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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목표, 두 흔적 (갈 4:19, 갈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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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목표, 두 흔적 (갈 4:19, 6:17)

소 엉덩이를 볼 것인가?  미루나무를 볼 것인가?

아들이 소를 몰고 아버지와 함께 밭을 갈러 갔습니다. 아버지가 밭 가는 것을 먼저 시범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반듯하고 보기 좋고 일하기 좋게 일직선으로 잘 갈렸습니다. 이번에는 아들이 쟁기를 메고 갈았습니다. 그런데 삐뚤빼뚤 다시 갈아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설명해 주었습니다. 
“아들아, 너는 소 엉덩이를 보고 앞으로 나갔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이리 실룩 저리 실룩 소 엉덩이가 움직일 때마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삐뚤빼뚤 갈렸던 것이야.” 

어떻게 하면 되냐고 아들이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말합니다.  
“바로 눈 앞의 소 엉덩이를 보지 말고 저 끝 밭두렁에 서 있는 미루나무를 보고 갈아 보아라.”
아들은 눈을 들어 밭고랑 끝에 있는 미루나무를 바라보면서 전과 똑같이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뒤를 둘아다 보니 아버지가 간 것처럼  반듯하고 보기 좋고 일하기 좋게 일직선으로 잘 갈렸습니다. 

신앙과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듯하고 보기 좋은 인생은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때로는 큰 돌부리, 단단하게 굵은 흙덩이 같은 환경을 만나도 목표가 분명하면 다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목표

그래서 예수님은 막8:36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셨습니다.  친히 목표를 분명히 설정해 주신 것입니다.
단기 목표도 중요합니다. 대학을 가고, 취직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 물질도 있어서 궁색하지 않게 사는 것,  다른 사람을 도우며 사는 것 복입니다. 그렇게 되십시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단기 목표입니다. 혹 이런 것에만 연연하면  삐뚤빼뚤 엉망되기 쉽습니다. 장기 목표가 필요합니다.  장기 목표가 바르게 세워지면  단기 목표도 자연스럽게 바르게 세워집니다. 공부하고 돈벌고, 지위와 명예를 왜 얻는지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목표는 그래서 [예수생명 예수풍성]입니다.  주님은 이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주님은 매 순간마다 이를 분명히 말씀하시면서 일하셨습니다.  (막 1: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생명의 복음을 전하시고 사람을 살리시려 오셨고, 여기 저기 다니셨습니다.  

바울의 두 목표

주 예수님 만난 바울은 평생의 목표가 달라졌습니다.  죽이는 일에서 살리는 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목표가 되었고 복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① 영적 출산. - 예수생명

예수님께서 사람은 누구나 두 번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3:3을 보면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는지’ 놀라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계속해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6절)”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 배에서 나오는 육으로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적인 출생입니다.  성령 하나님으로 거듭나는 것이 영으로 난 것으로 영적인 출생입니다.  5절을 보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고 하셨는데,  물은 어머니의 자궁의 양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고 그래서  첫 번째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성령으로 나야하고, 이것이 두 번째로 나는 것이고 이 두 번째로 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성령으로 난다는 말씀은 십자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일련의 과정이 성령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고전 12:3을 보면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또한 그렇게 우리 안에 성령님이 들어와 거하시며 살고 있습니다(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높이 나는 새가 더 멀리봅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땅의 것 가지고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새생명으로의 출생은 가장 귀한 삶을 살기 위한 출발점입니다.

바울이 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배운 것 가지고 사람 잡으러 다녔지만, 이제는 배운 것 가지고 생명을 낳으러 다녔습니다. (고전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생명은 가르쳐서 얻을 수 없습니다. 생명은 낳는 것입니다. 지식으로 되지 않습니다. 지식이 많으면 정죄하기 쉽고 가르치는 선생되기 쉽습니다. 바울은 영적 아비가 되어 복음으로 한 영혼 한 영혼을 낳았습니다.  

② 영적 양육. - 예수풍성

바울은 낳아만 놓고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신령한 젖인 하나님 말씀도 먹이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성장하도록 온 힘을 다하여 양육했습니다. 

(갈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해산할 때 죽었다가 깨어납니다. 허리가 끊어지고 온 몸의 뼈가 빠졌다가 다시 맞춰집니다.  그런데 첫 번째 해산은 한번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핏덩이를 사람으로 키워내려면 한번만 죽었다가 깨어나지 않습니다. 아플 때는 옆에서 같이 아프면서 밤을 새웁니다.  사고라도 치면 수습하느라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좇아 다닙니다.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더 크다는 말이 이해갑니다. 모든 아버지 어머니가 위대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2천년이 지났지만 바울이 위대한 삶을 살았다고 우리들은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흔적이 필요합니다. 

생명은 낳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낳아 놓고는 그 다음 가르칠 수 있습니다. 양육은 1차적으로 가르치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세계에서도 최고의 교육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사람이 진정 변화시키는 것은 가르치는 것으로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으로 되었다면 공부 많이 한 이들, 학위 받은 이들은 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단적인 예는 배운 사람들이 생명은 더 낳지 못합니다.  출산률은 학력이 올라갈수록 떨어집니다. 이유는 자기 편하자고, 좋은 말로 하면 자기 성취하려고. 더 많이 배우면 돈은 더 많이 벌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기적이기 쉽습니다. 

