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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없이는 (민 14:3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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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없이는 (민 14:39-45) 


1. 위태로운 삶, 위험한 인생 

1971년에 제작된 <지붕 위의 바이올린(Fiddler on the Roof)>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는 아주 유명한 명장면으로 시작하는데요. 그것은 붉게 물든 지평선 위로 태양이 떠오르고 쭉 뻗은 지평선의 한 뾰쪽한 종탑 위에서 검은 실루엣의 한 남자가 위태롭게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장면입니다. 영화의 제목과 이 장면이 상징하는 것은 “인생이란 것이 이렇게 위태로운 것이다”였습니다. 동의가 되십니까? 

그런데요, 이 영화처럼 인생을 위태롭게 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는 많습니다. 혹시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이런 경험을 해보신 적은 없습니까? 차가 하나 쌩하고 지나가는데, 무슨 일이 그렇게 급한 지 속도 제한을 무시하고 과속으로 달리는 것을 보면서, ‘죽으려고 작정했구만!’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던 경험이 여러분에게도 있을 것입니다. 일전 미국에 갔을 때, 자동차 두 대가 마치 자동차 경주라도 하듯이 고속도로에 길게 늘어선 자동차들 사이로 곡예 운전을 하면서 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 깻잎 하나 차이로 앞차와 옆차를 비껴가면서 운전을 했습니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지요.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굳이 이런 과속 운전이나 곡예운전이 아니더라도 인생을 그렇게 위험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주 오래 전 뉴스입니다만, 어느 남자가 같은 동네에서 두 살림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 불륜의 관계를 본 부인 모르게 수년 동안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는 새벽마다 운동하고 곧바로 출근한다면서 집을 나갔는데요. 그가 운동을 한 곳은 둘째 부인의 집이었고, 거기서 지내다가 바로 출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위태로운 삶은 결국 탄로가 나서 그 남자는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스물다섯 살 아가씨가 유부남을 사랑하여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그 남자에게 집착하다가 결국 그 남자의 가정도 자신의 인생도 모두 망가진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성경은 이상에서 말씀드린 것보다 더 위험하게, 더 위태롭게 사는 인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을 그토록 위험하게 사는 것일까요?

2.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1) 이스라엘의 죄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앞 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앞세우셔서 430년간 애굽의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그들이 출애굽한 목적은 하나님께서 그 조상 아브라함에게 “이 땅을 너의 자손에게 주마”고 약속하셨던 바로 그 땅에 들어가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을 축복의 땅이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하시면서 기대와 소망을 품고 거기로 향하도록 하셨습니다. 애굽을 떠난 지 약 1년 6개월 만에 가나안 땅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지난 1년 6개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난 일들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할 일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들을 출애굽시키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얼마나 全能하신지, 그리고 자신들을 어떻게 인도하고 보호하시는지, 그리고 자신들의 대적들이 어떻게 무기력하게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앞에 굴복하는지를 보았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보호하심 때문에, 이스라엘은 아직도 천한 노예의 티를 벗지 못했고, 아직 자기 땅이나 나라 등을 갖지 못한 채 떠돌아다니는 신세에 불과했지만, 주변 나라와 민족들이 두려워 떠는 무시 못 할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디 그 뿐 입니까? 지난 1년 6 개월 동안,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먹고 마셨습니다. 천상의 음식인 만나, 바람이 실어다 준 메추라기 고기, 반석에서 솟구치는 샘물! 이와 같은 특별한 복을 누린 민족은 아직까지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가나안 땅이 눈 앞에 보이는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을 정탐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것이 받아들여져 각 족속의 대표인 족장들이 40일간 가나안 전역을 정탐했습니다. 정탐한 결과, 그들이 보고한 것은 2가지였습니다(13:25-33). 먼저 정탐꾼 중 10명은 “그 땅은 비옥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며 또 정말 아름다운 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로 들어갈 수 없다”고 보고했습니다. 그 이유는 오래전부터 그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원주민들은 신체가 장대한 巨人이며, 싸움에 능한 勇士들이요, 그들이 사는 성읍들은 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준비가 잘된 堅固한 城邑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이스라엘은 별도로 훈련되고 조직된 군대도 없고, 무기도 없고, 전쟁 경험도 없고, …, 그래서 이스라엘이 그들과 싸워봤자 마치 거대한 巨人과 그 발밑에 짓밟힐 메뚜기와의 싸움과 같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질 것이 뻔한 싸움, 아니 아예 싸움 자체가 성립될 수도 없는 싸움을 왜 하냐?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2명의 정탐꾼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빨리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우리가 충분히 이길 수 있다(13:30)”고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눈이 있고, 귀가 있고, 판단하고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 역시 가나안의 견고한 성읍, 거인 용사들, 그들의 무기 등을 보았습니다. 싸워봤자 싸움도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에게는 다른 10명의 정탐꾼과 다른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살아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 신앙 때문에 그들은 “올라가서 싸우자. 그러면 이길 것이다”고 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보고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첫 번째 보고를 선택했습니다. 비록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 선조들의 생애와 신앙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땅이긴 하지만, 現在 자신들로서는 역부족이므로, 안타깝고 아쉽기는 하지만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결정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내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온 백성들은 “애굽에서의 영광스러운 탈출과 미래의 꿈”을 망각한 채, 졸렬한 감정에 치우쳐 어린아이처럼 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통곡했습니다(민14:1~3). 

