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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가지 기도 (눅 9:2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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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기도 (눅 9:28-36)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가이사랴 여러 마을을 다니시는 중에 제자들에게 2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님은 이때로부터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셨다.’  주님이 당신의 수난에 대하여 세 차례 말씀하셨는데 첫 번째 말씀이 바로,  가이사랴 지방에 가셨을 때에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인  “이 말씀을 하신후에”는 가이사랴에서의 질문과 베드로의 신앙고백의 사건이 있은 후 자신이 십자가의 고난을 말씀하신 후에 라는 뜻으로,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①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마태와 마가복음은 ‘엿새 뒤’라고 하였고, 누가는 ‘여드레쯤 되어’, ‘팔일쯤’ 되었을 때에, 변화산에 올라가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차이는 큰 차이가 아니며, 그런 소소한 차이점이 있다고 하여 사건을 부정할만한 수준도 아닙니다. 아마 누가는 신앙고백한 날과 산에서 내려오신 날을 다 포함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의 차이는 성경에 몇 번 나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갈릴리를 바다(海)라고 표현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호수(湖)라고 표현을 합니다. 여러분, 민물인 갈릴리는 바다인가요, 호수인가요? 마태는 평생을 유대 땅에서만 살았습니다. 그에게 넓은 갈릴리는 바다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바울사도와 함께 온 세상을 여행한 사람이며, 지중해를 배타고 다닌 사람입니다. 누가에게는 갈릴리는 호수입니다.  또 홍수가 나는 것도 다릅니다. 

여러분 이제 여름 장마 시즌인데 홍수는 어떻게 오나요?  (마7;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마태복음은 비가 오고, 창수(=홍수)가 나고 바람(=태풍)까지 불어 집이 무너지는 자연재해를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홍수피해와 같지요? 그러나 같은 내용의 말씀을(눅6;48,49)“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49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친다 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는 잘 이해가 안 됩니다. 비(雨)도 없고 바람(風)도 없는데 어디서 집이 무너질 만큼의 탁류를 일으키는 큰 물이 나오나요?  이것은 유럽지역의 홍수현상을 말합니다. 유럽지역의 홍수는 대부분 산에 있는 눈이 녹아서 그 눈 녹은 물이 마을로 흘러와서 생기는 피해입니다. 우리나라 처럼 태풍이 불고 많은 비가 오는 홍수가 아닙니다. 마태는 유대인을 위해 성경을 기록했기에, 누가는 이방인을 향해서 쓰여 진 복음이기에 이방인인 유럽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표현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이런 차이점을 이해하면 성경이 더 깊어지고, 더 은혜가 됩니다. 그러나 이런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이 이상하다, 성경이 틀리다 하는 말을 합니다. 

 ②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따로’라는 말은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구별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세 제자만을 데리고 가시는 것이냐?  예수님께서 사람을 편애하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를 데리고 가시고, 누구를 남기는냐 하는 것은 누가 결정합니까? 예수님이 생각하시고, 예수님이 결정합니다. 이런 것은 예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혼자 가시든, 세 제자만을 데리고 가시든지, 열둘을 다 데리고 가시든지, 그 것은 예수님의 생각이 있으신 것이며, 예수님이 그렇게 생각하시고, 그렇게 행동하시면 그것은 옳은 일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에 아멘하는 습관을 배워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사람들은 비판하고 짜증내고, 왜 이렇게 하시지.. 맘에 안 들어...합니다.  누구 마음에 안 드나요? 내 마음에 안 듭니다. 내가 하나님위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기준이 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기준인 세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인 세상이며,  힘만이 최고인 세상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해지고, 얼마나 죄가 많은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기준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기준입니다. 우리는 아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③ 구약성경에서는 민사, 형사사건을 다루며 증인을 세울 때는 반드시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신19:15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 제자들은 변화산 기적에서 주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경험하지 못할 큰 영광스러운 경험을 했습니다.  

성도여러분,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은 큰 증인이 됩니다.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기에 증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큰 책임도 받게 됩니다. 실제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초대교회의 초석 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크게 쓰임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이왕이면 큰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혜 받은 만큼 증인으로 봉사하기 위해서입니다. 큰 은혜 받은 만큼 더 크게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임을 받고 싶어서, 더 많은 일을 하는 귀한 일꾼이 되겠다고 하는 마음이라서 그런 것입니다. 은혜(恩惠)가 나 혼자로서 끝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단지 욕심(慾心)일 뿐입니다. 청년여러분들은 특히 이런 마음으로 더 큰 은혜, 더 큰 사명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을 요구하시는 청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④ 오늘 본문인 누가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는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눅9:28)“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 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기도하러” 올라가셨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 받고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실 것을 생각하시면서 이 대속의 십자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으시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어려운 문제를 앞에 놓고 기도하셨고,   중대한 결단에 앞서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지금도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사” 라고 성경이 말합니다.    

