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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참된 보화 (롬 3: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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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참된 보화 (롬 3:19-26)
   

종교개혁지 성지순례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종교개혁지라고 하면 독일의 마르틴루터가 95개 조문의 토론의제를 내어 붙인 비텐베르그 대학이 있는 비텐베르그 시가 첫 번째였습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되어 있는 루터가 살던 집, 루터하우스와 루터의 둘도 없는 동료이었고, 종교개혁자인 멜랑히톤이 살던 집, 멜랑히톤 박물관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텐베르그 성(城)교회와 비텐베르그 대학을 돌아보았습니다. 비텐베르그 성교회는 대단히 웅장하였습니다.  중세의 교회답게 크고 웅장하였습니다. 루터가 기도했다고 하는 성교회의 높은 종탑은 입장료를 내어야 들어갈 수 있는데, 그 높은 종탑을 루터의 심정으로 기도하려고 겨우 올라갈 수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보았습니다.  너무 높고, 올라가는 길이 험하여 올라가보겠다고 결단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데, 우리 내외는 꼭대기까지 올라가보았습니다.  
   
비텐베르그 성교회 안에는 루터와 그의 동료 개혁자인 멜랑히톤이 묻혀 있었습니다.  두 분의 개혁자들이 묻혀 있는 예배당을 자세히 돌아보았습니다.  그 성교회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역사적인 건물이었습니다.  그 성교회의 정문에는 동판으로 95개조문의 토론의제가 새겨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나무문으로 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많은 순례자들을 위해 동판에 새겨놓았습니다.  
   
루터의 집은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있는데, 만여 점의 고서와 6천 점의 자필본, 많은 그림과 조각상들이 있었는데, 종교개혁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박물관이라고 합니다.  
   
멜랑히톤은 루터의 동료교수이며 종교개혁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독일의 스승’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당시 21살의 나이에 이 대학에 헬라어교수로 초빙된 인물로, 독일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학자였습니다.  루터의 사상을 체계화하고 신학화한 사람입니다.  
   
저희 순례단은 루터가 대학시절을 보내고 수도원의 수사로 생활한 에어푸르트대학과 어거스틴파 수도원을 찾아갔습니다.    에어프르트는 루터의 정신적인 고향이었습니다.  우리는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1박하면서 루터가 공부한 대학과 그가 사제로 서품을 받고 설교한 성마리아대성당을 보았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웅장하고 그 규모가 큰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루터가 살던 당시의 에어푸르트 대학은 매일 아침 경건의 미사로 시작하며 대단히 금욕적인 규율을 가지고 있는 명문대학이었습니다.  여기서 루터는 신학을 배우고, 고대 언어를 공부하고 라틴어와 음악도 배웠습니다.  루터는 1505년 5월 법관을 만들어보려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에어푸르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루터는 잠시 시간을 내어 집에 다녀오는 길에 갑작스럽게 천둥과 벼락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벼락에 함께 가던 친한 친구는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면서 “성안나여 살려주소서! 살려만 주시면 수도승이 되겠습니다.”라고 서원하였습니다.  안나는 천주교회에서 마리아의 어머니라고 하여, 광산업을 하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이었기에 안나를 부른 것이었습니다.  루터의 아버지는 광산업자였습니다. 
   
루터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 해 7월 17일 어거스틴파의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 수도원의 원장도 알아주는 신앙인이었고, 특별히 부원장 슈타우피츠 박사는 명설교가였고, 성경연구에 탁월한 사람이었고, 고행으로 알아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루터는 사제로 서품을 받았고, 에어푸르트대학에서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루터가 사제로 서품을 받고 설교하였다고 하는 마리아성당을 보았습니다.  세상에 성당의 규모가 얼마나 크고 웅장한지 상상초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여러 성당들, 체코 프라하의 비트대성당, 에어푸르트 마리아대성당, 스위스, 프랑스의 여러 성당들의 규모는 정말 위력적인 건축물이며, 역사에 길이 남을 건물이었습니다.  
   
우리는 루터보다 100년 전에 종교개혁을 하다 순교한 보헤미아-체코의 얀 후스를 발자취를 알아보려고 체코의 수도 프라하를 방문하였습니다.    존 후스-얀 후스라는 인물에 대한 말씀을 언제 한번 자세히 나누려고 합니다. 그가 학장으로 있던 프라하대학과 시무한 베들레헴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구시가지 광장은 그를 화형 시킨 곳이며, 그가 화형당한 장소에 동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체코에서는 후스의 서거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15년에 동상을 건립하였습니다.   
    