그리고는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민 14:2~3)” 그러더니 “모세 아닌 다른 지도자를 세워 그와 함께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민14:4). 여러분,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그렇게 낯선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습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안정되고 편한 방법을 택하고 그런 길을 가려고 합니다. 어느 사람이 어린 자녀들이나 연세드신 부모님을 모시고 불안한 길을 모험하듯이 가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에 대해 대단히 실망하시면서 엄청 화를 내셨습니다. 왜 화를 내셨을까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적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10 가지 재앙 가운데서 출애굽한 것에서부터, 홍해를 건넌 일,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밤낮으로 자신들의 앞길을 인도한 일, 그리고 만나와 메추라기 …. 정말 지난 날은 매일이 기적의 날이었습니다. 날마다 은혜였습니다. 살아도 은혜요, 잠들어도 은혜요, 꿈결에도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가나안 땅에 원주민들이 살고 있으며, 그들이 건장한 거인들이라는 사실 앞에서, 벌벌 떨면서, ‘들어갔다가는 십중팔구 죽을 테니 빨리 돌아가자’고 외치며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모세와 아론이 아닌 다른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며, 하나님께 거역할 구체적인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원망과 불신이 절정에 달한 모습이었지요.

이렇게 불신앙에 빠진 온 회중을 본 모세와 아론은 그들 앞에 엎드렸습니다. 무릎 꿇어 사정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정신을 차려서 살아계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전쟁에 능한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요. 그런 중에 12정탐꾼의 일원이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옷을 찢으면서 회중에게 호소했습니다. “우리가 들어 갈 땅은 정말 아름다운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우리를 얼마든지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전쟁의 이기고 지는 것은 이스라엘이나 가나안 거민의 전투력, 담대함, 무기에 있지 않고 창조주이시며 전능자이신 여호와에게 달렸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 가나안 사람들을 두려워 하지말자.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리고 지금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모습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니 “제발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자”고 사정하면서 백성들을 일깨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돌을 들어 모세와 아론을 치려했습니다. 그들의 불신앙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은 다시 한 번 크게 화를 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11~12)?” 그러시면서 이스라엘을 멸하고 대신 모세로 강한 나라를 이루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그때 모세의 간절한 중보기도가 이어집니다(13-19). “만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하시면, 애굽인과 가나안 사람들이 하나님을 조롱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이 약속한 땅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들일 능력이 없어서 그랬다고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비하신 하나님이시여, 부디 이 어리석은 백성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2) 이스라엘이 받은 징벌

