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네 이웃을 축복하라(2) (눅 6:27-33)

  • 잡초 잡초
  • 469
  • 0

첨부 1


네 이웃을 축복하라(2) (눅 6:27-33)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살아가는데 가장 큰 애로가 있다면 그것은 가난이고 배고픔일 것입니다. 가난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빼앗고 의욕을 잃게 하고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고 꿈을 잃게 합니다. 6̇・25 전쟁 후 우리나라는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때 얼마나 가난했습니까. 저는 어렸을 때이지만 그때 농촌에서 굶어 죽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때 굶주림이 무엇인가를 보고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때 구호물자라는 것을 받아 보았습니다. 그 시절 교회에 다닌 사람들은 다 그 구호물자라는 것을 받아 보았을 것입니다. 특히 미국에서 구호물자를 많이 보내주었습니다. 옷도 신발도 학용품도 탈지유도 보내주었습니다. 

오늘도 그렇게 구호물자를 받으며 살아가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서로 모여 살면서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옛날 농촌의 삶은 두레의 삶이었습니다. 일을 돕기 위해서 여럿이 품을 짜는 것을 두레라고 말합니다. 여럿이 함께 모여 식사하는 밥상을 두레상이라고 말합니다. 장례가 발생해도 온 동네가 함께 모여 도왔습니다. 한자로 사람 인자를 보면 서로 기대고 서 있는 폼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인간은 서로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상대가 있기에 내가 서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없으면 너도 넘어집니다. 너 없으면 물론 나도 넘어집니다. 고로 성경은 사람은 서로 돕고 함께 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함께, 더불어, 도우며 살아가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래서 말씀하기를 이웃을 사랑하라, 서로 도우라, 주라, 그리고 나누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단순히 나눔의 차원을 넘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강권하십니다. 

이 말씀은 산상수훈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직접 주신 교훈이고 강조하신 내용을 말합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을 교훈중의 교훈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주님의 가르침을 보면 내 것, 우리, 내 집, 내 교회, 내 나라라는 개념을 초월시키고 있습니다. 내 것을 너무 강조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나의 울타리와 벽을 훌쩍 넘어야 가능합니다. 내 곳간만 생각하면 나누지 못합니다. 내 입장, 내 체면만 생각하면 이웃에게 이 정신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주라, 나누라 그리고 그 차원을 넘어서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들의 실력으로는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우리들이 비록 예수를 믿고는 있지만 우리에게는 원수를 사랑할 만큼의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고민이 많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줄기차게 이 불가능한 요구를 하고 계십니다. 거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불가능할지라도 신앙 안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불가능하지만 신앙 안에서는 가능합니다. 그래서 요구하신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족한 사람은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없으면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넉넉 자는 나누고 함께 먹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왜 나에게 많이 주셨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나만 배부르게 싫도록 먹으라고 주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의미를 생각하고 이유를 생각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생각 없이 살아가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상상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삶에서 중요한 지혜는 내게 주어진 의미나 소명이나 몫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르면 내 안에 갇히게 되고 내 것에 집착하게 되고 내 입장만 강조하게 됩니다. 진정한 배부름은 나만 배부름이 아닙니다. 물론 내가 배가 불러야 하지만 너도 모두가 함께 배가 불러야 그것이 진정한 배부름입니다. 진정으로 성숙함은 나를 초월하는 것이고 나를 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를 생각하고 네 입장도 생각하는 것 그것이 성숙이고 그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미성숙 할 때는 내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외친 것입니다. 

“여기가 좋아오니”, 저 산 아래에 수많은 병자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말입니다. “내 두 아들을 예수님 좌우에 앉게 하소서”,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중인데 말입니다. “나는 예수를 모른다”, 지금 예수님은 고초를 당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코를 골며 잠을 잤다”, 지금 예수님은 피땀 흘리며 기도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모두 실패하고 후퇴한 것입니다. 성숙은 나를 넘어 너를 생각하는 것이고 주님을 생각하는 것이고 공동체를 우선 생각하는 수준입니다. 물론 나도 건강해야 하지만 그런데 네가 건강해야 곧 내가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네가 행복해야 곧 내가 행복한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가 자유로워져야 내가 자유하고 평안하고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서 그런 삶의 의미와 책임과 사명과 요령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몇 가지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 


네 이웃 돌보라 

본문 30절을 보면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라,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손해 보는 삶입니다. 즉 적자인생입니다. 우리들이 진정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도저히 흑자 인생을 살수가 없습니다. 우리 이웃들을 보면 아직도 의식주 때문에 고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보면 그냥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다 보면 언제나 적자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개중에는 전의를 상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숙자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삶에 전의를 상실하면 순간적으로 뇌의 기능이 마비되고 그래서 안 움직여진다고 합니다. 삶에 용기가 중요합니다. 돌봄에는 반드시 물질만 주는 것이 아니고 삶에 의지를 되찾게 해 주는 일도 무엇보다 더 좋은 것을 주는 삶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삶의 의지를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도 우리들이 관심을 가지고 돌볼 대상들입니다. 

