균형이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그리고 지금도 책만 들게 되면 금방 집중할 수 있게 되어 책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 가끔은 난처한 경우도 당하게 된다. 외국여행이 잦은 나는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책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 사방이 너무 조용하여 일어나 확인해 보면 비행기가 이미 떠난 뒤인 것이다. 몇 번씩이나 그런 경우를 당하곤 하였지만 나는 이 습관을 고칠 마음이 없다. 어머니가 물러주신 유익한 재산이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 ⑤

초등학교 5학년 때 즈음인 것 같다. 마을에 잔치가 있었다. 시골 마을에서의 잔치라면 온 마을 잔치가 된다. 온 마을 사람들이 잔치 집에 모여들어 일을 거들고 음식도 함께 먹는다. 나는 학교를 파하고는 집에 가방만 두고는 잔치 집으로 갔다. 풍성한 음식상을 기대하며 마당으로 들어서는 나를 주방에서 보신 어머니는 나를 불러 엄명을 내리는 것이었다.
“홍아 넌 여기서 음식을 먹지 말고 집으로 가거라.”
나는 이해가 되지를 않아 의아한 얼굴로 어머니 얼굴을 올라다보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께서 다음같이 말하셨다.
“배고프다고 어린 나이에 얻어먹고 살면 안돼. 어려서의 버릇이 어른 때까지 가는 거야. 넌 이집에서 먹을 생각일랑 말고 집으로 가서 내가 아침에 나올 때 차려놓은 밥이 있으니 그걸 먹어라. 여기서 얼쩡거리지 말고 얼른 가거라.”

그때 내가 얼마나 섭섭하였던지 60이 넘어선 이 나이에도 그때 기억의 생생함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이다. 눈물을 훔치며 돌아선 나는 집으로 가서 식은 보리밥을 한술 뜨고는 지게를 지고 땔나무 장만하러 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내 나이 30중반에 이르러 청계천 빈민촌에서 빈민선교를 하던 때였다. 하루는 주한미군 부대에서 빈민촌 마을 어린이들을 위해 짚차 트레일러에 고기 통조림, 비스켓, 초코렛 등을 잔뜩 싣고 왔다. 트레일러에 실린 풍성한 먹을거리를 보게 된 마을 어린이들이 기대에 넘치는 얼굴을 한 채로 짚차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때 나는 고향 마을에서 겪었던 잔치 집 일이 기억났다. 그래서 미국 병사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냥 돌아가주세요. 당신들 마음은 고마우나 이 마을 어린이들에게 당신이 가져온 선물들을 풀어놓으면 그들을 가르치는데 좋지 않을것 같습니다. 미안하지만 그냥 돌아가 주세요.”
내 말을 들은 미군 병사는 처음에는 “What?”하며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나오더니 끝내는 내 말을 이해하고는 그냥 되돌아 같다. 짚차 주위에 모여들었던 아이들이 아쉬워하고 있던 얼굴 모습들이 지금까지도 눈에 선하다. 자기가 땀 흘려 얻은 수고의 열매로 살아가는 자립정신이 사람답게, 사나이답게 사는 길의 첫출발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어머니께 고마움을 느낀다.
  
나의 어머니 ⑥
  
1961년 11월 대학 입학을 위한 국가고시를 치던 날의 일이다. 그때의 국가고시란 요즘으로 말하자면 수능시험에 해당된다. 나는 이른 아침을 먹고 시험장으로 나서며 어머니께 “도시락을 주세요.”라고 했다. 어머니께서는 “도시락이 없다”고 딱 잘라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이해가 되지를 않아 “어머니 다른 날도 아니고 대학입학 시험이 있는 날인데 도시락이 없으면 어쩌나요? 시험이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이어지는데요?”하고 여쭈었더니 어머니께서는 표정도 바꾸지 않으신 채로 말씀하셨다.

“너도 남자가 돼서 점심 한끼 정도는 스스로 해결하려무나. 너 말따나 다른 날도 아니고 입학시험 치는 날인데도 도시락조차 챙겨주지 못하는 이 에미 맘이 어떠하겠냐? 그러니 도시락 애길랑 그만 해라.”

하시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리시는 것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풀 죽은 마음으로 시험장으로 떠났다. 오전 시험을 무사히 치르고는 점심시간이 되자 다른 수험생들은 어머니나 누나들이 도시락을 싸들고 와서 밖에서 기다리다가 시험장인 경북고등학교의 교정에 뿔뿔이 앉아 점심을 먹기 시작하였다. 나는 학교 교정에 있는 포플러 나무에서 가지를 꺾어 젓가락을 마련하고는 넓은 운동장을 한바퀴 돌며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체면불구하고 끼어들어 식사를 하였다. 그렇게 서너 가정을 돌고나니 내가 도시락을 가져 간 것보다 더 잘 먹을 수 있었다. 덕분에 점심시간 다음 시간이 수학 과목이었는데 너무 잘 먹었던 탓에 식곤증이 나서 졸음이 쏟아지는 통에 시험 치르기에 지장이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시험을 치렀지만 나중에 성적이 나온 내용은 점심밥을 얻어먹은 내가 친구들 중에서 성적이 제일로 높게 나왔다.

나는 지금도 어머니의 그런 자녀교육 방법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비록 가난하게 살았지만 가난에 져버리지 않고,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체질을 어머니께서 길러주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즘 어머니들은 자식을 과보호하기에 그 자녀들이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스스로 헤쳐 나가는 담력이나 ‘헝그리 정신’이 부족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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