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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은혜를 아는 사람의 감사 (시 3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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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아는 사람의 감사 (시 30:1-12) 

 
[존 J. 잉글리시]라고 하는 사람이<영적 자유(Spiritual Freedom)>라고 하는 책에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사랑의 경험이다” 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악랄해지고 패륜적인 범죄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모두가 그 공동체속의 일원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반인륜적인 살인사건들을 보면서 알게 되는 사실이 그 일을 저지른 사람이 공히 사랑의 결핍이라는 공통적인 문제들을 안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어릴 적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성장했다든가, 아니면 나는 사랑한다는데 상대방이 사랑한다 하지 않아서 앙심을 품고 살인을 저질렀다고 고백합니다. 이 사실들로 미루어보아 역시 인간은 사랑을 받아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공부를 많이 하면 인간 되는 줄로 생각합니다만 실상은 공부를 많이 한다고 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환경이 좋아지면 사람 되겠지 합니다만 어려운 환경이 조금 나아진다고 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가하면 찢어지는 가난 속에 살다보니까 인격적으로 모순이 있겠지 싶어서 좀 잘살게 되면 달라지겠지 합니다만 물질이 풍족해졌다고 사람이 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까? 극히 드뭅니다. 이것을 보면 사람으로 사람 되게 하는 것은 이런 유의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정말 사람을 사람 되게 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을 오직 사랑의 경험뿐이라고 [존 J. 잉글리시]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주 뜨겁고 확실한 사랑이나 아주 절대적인 사랑을 경험하게 될 때에 달라진다고 합니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할 수 있을 만큼의 화끈한 사랑을 경험하면 사람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랑의 경험이 있습니까? 

흔히 젊은 남녀가 연애를 하던가 하다 못해서 짝사랑을 하더라도 사람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세수도 안 하던 사람이 매일 샤워를 하는가 하면 수시로 거울을 들여다보며 치장을 하는 것에서부터 까칠한 성격도 부드럽게 바뀐다고 합니다. 이 정도의 경험은 아마 젊을수록 다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랑도 못해 봤다면 그 사람에게는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드리는 말씀은 여러분의 연애의 경험이 얼마나 화려하고 화끈했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자 하나님을 향해서 아주 절대적이고도 화끈한 사랑을 경험했느냐는 것을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후에 내가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정말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것, 그것은 사랑의 경험뿐입니다. 그 속에 감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행복이 있고 삶의 의미와 보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늘 묻는 질문입니다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인간의 성공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이 가졌다는 것이 성공의 척도입니까? 많이 배웠다고 그것을 성공을 여기십니까? 세상권세를 누렸다고 성공으로 생각하고 만족하십니까? 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문제는 감사에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감사의 가치, 감사의 의미, 감사의 이유까지를 다 알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감사할 수 있느냐? 어디까지 감사할 수 있느냐? 얼마나 충만한 감사 속에 살고 있느냐? 더 나아가서 감사로 생을 마감할 수 있느냐를 보면 그 사람의 성공여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 마지막 죽는 순간에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고 성공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도 중요합니다만 마지막 죽을 때에 “감사합니다.”하고 죽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우리 한국 문화는 예로부터 양반문화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다른 측면으로 체면문화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 사회생활 전반에 깊이 뿌리박혀서 때로는 잘못된 문화 의식으로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나 혹은 어린 사람, 아니면 지위적으로 자기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감사하다고 하든지 고맙다고 하면 내가 낮아지는 줄로 생각하는 잘못된 생활 철학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다는 말이 “말 안 해도 다 알지 뭐 그걸 굳이 말해야 아나!” 그러고 있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상대방에게 고맙다고 하는 순간, 그는 높아지고 나는 낮아진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이것을 보고 공자로부터 온 유전적인 병이라고 말합니다. 유교사상에서 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체질이 감사를 모르는 체질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고맙다는 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합니다. 생전 안 해봤으니까요. 고맙다고 하는 순간 내가 없어지는 것 같고 내가 비하되는 것 같고 내가 망가지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으니 그 입에서 무슨 감사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한 번도 고맙다는 말 감사하다는 말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아니지요. 오히려 작은 일에도 고맙다고 하면 그 순간 자신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아, 이 사람은 이 자그마한 일에도 저렇게 감사를 할 줄 아는 인격이 있는 사람이구나!’ 내 인격이 이렇게 높이 올라가는데 그것을 모르고 체면만 따지고 앉아 있으니 한심합니다. 결국 그 체면 때문에 감사를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아주 뿌리 깊은 병통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봐야합니다. 사랑의 경험이 감사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사랑의 경험자로서 마땅한 감사가 흘러 나와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못한다는 것은 왜일까요? 아마 두 가지 이유일 것입니다. 받은 사랑을 알지 못하고 있든가 아니면 내가 가짜 사랑을 하고 있는 것, 둘 중에 하나입니다. 