비스마르크가 친구와 사냥을 갔습니다. 친구가 발을 헛디디어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허우적거릴수록 더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속수무책입니다. 도울 길이 없습니다. 마침내 힘이 빠져 탈출을 포기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친구가 도울 길은 없고 총을 겨누며 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제발 죽이지 말라”고 하더니 안간 힘을 써서 가까스로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왜 날 죽이려 했느냐”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말했습니다. “자네를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고 삶의 의지를 발휘하게 하려고 그랬네”. 삶에 의지가 참 중요합니다. 의지가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환란에서도 위기에서도 삶의 의지가 분명하면 빨리 탈출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암에 걸렸다고 다 죽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더 삶의 의지와 희망과 믿음이 있느냐에 따라 고칠 수도 있고 회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의지가 없으면 더 빨리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삶은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관계입니다. 있는 사람은 나누고 없는 사람은 도움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서로 나누라, 도우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먼 이웃도 돌보라 

가까운 이웃도 돌봄의 대상이지만 먼 이웃도 마찬가지입니다. 32절을 보면 “너희가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칭찬받을 일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같이 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내 가족, 내 가까운 이웃, 내 친척, 내 동포만 사랑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나와 상관없는 먼 곳에 있는 사람들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가까운 이웃인 동남아의 여러 나라들을 보면 참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동남아시아의 가난한 나라에서 온 노동자들이 많습니다. 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 까지 와서 땀 흘려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박한 월급을 받고 땀은 배로 흘리며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60년대 독일로 광부로 간호사로 그렇게 가서 일했습니다. 그때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분들이 참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이 처음 가서 살았던 이야기를 들어보면 눈물이 납니다. 또 70년대 중동에 건설 붐이 일어났을 때 우리 형제들이, 남편들이, 아들들이, 동생들이 뜨거운 사막에서 땀을 흘리며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모래 먼지를 마시며 일했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오늘 우리나라는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그렇게 와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70년대 외국에 나가서 일하던 우리나라 근로자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들을 너무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그들도 우리들이 도와야 할 우리의 이웃들인데 말입니다. 물질로 돕고 따뜻한 마음으로 도와야 합니다. 따뜻한 마음을 주는 것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좀 넉넉한 것은 그들을 도우라는 뜻입니다. 

또 우리나라가 좀 잘 살게 된 것은 그들을 도우라는 뜻입니다. 돕는 삶은 세 가지를 위해서 해야 할 일입니다. 먼저는 나 자신을 위해서 입니다. 나눔과 돕는 삶은 나의 삶에 행복이 주어집니다. 자원봉사를 하고 돌아올 때는 그 행복함이 주어지는 것은 그 때문 입니다. 두 번째는 너를 위해서 입니다. 너를 일어나게 하는 것은 내게 주어진 의무입니다. 세 번째는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분부입니다. 세상을 향하신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 32절은 “너희가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칭찬받을 일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같이 하느니라”고 강조하십니다. 


원수의 사랑 

본문 27을 보면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라”고 말씀합니다. 이웃에게 단순히 돕고 나누는 삶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광역의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너를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고 너에게 겉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구절을 보면 꼭 오늘 북한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오늘 북한 사람들은 우리의 원수이고 뺨을 때리는 사람들이고 속옷도 달라고 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생각할수록 얄밉고 뻔뻔할 수가 없습니다. 줘도 고맙다는 마음도 없습니다. 그리고 뒤로는 간첩을 보내고 위협하고 협박하고 군함을 파괴하고 그럽니다. 그러면서 또 달라고 합니다. 한껏 도와주면 저 뺨을 때리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우리들이 도와야 할 이웃들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는 짓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정이 떨어집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사람들이 우리 가장 가까운 이웃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도울 대상입니다. 