그 광장은 1621년 개혁주의 신앙을 고수하면서 천주교회만을 고집하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에 대항하던 27명의 귀족들이 죽음을 당한 곳이었습니다.  후스의 동상에는 “진실을 사랑하고 말하고 지키라”는 후스의 말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후스가 시무한 베들레헴 교회의 설교단 뒤에는 후스가 거처하는 방과 서재가 있었습니다.  후스의 심정으로 그 방에서 잠시 묵상기도를 드렸습니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합니다. 프라하 대성당과 왕궁은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대단한 건물이었습니다.    왕궁과 함께 있는 비트대성당은 왕이 출입하며 예배드리던 곳으로, 주후925년부터 1929년까지 무려 1천년에 걸쳐 완성한 전형적인 고틱식의 예배당은 길이 124m, 폭 60m의 대규모 성전이었습니다.   그런 건물에 들어가면 그 엄청난 규모의 돌기둥과 성인들을 조각한 석상들, 벽화들에 압도되었습니다.  
   
얀후스의 개혁신앙을 따르는 사람들이 프라하에서 쫓겨나 개혁 신앙을 수호하면서 공동체생활을 하였던 타보르를 가보았습니다.  1402년 얀후스는 본국어인 체코어로 설교하였으며, 교인들에게 성만찬을 하면서 이종성배를 하였습니다.  당시 구교에서는 떡만 나누어 주었는데, 얀후스는 교인들에게 포도주를 나누어주었습니다. 이것은 얀후스가 처음한 일이었습니다.  후스는 교황청의 부패와 무능을 책망하면서 교회의 초석은 사도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강조하였습니다.   후스의 사후에 개혁신앙을 사수하는 이들이 모여 집단생활에 들어갔는데, 그들이 모인 곳이 성경의 다볼산이라고 이름을 붙인 타보르였습니다. 이곳 타보르에 모인 개혁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교황청에서 보낸 사람들과 전쟁하게 되었는데, 이곳의 지도자는 눈 하나를 실명한 지스카라는 장군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신앙도 좋고 지력가였기에 다섯 차례의 전쟁에서 다 승리합니다.  그래서 체코에서는 이종성배를 허락하고 체코어로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존 칼빈, 우리 개혁교회의 선구자인 스위스 제네바의 장 칼방이라고 하는 존 칼빈을 연구하기 위하여, 그가 시무한 제네바, 그가 피신하여 목회한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 칼빈이 태어난 누아용의 생가를 방문하였습니다. 
   
스위스 쥬리히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를 알기 위하여 쥬리히를 방문하였고, 칼빈에게 예배에 있어 많은 영향을 끼친 개혁자 마르틴 부처를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일생 목회하는 사람으로 이번 여행은 참으로 유익한 기회였습니다.  앞으로 설교하면서 필요하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교회의 참된 보화는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보화는 건물이나, 어떤 제도나 직제에 있지 않습니다. 저는 이번 종교개혁지를 돌아보면서 “교회의 참된 보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루터가 에어푸르트에 있을 때, 로마 교황청에서는 유럽의 모든 수도원을 교황청의 관할 아래에 두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의도에 수도원장들은 반발하였습니다.  루터가 속한 어거스틴파 수도원의 슈타우비치 원장은 루터를 로마에 보내어 어거스틴파 수도원의 입장을 설명하도록 파송하였습니다.   루터는 교황청이 있는 종교수도 로마를 방문한다는 설렘으로 가득 찼습니다. 로마시내에는 수많은 순교자들의 무덤과 유명한 성당들이 즐비하였습니다.  칼릭스투스 성당 지하실에는 역대 40명의 교황들이 묻혀 있는 성지였습니다. 그리고 7만6천 여명의 순교자들이 묻혀 있었습니다.  다른 성당에는 모세가 보았다고 하는 가시떨기 나무, 헤롯왕에 의하여 목숨을 잃었다고하는 아이들의 300여개의 뼈가 보존되고 있었습니다. 바울을 붙들어 매었던 쇠고랑, 로마 황제 도미티안이 사도요한의 목을 잘랐다고 하는 가위,  가룟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고 받았다는 동전 하나가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교황청에서는 그동안 성자들의 유해를 숭배하므로 큰 은덕을 입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생각하기를 수도원을 변명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성지를 순례한다는 것은 루터에게는 다시없는 기회가 된 것이었습니다.   교황 레오10세는 성자의 유골 하나하나에는 4,000년의 연옥 형기를 감해주는 효과가 있다, 가룟유다가 제사장으로부터 받은 동전 하나를 소유하면, 1,400년의 면죄효과가 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미신적인 신앙입니다.
   
루터는 1510년 11월에 받을 은혜를 기대하면서 로마로 향하였습니다.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루터는 순례의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빌라도의 계단 예수님을 끌고 가서 세웠던 거룩한 계단이라고 불리는 라테당 성당의 28개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당시에는 한 계단을 기어오르면서 주기도문을 한 번씩 외우고, 계단에 입을 맞추어야 했습니다.    
   