모세의 간절한 중보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징벌은 분명히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심과 온 땅에 충만한 영광으로 맹세하여 말씀하시기를 주님의 영광과 이적을 보고서도 10번이나 주님을 시험하고 그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사람들은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약속의 땅을 보지 못할 것이라(22~23).” 그러시고는 “20세 이상인 모든 사람들은 앞으로 40년 동안 광야를 유리하다가 죽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가데스바네아 불신의 발단이 되었던 10명의 정탐꾼들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36,37),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에 들어가려는 목적으로 애굽을 나왔던 출애굽 1세대 사람들 역시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받은 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이스라엘이 받은 징벌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징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이 또 다른 징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살펴보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이것이 더 무서운 징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➊ 첫째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죄를 범한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산꼭대기로 오르려고 하자(40), 모세가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42)”,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43)”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말하는 바, 이스라엘이 받은 무서운 징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이전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한 번도 이스라엘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머물거나 진행하는 모든 곳에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큰 징벌이고 고통인지 아십니까? 오래 전, 어느 목사님의 설교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부인이 목사님을 찾아와 상담을 했습니다. 그 사연인즉슨, 70년대 초반, 당시 군인이었던 남편이 월남전에 참전하여 월남으로 간 뒤에, 부인이 어쩌다 실수를 하여 부정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남편이 귀국한 후에 이 모든 사정을 알고 있던 남편의 친구가 남편에게 모든 것을 다 말했습니다. 이 일을 듣고 놀란 남편은 부인에게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보복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는 定時에 출근하고, 定時에 퇴근하는 등, 생활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살았습니다.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모든 일을 성실하게 다 준행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나 가족들이 볼 때에도 그는 빈틈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부인에게만은 말 한마디, 눈길 한번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남편을 보는 부인은 완벽한 남편의 모습이 도리어 가시나 바늘처럼 자신을 찌르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두 사람은 비록 같이 살기는 했지만, 따로 사는 것보다 더 잔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죠. 그녀에게 남편은 없었습니다. 잔인한 집행자, 무서운 보복자만 그 부인의 곁에 있었던 것이죠. 지옥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던 부인은 ‘차라리 이혼하거나 죽는 것이 낫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질식하여 죽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목사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것은 부정한 부인을 다루는 남편의 이야기이거나, 불행한 한 가정의 이야기로 듣고 말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구약에서부터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이름에는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는 주님의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하여 타락하기 전, 아담과 하와와 더불어 에덴동산을 거니시면서 늘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갈 방향도 길도 모르고 길 떠나는 아브라함에게, 혼자 도피하던 야곱에게, 종으로 팔려가던 요셉에게, 등등 …. 많은 신앙의 사람들에게 ‘늘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원래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던 그들이 성공한 인생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자신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떠나신다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부터가 지옥이죠. 하나님 없이 홀로라면 아브라함이 애굽과 그랄과 가나안에서 성공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 없이 홀로라면 자기 가족들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던 야곱이 성공할 수 있었겠습니까? 고향으로 돌아오는 얍복 강가에서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절망적으로 몸부림치던 야곱이 형 에서와 화해한 뒤 그 지역의 유지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요셉은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저와 여러분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가져도 가지지 못한 것이며, 아무리 주위에 사람이 많아도 아무도 없는 것과 같으며, 아무리 일해도 헛되며,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삶일 것입니다. 

예레미야 2장과 6장에 보면, 예레미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열심히 헌금하고 열심히 번제를 드리는 등 얼마나 예배를 잘 드렸는지를 설명하는 본문이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2장에서나, 6장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말씀이 그들의 예배와 열심이 하나님 없는 예배와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그렇게 살 수 있고, 예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예배하고 열심내던 그들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라는 망하고, 젊은이들은 죽어가고, 전도유망한 젊은이들은 포로로 끌려가고, 백성들은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데도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처럼 착각하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과 함께 하시고 동행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삶, 하나님이 임재하지 않는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 이것이야말로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불행이요, 가장 잔인한 형벌이요, 가장 수치스러운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➋ 오늘 본문에는 또 다른 징벌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크게 슬퍼한 후,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는 아말렉 사람들과 가나안 산지 사람들과 전쟁을 벌이겠다고 나섰습니다. 이것은 어떤 뜻입니까? ‘가나안 원주민이 무서워 못 가겠고 뒤돌아서 애굽으로 가겠다’고 한 것이 죄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고,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서 가나안 원주민들과 싸우기 위하여 산지로 올라가겠다는 뜻입니다. 그때 모세는 ‘무리’라면서 말렸습니다. 왜요? 그들은 때를 놓쳤습니다. 