이것은 많이 배운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죄성이 있기에 배워서 알면 그것으로 더 영악해 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낳고 생명을 낳을 수 있는 온전한 한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둘 다 해산하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믿는 이들에게 편지하기를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했습니다.  

해산하는 수고, 이것이 흔적입니다. 희생입니다. 헌신함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공부시켜 주어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공부시키느라고 고생하는 것을 보고,  녹초가 되고 파김치가 되어진 것을 보았을 때, 그 마음에 감동을 받고, 뭉클한 것이 올라오고,  고맙고 감사하고 그래서 생각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고 비로소 사람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교회에 이런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까? 요즘 한국의 교회가 예전 같지 않다, 고 염려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생명의 출산과 양육을 위한 희생과 섬김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서입니다. 
한국의 교회가 이만큼 성장한 것은 희생과 헌신, 그리고 순교의 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보고 사람이 감동을 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감동을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여지니 사람도 환경도 모두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우리교회 갈라디아서 큐티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며 결론이 오늘 말씀입니다.  바울 주변에는 적대자가 항상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꾸 십자가의 복음을 왜곡하고 희미하게 하게합니다. 율법을 행하고 할례를 행하라고 요구합니다.  자기들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1:10)고 적대자가 되어 바울의 사도권을 흔들어 댑니다. 
바울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3:11)고 편지하면서 마지막으로 6:17을 선포합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① 예수생명 - 십자가 복음의 흔적.  

바울이 가진 예수의 흔적은 생명을 위한 영적 출산의 흔적입니다. 2:20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산 것입니다. 주의 십자가를 몸에 새겼습니다.  그리고 6:14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사람의 행위나 방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기에 십자가만 전합니다. (고후 4:10-11)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예수생명을 얻기 위해 십자가 복음으로 낳는 해산의 흔적을 가졌습니다. 

② 예수풍성 - 교회를 위한 흔적.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교회를 세우기 위해 다시 해산의 흔적을 가졌습니다. (골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래서 행14장에서는 돌에 맞아 공동묘지에 버려졌고  행16장 옷을 찢어 벗기고 곤장으로 볼기를 맞았고  고후11장 세 번 파선하고 일주일을 깊은 바다에서 보냈고 여러분 굶주리고 춥고 헐벗었습니다. 
바울은 몸으로 거룩한 산 제사를 드렸습니다. 주님께 드린 흔적을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바울 때문에 세계가 살았고, 저와 여러분이 살았습니다. 

뒤 늦게 시작한 나

우리교회 여러 성도님들에게 생명을 위해 드려진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십니다. 다 흠양하셨습니다.  지금도 역사하고 계시고 앞으로도 역사하실 것입니다. 
목사는 교회를 위해 무엇인가 흔적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장풍교회에선 결혼패물을 드려 땅을 사고 메주 쓰면서 교회 주택을 짓다가 허리를 다쳐 수술을 했고 아직 후유증이 있지만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생각하니 기쁨이 있습니다.  

제가 부임한지 만5년째입니다. 여러분보다 늦게 서연교회에 지체가 되었습니다.  바울처럼 만삭되지 못해 난 것같은 제가 맨 나중에 교회를 섬기게 된 것이지요. 출발이 늦은 우리는 행여 뒤쳐질까, 부목사 10년 한 퇴직금 전부를 드렸고, 307호 살 때 힘에 진하도록 거름이 되도록 쏟았습니다.  이 흔적도 주님이 여러분의 흔적과 함께 받으셨을 것입니다. 

선교의 피흘림

이기풍 목사님이 제주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생명을 구원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힘들어 포기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제주도로 파송한 마펫 선교사에게 돌아가겠다고 편지를 섰습니다.

마펫 선교사님의 답장이 왔습니다. 평양 시장통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이기풍 청년이 돌을 던졌습니다.  마을에서 돌싸움 제일 잘하는 청년이 국운이 기울어 가는 것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해, 외국인에게 돌은 던진 것입니다. 당시의 깡패는 의분이 있었습니다. 돌은 정확하게 턱에 맞아 찢어져 피 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런 이기풍을 찾아가고 사랑하고 권면해서 목사가 되게 했고, 제주도 1호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답장에는 ‘그 턱의 피가 아직도 흐르고 있는데,  힘들다고 포기하고 돌아오려고 하느냐!’고 써 있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그 편지를 받고 눈물로 기도하며 제주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의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복음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에 예수의 흔적이 남아야 합니다. 우리의 이마에 주님의 몸된 교회의 땀 자국이 남아야 합니다.  우리의 눈에 영혼을 위한 눈물 흔적을 하나님은 보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준비하기 위해 결혼자금 옥합을 깨 주님의 머리에 부은 것을 주님은 복음과 함께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마 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서연교회 이명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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