지금 북한사정이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주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부모를, 교회에서는 목회자를, 나라에서는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지도자가 실책하면 백성들에게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지금 북한이 그렇습니다. 지난 1994년에서 1998년까지 북한에서 300만 명이 굶어죽었다고 합니다. 그때 북한이 붕괴직전까지 갔었는데 남한과 주변국들이 도와서 겨우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주변국 누구도 북한을 도우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북한이 오죽 다급하면 군량미까지 풀어 나누어 주고 있겠습니까. 금년 7-8월이 되면 지난 1994년대와 똑같은 수준으로 굶어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거기다 현재 북한은 화폐개혁 후유증으로 온 나라에 불만이 고조되어 있습니다. 주민들이 상당히 저항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미연합사 소속 로버트 콜린스가 쓴 “북한 붕괴 7단계 시나리오”라는 글을 보면 지금 북한은 5단계에 와 있다고 합니다. 이대로 가면 7월 8월부터는 10명중 한 명꼴로 굶어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화폐개혁 이후 주민들이 김정일을 대놓고 욕하기 시작했고 북한 체제를 떠받치고 있는 보위부(정보부)인데 그들은 일반 노동자에 비해 수십 배의 월급을 받는데 요즘 월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조직이 흔들리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평양 노동당 지도원급들이 사는 아파트의 전기가 1997년부터 끊어졌고 38선에 배치된 정규 군단에서는 배급이 이미 끊어졌다고 합니다. 곡식을 실은 기차가 도중에 털리기도 하고 노인들은 평양역 부근에서 좌판을 놓고 담배를 팔고 있는데 단속반원들이 단속하면 김정일을 대놓고 욕하며 대들기 일쑤라고 합니다. 이 같은 내부사정을 어떻게 자세히 알 수 있느냐 하면 핸드폰 때문입니다. 현재 북한에는 핸드폰 사용자가 15만 명이나 되는데 핸드폰으로 각종 소식들이 생생하게 그날그날 남한에 있는 탈북자들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북한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몇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먼저 신앙적으로 염려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6·25때도 신앙적으로 기도하며 헤쳐 나왔습니다. 이 땅에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하나님께서 간과하시겠습니까. 지난날에도 하나님의 돌보심 속에서 지나왔습니다. 우리는 이점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경제력의 배경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는 경제적으로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자신감을 가져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전쟁억지력도 충분합니다. 지난날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이제는 충분한 억지력을 갖추었습니다. 이제 전쟁이 발발한다면 소총 들고 뛰어다니는 전쟁은 아닐 것입니다. 앞으로의 전쟁은 공군에 의해 좌우될 것입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때처럼 함정에 앉아서 버튼만 누르면 송곳이 박히듯 적 레이더와 진지에 파고들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핵을 가지고 위협하겠지만 핵을 싣고 이륙하는 전투기를 그냥 보고 앉아있을 시대가 아니지 않습니까.      

문제는 우리 국민들의 자신감입니다. 괜히 유언비어나 퍼트리고 북한 위협에 지레 겁이나 먹고 싸워보지도 않고 굴복하는 패배주의가 문제입니다. 우리민족이 얼마나 저력이 있습니까. 월드컵이 열리면 하루 밤에 10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세계 유일의 민족입니다. 서해안에 기름이 유출되었을 때 자원봉사자들이 120만 명이 서해안으로 달려갔습니다. 그중 80%가 기독교인이었다고 합니다. 추운 날씨인데도 모두 스스로 가서 기름때를 닦아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가장 놀란 나라가 중국입니다. 

이제 겨우 한국의 기술과 경제를 따라잡았다고 생각하였는데 그 모습을 보고 한국이 무서워졌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모두가 자원해서 서해안으로 달려갔으니 오늘 중국이 어떻게 그 흉내를 내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 우리 모두 국가관을 새롭게 해야 할 때입니다. 한편 철통같은 경계를 해야 하고 또 한편 북한 백성들을 먹여 살려야 합니다. 그들을 오늘 우리의 오른 뺨을 때리면 웃으며 왼뺨도 돌려 대는 심정으로 도와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저력을 보여주게 되고 그렇게 하면 언젠가 그 무지한 사람들도 깨우칠 날이 올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이 시대에 우리나라가 할 사명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본문은 아주 넓은 의미의 이웃 개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모욕하는 자를 선대하라,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속옷도 주라.” 얼핏 생각하면 불가능 한 말인데 그런데 성경은 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고민이 많은 것입니다. 고민하면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면 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불가능한데 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