그리고 바로 직전까지 하나님 앞에 보인 불신과 그로 인한 추태는 이미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말리는데도, 그들은 귀기울이지 않고 막무가내로 올라갔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45절, “아말렉인과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그들을 무찌르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 모세가 그들을 말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들은 왜 패배했습니까? “여호와께서 함께하지 않는 전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전쟁을 이길 수 있습니까? 

오래전에 한 목사님이 시골교회로 부임하여 갔습니다. 그 마을에 귀신들린 여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어떻게 고칠 방법도 없이 가족들이나 그 마을의 골치덩이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새로운 담임 목사가 오자 교인들과 마을 사람들은 그 귀신들린 여자를 가지고 새 목사를 시험하려고 했습니다. “이 사람만 고쳐내라.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진짜 목사인줄 알 것이고, 온 마을 사람들이 다 교회 나올 것이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지금까지 성령의 은사나 혹은 신유에 대한 것을 말만 들었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목사님은 그 상황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을 시험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과,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과,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진짜 목사라는 것을 귀신들린 여자를 고치는 것으로 보여주어야만 했습니다. 귀신들린 여인을 고치지 않으면 목사로서의 자기 인생은 끝나는 것이고, 교회도 문닫아야하고, 그리고 불신자들은 다시는 교회와 복음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교회에 부임하자마자 죽자 사자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하나님, 앞으로는 이런 부탁을 들어주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이번만은 살려 주십시오.” 그 목사님은 며칠 동안 금식기도한 후에 장로님들을 모시고 귀신들린 여인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 집에 가서는 그 여인의 머리에 손을 얹고는 땀인지 눈물인지 비인지 모를 정도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여기가 마지막입니다. 지금이 마지막입니다. 제게는 다음이나 내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신다면, 이 귀신들린 여인을 살려주시고, 저도 살려주시고, 교회도 살려주십시오. 제가 여기서 실패하면 모든 것은 끝장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 여인을 고치셨으며, 후에 귀신들렸던 그 분은 현재 그 교회 권사님이 되어 계신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좋게 끝나서 그렇지, 만약 귀신들린 여인을 고치지 못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수치가 어디 있습니까? ‘아니 목사라는 게 저것밖에 안 돼? 저게 목사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저런 사기꾼이 어디 있어? 아무리 기도해도 그 기도를 듣지 않는 저런 기도는 해서 뭐해?’ 문제는 그런 목회자 그런 성도가 있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떠나시면, 여러분은 아주 작은 시험이나 시련도 이겨내지 못하고 늘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하는 일 마다 되는 일이 없으며, 예상치 못한 재앙이나 재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수고와 노력도 오직 실패의 열매만 낳을 것이며, 손해 보는 일만 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여 늘 패배자로 살겠지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인생 싸움은 해봐야 승산이 없는 싸움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3. 가장 안전하고 성공적인 삶

말씀을 맺겠습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여러분들에게 다시 묻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신 것을 경험하면서 살아오셨습니까?” 성도가 받은 최대의 복은 임마누엘이신 하나님과 항상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 곁에 계시지 않는다면, …. 성도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여러분이 이 땅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잔인한 형벌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은 하나님 없이 지내는 삶에 익숙해져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시지 않는데도, 하나님이 침묵하시는데도,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고,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데도, 별 문제의식 없이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세상에서 가장 위태로운 삶을 사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은 마치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서 살아가는 사람과 같습니다. 백척간두란 백 자, 즉 30m나 되는 높은 장대 위에 올라섰다는 뜻으로, 몹시 어렵고 위태로운 지경을 이르는 말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그렇게 위험하다는 말이죠. 그러므로 하나님 없는 성공과 출세와 돈에 만족하지 마시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작은 일상에 감사하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즐거움이 땅을 덮고, 바다를 덮으며, 하늘을 뛰어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성공적인 삶은 주님과 함께 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것임을 기억하고, 그 동행의 복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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