수도원에서 철저하게 금식하며 고행하고, 자기를 연단하면서 수련하여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이제 로마에 와서 고행한다고 하여도 마찬가지로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루터는 생각하였습니다.   수많은 금식과 수련과 고행이나 순례나 성자숭배가 은혜의 수단이 될 수 없고, 구원의 확신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루터는 고행을 밥먹듯이 하였습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회개하였습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회개하고 또 회개하여도 여전히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금식도 잘 했습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금식이라고 해야 얼굴이 설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시시하게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루터가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서, 비텐베르그 대학의 종신직 성경교수로 부임한 것은 1513년이었습니다.  대학에 들어온 루터는 첫 번째 과목으로 시편을 강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로마서 강해에 들어갔습니다.  그후 계속하여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도 강해하였습니다. 
    
시편 22편을 연구하면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라는 말씀을 강해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루터는 복음교리의 핵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편22편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여주는 다윗의 예언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을 당하여야만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깊은 사색과 연구 끝에, 이 시편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끊어져야 하는 루터 자기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을 것을 예언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였습니다.  그것은 주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고통을 받으시고, 버림을 받으시고, 죄의 대가를 치르고 형벌을 받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시편31:1절을 보면서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라는 말씀을 연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을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공의, 의, 정의로 그를 구원하신다, 건지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절의 말씀에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이 말씀에서 복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주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을 하나님은 공의로 건지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 죄인을 살려주시고, 건지시고 구원하시는데, 하나님의 공의는 마침내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고,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아들의 공로가 곧 하나님의 의,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로움이 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로마서를 읽는 중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롬1:17)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으심인데, 하나님은 하나님이 내신 당신의 의로 우리를 죄악에서 건지십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보내신 최후 최선의 방책이신 아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신 것을 믿으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의가 되어집니다. 이제 후로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 구원받은 자녀가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데, 의로우신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셔야 하는데,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대신하여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어달고는 ,그 아들을 보고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구원하시는데 곧 예수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되고,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구원이란 자기 공로를 통하여 얻어지거나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죄 용서와 사랑에 근거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율법이란 구원의 수단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자신의 의를 부정하라고 주신 것이요, 율법이 아닌 복음, 십자가의 복음,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의 피공로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참된 보화는 오직 복음입니다. 

여러분, 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리문답에 보면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그것을 범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서 죄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들이 죄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살아가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데 그 목적을 모르고 사는 것도 죄요, 그 목적을 따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들이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죄라는 것이 나쁘고 악한 줄 알면서도 그 죄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죄와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는데 일생 그 죄와 더불어 살아가면서 죄인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어서 죄인이요,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죄를 짓고 살아가는 죄인들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나타난 한 의”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21절 에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보실 때 율법으로는 도저히 의롭다 함을 받을 사람이 없으니, 다른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율법에 나타내셨고, 선지자들에게 일러주어 새로운 하나님의 구원이 도래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 외에 나타난 의라는 말은 “율법을 떠나서”, “율법과 무관하게”라는 뜻이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기에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전혀 다른 방법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죄 많은 인간,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여전히 심판의 자리에서 피할 수 없는 인간들을 생각하셨습니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반드시 죄를 벌하실 수밖에 없는 공의로우신 하나님, 그러나 그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며,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도 만족시키고, 사랑도 이룰 수 있는 길은 당신의 아들을 인간이 되게 하셔서 인간을 대표하고, 인간을 대신하여 죄 값을 치루고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인류를 대표하여 죽게 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 없으신 아들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삼으셨습니다.  
   
22절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는 이 구원의 진리를 이신칭의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는 선언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주님의 공로가 우리에게 미쳐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시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뿐이 없습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24절을 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우리 주님이 대신하여 죽으신 것으로 우리는 값없이 의롭다 하는 선언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25-26절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간과한다는 말을 잘 알아야 합니다. 간과한다는 말은 죄를 사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로마의 법정에서 사용하던 말이었습니다.  어떤 이가 유언을 하는데, 당연히 언급되어야 하는 한 사람을 그냥 지나쳐버린 것을 말합니다.  간과하심이란 중대한 문제를 제외시키고, 그냥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간과한다는 말은 “넘어간다”, “빠뜨리다”, “무시하다”, “주목하지 않고 통과하는 것을 허용하다”, “의도적으로 빠뜨리다”라는 말입니다.   반드시 처벌해야 하는 사람인데, 그냥 넘기시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나온 사람이기에 그냥 넘기시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그분이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죄인 사이에 서신 화목제물이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죄인을 처벌하셔야만 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곧 피를 흘리는 것이요, 피를 흘리게 하므로 생명을 거두는 것입니다.  생명을 거두실 때에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이 그 피를 흘리실 때에 의가 충족되었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고 인간과 화목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도 이루시고,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 앞에 선물을 받기 위하여 손을 내미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이루신 그 구원을 저에게도 주옵소서”라고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악의 늪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손을 밖으로 내밀고 구원의 손길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 믿어 구원받은 감격을 잃지 말고 예수만이 나의 참된 보화임을 알고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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