또 언제 용모가 변화되나요?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합니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었습니다. 기도(祈禱)가 강조되어있습니다.  혹시 지금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중대한 결정을 앞에 두고 있습니까?  우리 주님을 본받아 기도하셔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변화되신 것을 보면 먼저 얼굴이 변하였습니다.  그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났습니다. 또 예수님의 옷이 변화되었는데, 빛과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입으신 옷이 변화되었는데,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빨래하는 사람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중에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기도는 변화를 불러옵니다. 기도하면 환경이 변하고 상황이 바뀝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마음이나 상대방의 마음이 변합니다. 생각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뀝니다. 기도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포기하거나 절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⑤ 이때에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가 그 자리에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선지자를 대표하는 엘리야가 나타나서 말씀을 나누신 것은 대단한 의의가 있습니다.  

*모세는 옛날에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습니다.  
*모세는 장차 메시아를 보내신다고 예언을 한 사람입니다.  

신18:15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메시야의 선구자입니다.  

말4:5에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활동은 예수님이 오실 것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은 예수님인 것을 확정하시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언한 두 사람이 나타난 것은 사람이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반드시 우리 주님이 대속의 죽음을 죽어야만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씀을 확인하는 사건입니다.  구약의 모든 계시는 예수님에게 성취되고 있습니다.  

⑥ 그러면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무슨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눅9;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예루살렘에서의 별세라고 하셨는데, 그 별세라는 말은 곧 십자가의 죽으심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원어로 보면 ‘엑소도스’라고 하여 나감(going out), 출발(departure)이란 뜻입니다. 구약의 출애굽을 영어로 ‘엑소도스’라는 말로 씁니다.   즉 죽음이라는 것이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류를 죄악 세상으로부터 나가게 하는 사건이 되고, 천국으로 출발하는 시작이 됩니다.  십자가는 또 죽음은 끝장이 나는 것이 아니라 출발이요, 탈출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대해서, 또 죽음에 대해서 성경적인 생각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 때 잠들어 있던 베드로와 제자들이 깨어났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무슨 말씀을 나누는지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주님이 세상을 떠나가시는 죽으심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 대화를 들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떠나려고 하시는 것을 보면서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을 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17:4)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베드로의 이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무슨 말씀을 나누는지 들었습니다.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했으니 그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인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산 위에 머무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들었지만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는 우선 눈에 보이는 이 영광스러운 상황속에 거하고 싶었고, 이렇게만 계속 살고 싶었습니다.  성도여러분, 만약에 베드로의 기도처럼 된다면, 십자가는 어떻게 됩니까? 산 아래에 고통 받는 수많은 영혼들, 죄악으로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많은 영혼들은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어떻게 되나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것은 베드로의 관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모시고 영광중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었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수종들 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습니다. 이런 기도는 나쁘거나 악한 기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못하는 기도입니다. 구속의 역사는 잊어버린 것이고, 나의 행복, 나의 소원만을 생각하는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가 가장 나쁜 기도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렇게 내 문제만을 보고, 나의 평안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도  베드로와 같이 하나님의 경륜은 무시하고 인간적인 행복과 영광만을 내세웁니다.  나만 좋으면 되고, 나만 행복하게 되면 되고, 내 문제만 해결되면 다른 사람은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17:5)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자기의 마음을 말하기보다는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소원을 고집하면서 오직 영광중에서만 살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태도가 아닙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여기 많은 부모님들이 계십니다. 언제 가장 기쁘고, 언제 가장 영광스러우신가요?  자녀들이 잘 될 때 아닌가요? 월드컵에서 박지성선수가 한골 넣으면 누가 가장 영광스러울까요? 본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선수의 부모가 가장 영광스럽습니다. 어려서 초등학교 때부터 국가대표요 월드컵출전선수로 키우기까지의 모든 고생이 몽땅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고난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영광입니다.      

우리는 변화산의 사건을 통하여 십자가를 다시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십자가는 영광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십자가를 위하여 기도(祈禱)하려 산에 가셨을 때, 그때 주님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고, 또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의 고난을 나누어 짊어져야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래야 나 때문에 다른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탈출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아야 가능합니다.  베드로의 기도가 아닌 예수님의 기도를 할 때, 우리의 인격은 변화되고, 심지어 얼굴도 용모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 처럼 당장의 영광스러운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으려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산 아래 질병과 고통이 넘치는 삶의 현장으로 내려가야만 합니다.  우리가 예루살렘을 향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졌는지, 산위에 초막 셋을 짓고 영광중에만 계속 거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는지를 돌아보는 이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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