성숙한 인간일수록 그 순간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고 감사 앞에 내가 겸손하게 됩니다. 감사로 인해서 체면이 손상 되거나 감사 앞에 갈등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유해집니다. 그 사람의 인격을 알려면 그 사람의 감사생활을 보면 됩니다. 더 나아가서 그 사람의 신앙을 보려면 그 사람의 감사생활을 알면 됩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이렇게 말합니다. “감사는 은혜에 대한 마땅한 응답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은혜를 알고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에 대한 마땅한 응답으로 감사가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은혜를 먼저 돌아보아야합니다. 감사가 없는 사람은 은혜도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적 차원의 감사가 우리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감사는 어떤 차원의 감사입니까?

오늘 본문은 다윗이 인생 말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가운데 지금까지 자신을 보호하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노래한 감사 찬양입니다. 온갖 위험과 시련 속에서 혹은 정신적인 아픔까지도 치유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시입니다. 다윗은 이 모든 것이 엄청난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에 감사하는 것은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할 은혜에 대한 감사임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은혜적 차원에서의 감사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과 다를 바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자신을 돌아봅시다. 누구입니까? 거창한 신분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은혜를 받은 자들임에 분명합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은혜를 아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은혜적 차원의 감사가 무엇인지를 알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감사의 차원적인 문제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마땅히 감사할 줄 아는 첫째 차원이 무엇인가 하면 받은 바를 아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은 받은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마음속에 감사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 내가 준 것이 많습니까? 받은 것이 많습니까? 내가 준 것이 큽니까? 내가 받은 것이 큰 것입니까? 내가 받은 바를 알아야 그것이 감사로 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빼앗은 것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그 얼마를 얻어내려고 소리 지르고 윽박지르고 하느라고 마음이 황폐해집니다. 그 심정이 망가집니다. 그렇게 해서 얻었다고 한들 여기에 무슨 감사가 있을 수 있습니까? 

공산주의가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본이 없어서도 아니고 기술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감사가 없어서입니다. 공산주의에서는 모든 게 쟁취한 것입니다. 가끔씩 데모하면서 머리에 띠를 두르고 혁명, 쟁취, 투쟁, ....합니다만 여기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미래도 없습니다.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자신이 잘났다고 하는 사람에게도 감사가 없습니다. 자신이 받았다는 생각이 없고 자신이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감사란 내가 받은 바를 아는 사람의 것입니다.

감사의 두 번째 차원은 깨달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많이 은혜 받았다고 많이 감사하는 게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해야 옳겠지요.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물질적으로 풍성함을 누리게 하신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정말 부럽다 할 정도로 물질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헌금 드리는 것도 혹은 구제하고 베푸는 것도 인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아무리 봐도 특별나게 하나님이 그 가정에 뭐 풍성한 것을 준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늘 감사하면서 베풀기도 잘하고, 하나님 앞에 헌금도 십일조는 철저히 하고 감사헌금도 넘치게 하고 선교를 위해서, 구제를 위해서 아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몸으로 하는 교회 봉사도 부지런히 잘합니다. 그걸 보면서 사람은 은혜 받은 만큼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희한하게도 깨닫는 부분만큼만 감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는 의식과 감성이 합쳐져서 지성과 감성이 통합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이 말이 감사는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감사는 전인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깨닫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있고 의식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아십니까? 그래서 깨달음은 빠를수록 좋은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서보다 젊었을 때, 몸이 아플 때보다 건강할 때 빨리 깨닫는 것이 복입니다. 그러고 싶어도 그러지 못할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할머니 세 분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주제는 건망증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깜박깜박하는 바람에 못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할머니가 먼저 이야기합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가 누우려고 앉았는지 일어나느라고 앉았는지를 모르겠어!” 그럽니다. 

그러자 다른 할머니 한 분이 “나는 계단 중간에 쉬면서 올라가다가 쉬는 중인지 내려가다가 쉬는 중인지를 모르겠어!” 그럽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 번째 할머니가 “어이구 할망구야 그것도 몰라!”그러면서 손으로 다른 할머니의 머리를 꿀밤을 주자 머리에서 똑똑 소리가 나는 것을 보고 문 쪽을 보면서 “거 뉘시오!”하더랍니다. 

사람에게 깨달음이란 쉬운 것 같으면서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기회란 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깨달음의 기회를 주실 때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시간적인 것이든, 환경의 문제이든지 간에 기회가 있을 때 곧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시를 적고 있는 다윗의 삶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런 가운데 특별히 7절을 보면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았던 자신의 과거에 기초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을 때에는 견고한 산과 같이 든든했던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을 때에는 말할 수 없는 근심 속에 빠지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소중함을 깨닫는 귀중한 고백입니다. 이 은혜를 잘 알기에 영원히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쉬지 않고 입을 벌려 찬양하겠노라는 고백으로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께 받은바 은혜를 알고 계십니까? 지금까지 그 은혜 속에 살아왔고 지금도 그 은혜를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아마 앞으로도 그 은혜를 누리고야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에 대한 마땅한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응답이 무엇입니까? 네, 바로 감사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절을 맞았기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감사의 명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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